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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88화 (88/194)

88화

밤, 롤카의 본진. 낮의 참패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그곳에는 밤늦게까지 격론이 오가고 있었다.

“머뭇거릴 때가 아닙니다! 내일부터 당장 총력전을 펼쳐야 합니다!”

“그렇소! 오늘 같은 망신을 또 당한다면 국왕 폐하의 얼굴을 볼 낮이 없소.”

“아니 그걸 누가 모르오? 방법을 말해 보란 말이오, 방법을!”

롤카군의 참모와 장군들은 저마다 소리쳤다. 개전 당시 기껏해야 일주일이면 끝날 것 같던 공성전은 이미 한 달 이상 계속되고 있었다.

문제는 윈드시크릿의 철통과 같은 성벽이었다. 윈드 시크릿의 성벽 높이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리고 성벽 두께도 얇아 전쟁 초반 성벽을 부수려는 시도도 많이 해 보았다.

그러나 그 어떠한 공성 병기도 윈드시크릿의 성벽에 생채기도 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윈드시크릿의 성벽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콘크리트도 고대 유적에서 직송한 강화 콘크리트로 만들어서 강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알 리 없는 롤카군은 공성 병기만 소모했을 뿐,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어진 지루한 공성전. 그 역시 뾰족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원래 공성전이란 방어하는 측이 공격하는 측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것이 사실이었다.

거기다 윈드시크릿 성은 하륜이 여기저기서 주워 온 고대인의 테크놀로지가 집합된 건물이었다.

그 때문에 롤카군은 무려 1만 명 이상의 병사를 동원해 윈드시크릿을 공략했지만, 모조리 실패하고 부상당한 병사만 해도 수천을 넘기고 있었다.

“모두 닥치시오!”

참다못한 헥사스는 소리쳤다. 그의 입장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윈드시크릿 공략에 실패하여 차선책으로 마하임의 암살을 계획했지만 그나마 실패하고, 나름 회심의 반격으로 함정까지 설치했지만 그것 역시 마하임의 등장으로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실패해 버리고 말았다.

“흥, 뭐가 그리 잘났다고 소리를 치시오! 그대의 오판 때문에 상황만 더 나빠졌잖소!”

부사령관 휴스 장군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전황만 보면 이미 롤카는 패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단신으로 쳐들어온 마하임조차 롤카군은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윈드시크릿을 공략한단 말인가?

“큭 크큭, 크하하하하!”

갑자기 헥사스는 웃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노와 자포자기가 뒤섞인 절망적인 웃음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롤카 정계에 입문했다.

비록 천시 받는 네크로맨서였지만, 그의 압도적인 재능과 잔혹함에 대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롤카의 국왕조차 헥사스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젠 한낱 장군조차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

“어차피 언데드 오우거를 잃었을 때부터 내 운명은 끝났다. 그래, 보여 주마. 이 헥사스의 무서움을!”

* * *

날이 밝았다. 간밤에 쏟아붓던 비도 이제는 그쳤다.

롤카군은 여전히 윈드시크릿을 포위하고 있었다.

늦은 여름이라 습도는 숨이 쉬기 어려울 정도로 올라갔다. 하지만 윈드시크릿 상공에 떠 있는 비공정 안은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하아, 그냥 마하임 님을 따라갈 걸 그랬나?”

비공정의 침실에 누워 뒹굴거리던 안나는 집에서 떠나올 때 챙겨 온 과자 하나를 입에 넣었다.

지금 안나가 있는 비공정 내부의 객실은 매우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 비공정은 윈디의 생일을 기념해, 시오니아 제국의 황제 신시아가 직접 선물한 비공정인 만큼, 침대부터 시작해서 샤워실 등 웬만한 귀족의 방은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잘 만들어져 있었다.

“안 돼, 안 돼. 사람 많은 건 질색이란 말이야.”

베고 있던 베개로 머리를 감싸는 안나. 안나는 낯을 많이 가려서 웬만해서는 모르는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다.

