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마장기. 시노쿠 대륙의 역사를 바꾼 장본인이 바로 이 마장기였다.
마장기는 그 종류도 수백 수천에 이를 정도로 다양했지만, 일반적인 마장기의 재원은 키 3미터 무게 10톤가량의 인간형이 가장 많았다.
마장기의 기원은 고대인이라고 불리우는 구인류. 아직 모든 것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단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마장기가 무기이며, 이 무기가 기존의 성벽을 거점으로 공성전에 카운터를 날릴 만큼 강력한 무기라는 점이었다.
지이잉 슈화아악-!
새하얀 윈드시크릿의 강화 콘크리트 성벽이 붉게 달아올랐다. 적의 마장기, 에테르에서 뿜어져 나온 광학 병기는 연이어 윈드시크릿의 벽을 강타했다.
“아무리 에테르라 할지라도 콘크리트를 녹이진 못하는군요.”
보통의 성벽이라면 벌써 무너졌겠지만, 윈드시크릿의 성벽은 그 보통의 성벽이 아니었다.
그 덕분에 이렇게 버틸 수는 있었지만, 그저 버티기만 해서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망할! 어디서 저런 괴물 딱지를 가지고 온 거야?!”
세실은 짜증 섞인 말을 연이 뱉어냈다. 마장기에는 기본적으로 마법과 정령술이 안 통했다.
물론 최상급 마법이나 정령왕급을 소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긴 했지만 그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나 정령사는 윈드시크릿에 없었다.
“지금은 버티는 수밖에 없습니다.”
몸을 웅크리고 성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요한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요한의 주특기인 오러소드는 생명체에게만 효과 있었기에 마장기에는 통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히 롤카의 저 마장기는 원거리 공격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성벽을 공략하기 시작하면 아군의 피해는 불가피했다.
“나는 롤카 원정군 총대장 헥사스다!”
바로 그때 들려온 헥사스의 목소리. 그의 목소리는 마장기에 장착된 확성기를 통해 윈드시크릿의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마지막 경고다. 즉시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라! 항복하지 않으면 윈드시크릿의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자신에 찬 헥사스의 외침. 그의 목소리를 들은 하륜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헥사스가 타고 있는 마장기를 향해 말했다.
“그대의 마장기 쇼는 잘 봤습니다. 그런데 제국에서 구걸해 온 그 마장기 한 대로 뭘 하겠단 말입니까?”
“뭐, 뭐라?!”
“그딴 광학 병기로는 이 성벽에 생체기도 만들 수 없습니다. 자신 있으면 직접 오시죠. 뜨거운 맛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륜의 말에 발끈한 헥사스는 다시금 광학 병기를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에테르라고 하지만 광학 병기를 무한히 사용할 만한 에너지는 없었다.
“좋다! 네놈의 이름이 하륜이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만.”
“네놈만은 반드시 죽여 주마!”
“할 수 있다면요. 제게 그런 말 한 사람치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륜은 이렇게 말하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번 전쟁은 시작부터 여러모로 불리하고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하륜 자신의 명령으로 설탕을 만들어 유통시키긴 했지만, 그 물량은 극히 적었고, 더군다나 극비로 진행시켰는데 한 달도 되지 않아 롤카에서 정보를 알아챘다는 게 아직도 이해되지 않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롤카쯤 되는 대국이 일개 영지에 불과한 윈드시크릿에서 설탕 좀 유통한다고 쳐들어온다는 건 너무 좀스럽지 않습니까?”
“설탕은 우리 왕국과 시오니아 제국에게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이다! 감히 설탕을 노리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아아, 언제 나오나 했나요. 하늘 타령. 그 하늘이 당신을 이기게 해 주는지 어디 한번 봅시다.”
하륜은 뒤돌아섰다. 더는 말을 섞을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쯤 하면 충분히 도발은 했고 헥사스의 성격이라면 더는 참지 못할 것이다.
“네 이놈!!! 반드시 찢어 죽이리라!”
