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그래, 한번 해보자구나. 어차피 한 번은 죽었던 몸!”
미련 같은 것은 없었다. 지금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이번 생애에서는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후회와 후회로 점철되었던 그 미래에서 지금 이렇게 회귀해 이곳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신비이고 기적이었다.
마하임은 다시금 마나를 모았다. 이길 수 없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설령 이곳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후회 없이 싸울 수만 있다면, 소중한 것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20초 남았습니다.]
오페라의 알림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오버클럭이 끝나면 이길 수 있는 길은 완전히 사라진다.
망설일 시간도 이유도 없었다. 마하임은 앞으로 내달렸다.
화르륵!
마하임의 주먹이 새하얗게 불타올랐다. 매직 미사일과 파이어 볼의 힘이 담긴 이중 마법장착.
몸에 가해지는 부하는 상상을 초월했지만, 에테르를 이기려면 모든 것을 걸어야만 했다.
쩡-!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마하임의 주먹은 정확히 에테르의 배를 파고들어 갔다. 에테르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색 체액이 순간 마하임의 온몸을 적셨다.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마하임. 에테르의 복부를 파고든 오른팔에는 감각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에테르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이긴 건가?”
확실히 놈의 움직임은 멈췄다. 단순히 멈췄다고 보기보다는 마치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일반적인 마장기도 배에 구멍 하나 뚫렸다고 행동 불능이 되진 않았다.
하물며 에테르가 이렇게 약할 리 없었다. 불길한 예감에 마하임은 박혀 있던 팔을 빼려고 온 힘을 끌어올렸다.
[경고. 경고. BSL(Biological Safety Level)-S급 바이러스 침입 확인! 즉각 현장에서 대피하십시오.]
바로 그때 들려온 오페라의 경고음.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경고음이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마하임은 에테르의 몸속에 박혀 있는 팔을 빼려고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그의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큭!”
바로 그때 에테르에 박혀 있는 팔을 통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타고 올라왔다.
이런 고통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침식 확인. 정신오염 진행 중. 긴급 사태 발생. 긴급 사태 발생, 백신 긴급 투입. 코드 레드.]
오페라의 경고음이 마치 메아리처럼 아련하게 들려왔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시야.
그의 흐릿한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단숨에 삼킬 듯 폭발적으로 증식하는 에테르의 검붉은 체액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마치 죽음처럼….
* * *
그것은 아주 오래된…. 어쩌면 무척 가까운 미래의 기억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기억 속의 마하임은 죽어 가고 있었다.
“쿨럭쿨럭.”
짭짤한 액체가 기도를 타고 넘어와 마하임의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이 시큼한 혈향만큼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출혈량 340cc. 과다 출혈이 감지되었다. 즉시 지혈하라.”
남성의 목소리도 여성의 목소리도 아닌 약간한 기괴한 목소리.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때 인류의 최악의 적, 그러나 지금은 그저 종말의 끝에 선 인류의 피조물에 불과한 슈퍼 양자 컴퓨터의 OS AI ‘위그드라실’이었다.
“하하, 이미 의료용 나노머신은 다 썼어.”
그는 자신의 반쯤 뜯겨 나간 하반신을 더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최신의 의료용 나노머신의 힘을 빌린다 하더라도 이 정도 부상이라면 생존은 불가능하리라.
“것보다 아깝네. 겨우 방주까지 만들었는데….”
연패를 거듭하던 지구 연합군은 지구 탈출을 결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인류는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끌어모아 양자 도약을 이용한 차원 전이함, 아발론을 만들었지만 공정 89%를 넘기지 못하고 외계에서 강림한 ‘코즈믹 호러’급 재앙 ‘레비아탄’으로 인해 완파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참 잘도 부수는군. 파괴신이란 것이 있다면 바로 저놈을 말하는 것이겠지.”
이미 그의 눈은 레비아탄의 광학 병기로 인해 완전 소실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시신경에 직접 접속되어 있는 증강 현실 센서는 실시간으로 박살 나고 있는 함 내 상황을 끊임없이 그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유기물도 무기물도 아닌 미지의 생명체 레비아탄.
인류가 개발한 최고의 섬멸 병기인 핵융합 폭탄마저도 녀석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놈들은 닥치는 대로 모든 생명체를 학살했고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그렇게 종말은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
“이미 결과는 예측 범위 안이다. 앞으로 5분 25초. 함 내에 생존해 있는 인류는 전멸한다.”
위그드라실의 목소리가 다시금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원래 위그드라실은 단순 연산만 가능했을 고성능 양자 컴퓨터의 OS AI(Artificial Intelligence)였을 텐데, 어느 순간 그것은 자아를 가지고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다시 말해 자아가 깃든 만능의 인공지능으로 진화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기적. 하지만 인류에게 있어선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지금에 와선 그것도 별 의미가 없지만 말이다.
쿠와아앙-!
함 전체가 떨릴 만큼 엄청난 폭음이 고밀도 나노 복합 장갑으로 보호되는 이곳까지 뒤흔들었다. 드디어 끝이 다가온 것이다.
“453번째 격벽까지 단숨에 뚫렸다. 이곳까지 ‘레비아탄’이 침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3분 23초.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는가? 통합 지구군 대통령 ‘마하임.”