예전 무투회 때도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끌어다가 억지로 참석하고 난 뒤, 그 후유증으로 한동안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영주님이란 이야긴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더 대단하네.”

지난 밤, 비공정 안에서 마하임과 그를 보러 온 인파를 본 안나는 그제야 마하임이 영주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수많은 사람이 마하임의 등장에 환호했고,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은 하이엘프인 세실이었다.

“내가 너무 민감한 거겠지, 그런 거겠지?”

비록 망원경으로 본 모습이었지만, 세실의 외모는 안나 자신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아, 생각하지 말자. 애초에 나 따위가 마하임 님을 넘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야.”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안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안나 역시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외모였기는 하지만, 애초에 노옴과 하이엘프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경고! 고에너지 반응이 확인되었습니다. 위치는 전방 4km 지점. 락온 당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비공정 안에 울려 퍼진 경고음. 안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뭐? ‘락온’?! 저놈들 광학 병기를 가지고 있었나?”

가지고 있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처음 언데드 오우거를 봤을 때도 광학 병기를 사용했었고, 시오니아의 제국의 하수인 롤카 왕국이라면 광학 병기 한두 개 정도 운영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아, 안 돼! 이 비공정을 망가트리면 윈디 님이 날 죽이려 할 거야.”

안나는 허겁지겁 비공정의 조정실로 달려갔다. 안나는 비공정의 조종간을 잡으며 외쳤다.

“대빔 방어 시스템 온!”

이 비공정은 전투용이 아니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방어 장치는 갖추고 있었기에 바로 대응하면 추락만은 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슈아악 지이잉-!

번뜩이는 빛이 비공정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갔다. 다행히 첫 일격은 피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적의 공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동일 위치에서 고에너지 반응이 확인되었습니다. 충전 완료까지 3초.]

다시 들려온 비공정 방어 시스템의 경고음. 안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비공정의 크기는 길이만 해도 무려 40m. 무게는 300톤에 육박했다. 이 거체가 윈드시크릿에 추락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참사가 일어날 게 분명했다.

“추락만은 안 돼!”

안나는 입을 악물고 비공정의 조종간을 옆으로 꺾었다. 중심축이 좌측으로 쏠리는 비공정.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슈아학 지이잉-!

쾅-!

날카로운 폭음과 함께 비공정이 흔들렸다. 다행히 추락할 만큼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고에너지 반응 위치 좌표 확인해 줘.”

[좌표 확인. 모니터에 표시합니다.]

시오니아 제국 최신의 비공정답게 비공정의 방어 시스템은 신속하게 안나의 명령을 실행했다. 그리고 비공정 조종실 상단의 홀로그램 모니터에 방금의 광학 병기를 사용한 적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났다.

“맙소사, 저게 왜 여기에 있어?”

그것은 안나에게도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저건 안나의 고향 노우스랜드에서 개발 중이었던 최신형 마장기, 에테르였다.

안나가 고향을 버리고 떠날 때만해도 프로토 타입의 시험체에 불과했는데 그 완성형이 롤카의 진형에 떡하니 서 있었다.

“안 돼! 이 비공정으로는 이길 수 없어. 이대로는 맞추기 좋은 표적에 불과해!”

불행 중 다행으로, 에테르의 생체 레이저는 2연사가 한계인 듯했다.

안나는 비공정의 출력을 줄인 뒤 윈드시크릿 성의 빈 곳에 추락하듯 착륙했다.

기이이잉 슈아앙-!

사방으로 먼지가 휘날리며 비공정은 땅에 처박을 기세로 맹렬하게 추락했다. 그리고 땅에 닿기 직전 가까스로 비공정은 멈췄다.

착륙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난폭했지만, 일단 비상 착륙으로 비공정의 폭발은 막을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살았다.

안나가 가슴을 쓸며 한숨을 쉴 무렵, 마하임이 비공정 조종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왔다.

“괜찮으세요?! 안나 님.”

“그다지 괜찮지는 못해요. 마하임 님.”