헥사스는 거칠게 마장기를 몰고 윈드시크릿 성벽을 향해 달렸다.
윈드시크릿 성벽의 높이는 12m. 헥사스의 마장기 에테르의 성능이라면 이 성벽을 타고 넘는 데에는 5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스컹 쾅-!
달려온 마장기는 윈드시크릿 성벽에 달라붙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를 본 하륜은 즉시 외쳤다.
“지금입니다. 모조리 쏟아부으십시오.”
하륜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사들은 성벽 아래의 마장기를 향해 투명한 액체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성벽을 기어 올라오는 헥사스는 움찔하며 액체를 피하려 했지만, 그렇게 정교한 움직임은 아무리 에테르라 할지라도 불가능했다.
“겁이라도 먹은 거냐? 이딴 물로 뭘 하겠다는 거지?”
하륜은 대꾸도 하지 않고 미리 준비해 놓은 기계 장치를 들어 올렸다. 그 기계 장치는 팔뚝만 한 케이블에 연결되어 성벽 안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한번 버텨 보시죠. 백만 볼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하륜의 외침과 동시에 윈드시크릿의 성벽에는 무려 백만 볼트의 전기가 순간적으로 흘렀다.
마장기에 몸체에 뿌려진 액체는 전기가 잘 통하게 만들어진 전해질 젤리. 이 젤리는 전격의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파지직 콰앙!
전격이 흐르자 찢어지는 폭음과 함께 헥사스의 마장기는 성벽에서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바닥을 수십 바퀴 구른 뒤 겨우 멈춰 섰다.
“다행히 효과가 있군요.”
성벽에 전기를 흐르도록 만든 것은 어디가지나 성벽을 오르는 적 병사를 감전사시키기 위해 준비한 함정이었다.
급하게나마 전력을 증폭시켜 사용하기는 했지만, 저 마장기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와, 끝내주잖아?! 성벽에 언제 이런 장치를 해 놓은 거야?”
세실은 성 밖 바닥에 처박혀 있는 마장기를 보며 감탄했다.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 마장기를 단 일격에 쓰러트리다니, 놀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하지만 하륜은 이렇다 할 반응 없이 마장기를 노려볼 뿐이었다.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지만, 유감입니다.”
하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닥에 쓰러져 있던 헥사스의 마장기가 몸을 일으켰다.
주춤거리며 몸을 가누던 마장기는 이내 자세를 잡고 하륜이 있는 곳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딴 장난이 이 마장기에 통할 것 같으냐?!”
화가 난 헥사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혹시나 기대를 했던 하륜이었지만, 역시 백만 볼트 정도의 전기로는 마장기를 쓰러트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륜은 몸을 돌려 모여 있는 요한과 세실, 제난, 아나모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총력전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마장기가 성벽을 넘어 안쪽으로 들어오면 패배는 피할 수 없습니다. 영주님이 돌아오실 때까지만 버텨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모두 각자 위치로.”
마장기는 마장기로밖에 상대할 수 없다. 하지만 성벽을 넘지 못하게 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라고 하륜은 판단했다.
“이젠 용서치 않겠다. 각오해라!”
제페쉬의 마장기는 다시금 윈드시크릿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성벽은 여전히 견고했지만 벽을 오르는 마장기를 막을 만한 함정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만능의 힘 마나! 그 목적 없는 힘이여! 절대의 냉기로 적을 멸하라! 아이스 해머!”
첫 시작은 제난의 마법이었다. 목적은 마장기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것.
만능의 힘 ‘마나’에 의해 급속히 냉각된 대기는 마치 거대한 망치의 형상으로 변해 마장기를 향해 내리꽂혔다.
콰직-!
순식간에 새하얀 서리로 뒤덮히는 헥사스의 마장기. 그러나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크큭! 내 마장기에 그딴 마법이 통할 것 같은가?”
