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조 편성도 끝났으니 본 과목에 대해 잠시 설명하겠다요. 이 수업은 조 구성원들의 협동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이수가 불가능하니 각 조원 간의 협력은 필수다요.
자, 그럼 이제부터 각 조가 수행해야 할 임무를 주겠다요. 각 조의 조장은 앞으로 나와라요.”
윈디의 말을 대충 요약해 보자면, 이 수업은 4명이 한 조가 되어 일정한 미션을 해결하는 방식의 수업인 듯했다.
다시 말해 파티 구성원들의 협력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수업인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마하임의 조는 그야말로 최악. 다른 말로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저기 그럼 조장은 누가 하죠?”
“크큭, 난 누가 되든 상관없다.”
“아, 나도 조장 같은 건 관심 없소.”
샤오랑까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자 마하임에게로 시선이 모아졌다. 마하임은 인상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빨리 조장을 정해라요. 이 과목이 어떤 취지로 만들어졌는지 간단히 설명해 주겠다요.”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은 윈디도 마찬가지였다. 나름 정색을 하고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윈디였지만,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참다못한 윈디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들. 주목하지 못한다요?!”
악에 받친 윈디의 목소리가 강의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변화에 어수선하던 강의실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나 윈디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모양인지 섬뜩한 붉은색 기운을 사방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이제야 조용해졌다요. 요즘 몸을 좀 사렸더니 나를 물로 보냐요? 모두 죽고 싶다요?!”
윈디의 외침에 강의실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최근엔 방정맞고 장난끼 많은 님프라는 포지션을 하고 있었지만, 한때 ‘홍염의 마도사’라 불리며 대륙을 공포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바로 그녀였다.
“두말하지 않겠다요. 어서 조장은 앞으로 나온다요!”
윈디의 말에 각 조의 조장들이 윈디의 앞에 나섰다.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는 마하임의 조 역시도 누군가는 해야만 했다.
“저기, 마하임 님이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도 찬성하오. 마하임 공이라면 믿을 수 있고말고.”
안나와 샤오랑이 이렇게 말하자 마하임은 두말 않고 일어섰다. 시간을 끌어 봤자 머리만 더 아플 뿐이었다.
일어선 마하임은 곧장 윈디가 있는 강단 앞으로 나갔다.
이미 강단에는 각 조에서 뽑혀져 나온 조장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수는 20명 남짓, 그 구성원들은 언뜻 보아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종족들도 모두 가지각색, 정말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선남선녀들이 모여 있었다.
“그럼 이 상자 안에 있는 봉투를 각 조장은 한 장씩 뽑는다요. 그 봉투 안에 이번 학기, 여러분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적혀 있다요.”
그녀의 말에 따라 모인 사람들은 일렬로 서서 조금은 투박해 보이는 상자 안에서 저마다 봉투 하나씩을 뽑기 시작했다.
마하임은 늦게 나오는 바람에 줄의 맨 끝에 설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조용한 정적까지 흐르는 가운데 추첨이 진행되었다.
꽤 걸릴 것만 같은 이 추첨은 의외로 빨리 진행되어 채 몇 분 지나지 않아 마하임의 차례가 왔다.
“뭘 보냐요? 뽑아라요.”
물끄러미 윈디를 바라보는 마하임. 마하임은 마지못해 통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혹시 또 뭔가 이상한 조작을 한 건 아니겠죠?”
“그, 그런 건 없다요!”
당황하는 윈디. 거짓말을 잘 못하는 윈디의 특성상 분명 이번에도 뭔가 장난질을 쳤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번 역시 마하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하임은 두말 않고 상자에서 봉투를 뽑았다.
새하얀 색의 봉투, 그것은 생각 이상으로 가벼웠다. 마치 아무것도 안 든 것처럼 말이다. 그는 너무 가볍다 못해 날아갈 듯 그 봉투를 가지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자, 모두 봉투를 개봉한다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조용하던 강의실은 갑자기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어떤 조에서는 환호성이 들리기도 했지만, 조의 대부분의 표정은 그야말로 마치 밥 먹다 돌이라도 씹은 듯한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하임의 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미션 목표: 프리드라하 저택의 지박령 퇴치.(지박령: 땅에 속박된 영혼, 보통 원령이라 불리움)
미션 난이도: AAA+
몬스터 클래스: 평균치 이상의 영력을 보이는 2개체의 지박령으로 확인됨. 자세한 사항은 본교 도서관에서 참고 바람.
현재까지의 전적.
지박령 소탕을 위해 파견된 소대 규모의 시온교 성직자 괴멸.
본 학교 소속 12개의 파티들이 각각 퇴치 시도. 결과는 모두 실패. 총 사상자: 사망 9. 부상 47.
이후 현재까지 도전자는 없음.
*유의사항: 교칙의 변화로 인해 올해부터는 사전 포기는 불가하오니, 해당 파티는 이유를 불문하고 미션에 도전해야 함.
포기 혹은, 부정행위를 통한 클리어 등이 적발 시 파티 전원, 유급 혹은 퇴학 조치 당할 수 있음.
“맙소사! 이건 말도 되지 않소! 어떻게 이런 미션이?!”
샤오랑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녀가 이 과목을 재수강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
그동안 받은 최악의 등급의 미션도 AA급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미션은 무려 AAA등급이라는 것이다.
“이건 사기야! AAA등급이라고?!”
루다크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시아 황제의 명에 의해 최대한 빠른 졸업을 해야 하는 그였는지라, 졸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그 역시도 간절했다.