울상을 짓는 안나. 마하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안나에게 다시금 물었다.

“방금 그 빛은 뭐죠? ‘사광’ 같았는데.”

“맞아요. 마장기 에테르의 광학 병기. 어째서 저 녀석이 롤카군에게 있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잠깐만요. 에테르라고 하셨습니까?”

안나의 말에 되묻는 마하임. 그는 순간 누군가에게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마장기 에테르에 대해서라면 마하임 역시 모를 리 없었다.

동급 마장기 중 최고의 기동력과 화력을 가지고 있는 전천후 만능 마장기 에테르.

노옴 일족의 히든카드였지만, 시오니아 제국의 공작에 말려 노획당한 뒤 제국 마장기 부대의 선봉이 되어 대륙을 불태웠던 악몽과 같은 마장기였다.

“네, 제가 알기로는 에테르 맞아요. 왜냐하면, 제가 저걸 만드는 데 참여했거든요.”

“일단 알겠습니다. 내려오시죠. 작전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네…. 하지만 승산이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안나도 확실히 알지는 못했지만 저게 정말 에테르가 맞다면 윈드시크릿의 승산은 제로에 가까웠다.

에테르는 광학 병기뿐 아니라 기동성과 방호력, 모든 점에서 기존의 마장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강했다.

제아무리 윈드시크릿 성이 튼튼하게 지어졌다 하더라도 저 에테르라면 가볍게 성벽을 타고 넘어 버릴 것이다.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은 학살뿐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순 없습니다.”

마하임은 굳은 얼굴로 비공정을 내렸다. 안나 역시 마하임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그녀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지만, 안나는 마치 자신이 죄인이 된 기분마저 들었다.

마하임이 돌아오자 즉시 작전 회의가 열렸다. 하륜을 비롯한 윈드시크릿의 수뇌부가 모두 모인 긴급 작전 회의였다.

“믿을 수 없어! 그런 괴물 같은 마장기가 롤카에게 있다고?!”

마하임의 설명에 세실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하륜은 침묵했지만, 그 외 다른 사람들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럼 막을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까?”

제난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눈치를 보던 안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마장기는 마장기로밖에 못 막아요. 더욱이 에테르라면, 대마법, 대정령술 반응 장갑 때문에 마법이나 정령술을 완전 무효화해 버려서 원거리 공격도 안 통하고요.”

안나의 말에 모두는 탄식했다. 마장기의 위력은 여기에 있는 사람 모두 다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에테르는 지금까지 그들이 아는 마장기와 비교해 격이 달랐다.

‘이런 역사는 겪어 본 적 없어! 어떻게 된 거지?’

롤카가 저런 최신형 마장기를 운용한다는 이야기는 마하임이 회귀하기 전, 그 미래에서도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일이 현실이 되었고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마장기는 마장기로밖에 상대할 수밖에 없죠.”

“안나 님의 마장기로는 어떨까요?”

마하임은 무투회 때 사용한 안나의 마장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야차는 대인용 마장기예요. 게다가 코어라 할 수 있는 엘리까지 압수당한 상태라, 행동 예측 시스템도 사용할 수 없어요. 지금의 야차로는 에테르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영지에도 마장기라면 한 대 있지 않습니까?”

하륜의 말에 그제야 마하임은 제페쉬의 마장기를 떠올렸다. 지금은 움직이지 못하지만, 안나가 있다면 수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콰콰쾅-!

갑작스레 들려온 폭음 그리고 지진이 난 것처럼 대지가 흔들렸다. 마하임은 인상을 구겼다. 말할 것도 없이 롤카의 마장기가 공격을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급보입니다. 정체불명의 적이 성벽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병사 한 명이 회의실로 허겁지겁 달려와 말했다. 시간이 없었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마하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륜, 맡기겠다.”

“네,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겠습니다.”

“제페쉬는 나와 함께 마장기로 간다.”

“네. 알겠습니다.”

마하임은 안나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안나.

마히임은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은 정점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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