굳은 듯 멈춰 있던 헥사스의 마장기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장기 본체를 얼리고 있는 얼음 조각은 일순간 부서져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마장기는 다시금 몸을 움직였다.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만능의 힘 마나 그 목적 없는 힘이여. 영겁의 화염으로 적을 불태워라! 파이어 블래스터!”
연이어 시전된 마법. 이번에는 6클래스 화염계 최강의 마법이라 일컬어지는 파이어 블래스터. 1만 도에 이르는 불길이 순간 마장기를 덮쳤다.
“마법 따위 통하지 않는다! 설마 몰랐다고는 하지 않겠지?”
헥사스는 비웃듯 제난을 향해 말했다. 마장기에 마법이 안 통한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상식.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이글거리는 불꽃 사이로 마장기는 성큼성큼 성벽 위를 향해 올라왔다. 파이어 블래스터의 영향으로 성벽까지 붉게 달아올랐지만 헥사스의 마장기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물러서, 제난. 다음은 나야.”
굳어 있는 제난을 뒤로 물리고 세실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는 세실. 하이엘프의 특권, 정령회랑에 접속한 세실은 이내 자신과 계약한 정령을 소환했다.
“폭풍 속 전율의 바람이여! 나와 주세요. 실프라!”
세실의 몸 주변에 갑작스럽게 돌풍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돌풍은 순식간에 세력을 확장하더니 헥사스의 마장기를 덮쳤다.
휘이이이잉-!
돌풍의 기세는 맹렬했다. 마장기에 정령술은 통하지 않았지만, 세실이 노린 것은 정령술 그 자체가 아니라 정령술의 부가 효과인 바람이었다.
돌풍은 순간 마장기를 집어삼켰다. 헥사스는 갑작스러운 돌풍에 깜짝 놀라 마장기의 몸을 웅크렸다.
그그그극-!
벽에 매달려 있는 헥사스의 마장기는 뒤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거센 바람만으로는 마장기에 조금도 상처를 낼 수 없었다.
“지금입니다! 투석기 앞으로!”
하륜의 외침과 동시에 커다란 돌을 매단 투석기가 뒤에서 나타났다.
원래 적의 투석기를 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개조해 성벽을 기어 올라오는 마장기를 목표로 할 수 있게 만들어진 투석기였다.
“조준! 발사!!!”
하륜의 외침과 함께 투석기가 일제히 돌을 투하했다. 투석기의 돌을 맞은 헥사스의 마장기는 다시금 뒤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러나 돌 같은 것으로 마장기에게 타격을 입힐 수는 없었다.
“크윽! 이놈들 더는 용서 못 한다!!!”
헥사스의 마장기 등 부분의 장갑이 열리더니 양쪽으로 날개가 펼쳐졌다.
쿠르릉 푸화아악!
순간 새하얀 연기와 함께 마장기는 튕겨져 오르듯 단숨에 윈드시크릿 성벽 위로 위로 치솟았다.
“망할! 제트팩인가?!”
하륜은 탄식하듯 외쳤다. 제트팩은 단거리 점프를 위해 만들어진 마장기 전용의 이동 수단이었다.
그것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설마 저 마장기에 탑재되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쿵-!
단숨에 성벽 위로 올라온 헥사스의 마장기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성벽 위 하륜 앞에 착륙했다.
검붉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인간형 거인. 그 키만 해도 3m가 넘었고 몸에 흐르는 기묘한 무늬는 이 마장기가 일반적인 마장기가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게 해 주었다.
“자, 약속한 대로 찢어 죽여 주마.”
독이 오를 대로 오른 헥사스가 외부 마이크를 향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하륜. 그 앞을 요한과 아나모네가 가로막았다.
“여기부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솔직히 마장기와 직접 싸워 보기는 요한 역시 처음이었다. 하지만 처음이라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지금 여기가 뚫리면 단숨에 성문까지 뚫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성문 밖에 포진하고 있는 롤카의 병력들이 윈드시크릿 성안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전쟁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인간 주제에 마장기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요한과 아나모네를 향해 조소했다. 하지만 둘은 말없이 검을 뽑아 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