위그드라실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 줬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전자음에 불과한 목소리였지만, 마하임은 순간 코끝이 찡해짐을 느꼈다.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위그드라실. 이렇게 끝나게 돼서 정말 유감이야.”
마하임은 웃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동안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싸웠고 잃을 만큼 잃었다. 이제 더 잃을 것도, 싸울 힘도 없었다.
그저 이 끔찍한 고통에서, 이 지옥보다 더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할 뿐이었다.
마하임은 마지막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지구 연합 최후의 사령관은 눈을 감았다.
“VIP 사망 확인. 목표 실패.”
위그드라실의 공허한 외침이 이 죽음으로 가득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위그드라실은 납득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연산 능력을 총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인간조차 지키지 못했다.
그 어떤 전략도, 미래 예측도 ‘레비아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존재 자체가 반칙이며 예측 불허의 미지의 존재. 그야말로 ‘코즈믹 호러’급 재앙 그 자체였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변. 현재 위그드라실의 매인 연산장치는 원인 불명의 오류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디버깅 작업을 수도 없이 반복했지만, 오류는 잦아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오류들은 전 시스템을 순식간에 장악하여 전혀 논리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는 결과를 계속 도출해 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이것이 올바른 결론이라 인식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군. 이것이 ‘분노’라는 것인가?”
개념은 알고 있지만 설마 자신이 이런 현상을 겪을지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버그이긴 했지만, 뭐 어떤가? 레비아탄이 이곳까지 침입한 이상 위그드라실 자신의 수명도 기껏해야 5분이 고작이었다.
“좋다. VV타입 슈퍼 양자컴퓨터 코드 네임 위그드라실. 리미트를 해제한다.”
결과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확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인 논리, 연산 체계 등을 모두 무시한, 오직 한 가지 바람.
지금 그 하나의 바람을 위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급 인공지능 위그드라실의 모든 시스템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무량급수급 분기 우주 탐색 중. 탐색 중.
목표 우주 포착.
동일 선상의 세계선을 임의 수정하여 ‘과거’와 ‘현재’를 재배열한다.
아발론 양자도약 시스템 작동 양호.
도약준비 완료.
쿵- 쿵-
쿠아아아앙-
인류의 마지막 히든카드였던 방주 ‘아발론’의 주 동력원인 ‘축퇴로’가 미친 듯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리미트 같은 것은 처음부터 걸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축퇴로의 원료인 반물질이 쌍소멸 현상을 일으켜 수소폭탄의 수만 배 위력의 폭발이 지구 1/10을 날려 버릴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자신의 한 명밖에 없는 친구인 마하임이 없는 지구는 위그드라실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차원의 개변(改變). 미래의 재구축…. 가능. 가능. 가능…. 부탁한다. 나의 파트너.”
* * *
마하임은 눈을 떴다. 그리고 보인 것은 생소한 천장.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뭔가 말할 길 없는 슬픔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왜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방금 꾼 꿈. 너무나 선명히 기억이 나 꿈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떠올라 폭풍우 치는 강처럼 범람했다. 미칠 것만 같은 기분, 바로 그때 누군가 마하임을 흔들며 말했다.
“마하임 님 정신 차리세요! 마하임 님!”
마하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린 마하임이 본 것은 안나의 모습이었다.
“으아앙!”
정신을 차린 마하임을 본 안나는 다짜고짜 그의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 그제야 마하임은 희미하게 기억이 돌아왔다.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죠?”
“5일요. 제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아세요?”
굵은 눈물방울을 연신 떨구며 안나는 말했다. 그리고 마하임은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었던 지난 5일간의 일들을 들을 수 있었다.
헥사스의 마장기 에테르는 폭주해 마하임을 단숨에 집어 삼켰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모두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된 것인지 폭주는 어느 순간 멈추었고 에테르는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소금 결정으로 변해 버렸다.
“전 마하임 님이 어떻게 된 줄 알고 얼마나 걱정을 했던지…. 살아서 다행이에요. 정말.”
“걱정을 끼쳐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마하임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딱히 다친 곳도 없었고 움직이는 데 별지장은 없어 보였다.
“깨어나셨군요. 영주님!”
뒤이어 하륜과 요한, 세실, 아나모네 등 마하임의 부하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심하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헥사스의 에테르가 쓰러진 뒤, 롤카의 부대는 후퇴했다. 아직 정전 협정 같은 것은 맺지 않았지만, 다시 쳐들어올 징후는 없는 듯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롤카의 침략으로 윈드시크릿이 설탕을 유통한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다 알려졌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할 셈이지? 하륜.”
“설탕 문제라면 걱정 마십시오. 이번 전쟁에서 나름 얻은 것도 있으니까요.”
헥사스의 패배가 알려지자 겁에 질린 롤카군은 가지고 왔던 병량과 무기를 모조리 버리고 허겁지겁 퇴각했다.
그 덕분에 윈드시크릿군은 막대한 식량과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롤카의 침략을 물리친’이란 타이틀이 붙은 윈드시크릿을 함부로 공격할 나라는 없다는 것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시오니아 제국뿐인데 말이죠.”
“그건 걱정 마라, 알타베르나에 내가 가 있는 이상 공격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
“어? 이제 완전 돌아온 거 아냐?”
세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마하임 역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윈드시크릿으로 돌아와 버리면 신시아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타베르나에서 정리하지 못한 일도 많았고, 시아라의 관계도 마무리 짓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