하지만 AAA등급 난이도라니, 이건 그냥 포기하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이 지박령 이야기 저도 들은 적 있어요. 이건 뭔가 잘못된 거예요.”
사실 마하임이 받은 미션은 알타베르나 인근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들어 본 도시 전설과 같은 이야기였다.
알타베르나와 그리 멀지 않은 폐허가 된 고성. 그 고성은 아무도 발 디딜 수 없는 금단의 구역이 있었다.
이곳을 개발하려는 시도는 수차례 있었다. 심지어 군대가 동원된 적도 있었지만, 이곳에 뿌리내린 강력한 지박령에 의해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곳은 암묵적으로 언급을 하는 것조차 꺼려지는 곳으로, 모두에게 잊혀 가고 있었다.
“어, 어떡할 거죠? 마하임 님.”
“졸업을 하려면 부딪쳐 보는 수밖에요.”
안나의 말에 마하임은 짧게 답했다. 윈디가 개입한 이상 보통 미션은 아닐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마하임에게는 아직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시아라는 물론하며 자신의 반대편에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앉아 있는 루다크에 대한 문제까지.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션 완료 기한은 이번 학기 마지막 날이다요. 행운을 빈다요.”
이렇게 말한 윈디는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웅성거리는 학생들도 뒤이어 나가고, 강의실 안은 이내 조용해졌다.
이를 묵묵히 지켜보던 루다크는 마하임을 노려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션 이전에 너와 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이 자식! 벌써 잊은 거냐? 시아라에게 방해를 받아 끝내지 못한 승부, 마무리 짓기 전엔 아무것도 못 한다!”
루다크의 말에 마하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시아라에게 그토록 두들겨 맞고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듯했다.
“그런 걸로 힘 뺄 생각 없다. 승부는 네가 이긴 걸로 해라. 그럼 난 이만.”
“넌 전사로서의 명예도 없냐?”
“명예가 졸업시켜 주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네가 명예 운운하는 것 자체가 우습군. 제국의 생체 병기 따위가.”
“뭐라고!”
마하임의 발끈하며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는 루다크. 그런 루다크를 본 척도 않고 마하임은 일어섰다.
“내일쯤 한번 모이죠. 아무래도 이번 미션을 클리어하려면 준비를 좀 해야 할 듯하니까. 그럼 전 다음 수업을 들으러 갑니다.”
이렇게 말한 마하임은 미련 없이 강의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 * *
[샤오랑은 내가 데리고 있다. 중앙광장 분수대 앞에서 기다리겠다.]
수업 중 잠시 쉬는 시간. 헐레벌떡 뛰어온 안나가 건네준 종이를 받아든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기어코 루다크가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막 나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결국 저지르고 만 것이다.
“어쩌죠? 교수님께 알려야 할까요?”
당황한 안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안나의 눈앞에서 샤오랑이 루다크의 패거리들에게 납치당하는 것을 본 것이다.
마하임은 잠시 생각을 하다 몸을 일으켰다.
“아뇨. 아무래도 루다크와는 끝을 봐야 될 듯합니다.”
싫든 좋든 상대가 루다크라면 언젠가는 승부를 내야만 했다.
지금은 졸업이 최우선이라 죽일 수는 없었지만,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인지는 확실히 정하고 넘어가야 뒤탈이 없을 것 같았다.
“가요. 제가 지름길을 알고 있어요.”
안나의 뒤를 따라 마하임은 알타베르나 밖으로 향했다.
중앙 광장은 알타베르나 상업 구역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걸어서는 한 20분 정도? 물론 지름길을 안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알타베르나는 그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길이 마구 뒤엉켜 미로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마하임은 웬만하면 이 근처에 오는 것조차 꺼렸다.
“아, 여기에도 지름길이 있었던 겁니까? 전혀 몰랐습니다.”
“제가 얼마 전 개척한 길이예요. 꽤 애먹었다고요.”
마하임이 보기에는 그 길이 그 길 같았지만, 안나는 잘도 그 길을 헤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 왔어요.”
길모퉁이를 지나자 제법 넓은 공간이 나왔다.
겉보기에는 그다지 특별한 점은 없었다. 바닥은 흔히 볼 수 있는 투박한 돌로 포장되어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금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광장 중앙에 위치한 분수대 정도?
둥근 원형의 하층부와 상단의 분수구와의 절묘한 조화로 인해, 상당히 멋진 분수가 연출되었다.
그 때문에 이 분수는 의외로 인기가 좋았다. 특히 이곳에서 첫 키스를 한 연인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전설과 같은 소문이 도는 곳이기도 해서, 이미 알타베르나의 명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무언가 좀 이상해요. 너무 조용한 것 같은….”
주위를 둘러보던 안나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광장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지금 이 시간대면 적어도 한두 쌍의 연인들이 분수대 근처에서 진을 치고 있어야 정상이었지만, 지금의 광장은 사람이라고는 그림자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유를 알겠군.”
마하임은 인상을 구겼다. 샤오랑은 분수대 바로 정면,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드는 잿빛 통나무 꼭대기에 꽁꽁 묶여 있었다.
“어떤가? 내가 마련한 자리가.”
마하임이 샤오랑에게로 다가서자 분수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다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우람한 근육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상의를 벗은 채, 그야말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마하임은 루다크를 무시한 채 곧장 샤오랑이 매달려 있는 통나무로 향했다.
“하하하, 미안하게 됐소.”
미안한 듯 어색하게 웃는 샤오랑,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하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