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놀랍군. 나의 병사들을 뿌리치고 온 것인가?”
앤더슨은 진심으로 놀란 듯 마하임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하임은 오페라를 고쳐 잡고 앤더슨을 노려보았다.
“유령 놀이는 끝이다!”
“좋다. 상대해 주마. 내 영지를 노리는 자, 그 누구도 살아서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앤더슨은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은 이미 심각하게 손상되어 약간의 충격에도 부서질 듯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검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묘한 기운. 마하임은 눈을 부릅떴다.
“검기…! 어째서 유령 따위가?!”
“의외군. 이것에 대해 알다니…. 그래, 맞다. 이것은 검기. 모든 사악함을 베는 영혼의 검.”
마하임은 한 발자국 물러섰다. 검기를 사용하는 지박령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저것이 정말 검기라면 다가가는 것은 위험했다. 마하임은 즉시 마나를 제어하기 시작했다.
“만능의 힘 마나! 그 목적 없는 강대한 힘이여. 나의 의지를 따라 적을 쳐라! 매직 미사일!”
마하임의 언력(言力)으로 재구성된 마나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5개의 푸른빛의 화살이 되어, 굶주린 맹금류처럼 앤더슨에게로 날아들었다.
쿵, 쿠앙앙, 콰아앙!
3클래스 마법에 불과한 그것이었지만 위력은 절대 만만치만은 않았다. 매직 미사일의 범위 안에 속한 모든 물체는 강렬한 폭발로 인해 일순간 자욱한 먼지로 뒤덮이고 말았다.
“아직 멀었다!”
먼지 속에 비틀거리는 앤더슨. 그를 향해 마하임은 축지로 단숨에 거리를 줄였다.
“발경!!”
파아앙!
쇠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앤더슨은 뒤로 주우욱 밀려 나갔다. 그리고 맞은편 아름드리나무를 연이어 쓰러트리면서 숲 깊숙이 나가떨어져 버렸다.
“하아, 하아. 쓰러트렸나?”
마하임의 앞쪽으로는 앤더슨이 발경의 충격으로 밀려나면서 만들어낸 흔적들이 그가 순간 뿜어낸 힘의 위력을 잘 대변해 주고 있었다.
방금 전만 해도 그곳은 각종 수목이 우거진 울창한 숲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곳은 급조된 오솔길이 연상될 정도로 횡 하니 뚫려, 황토색 바닥이 흉하게 드러나 있었다.
“망할! 없다?!”
마하임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자신의 공격을 받은 앤더슨의 모습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마하임은 필사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늦었다. 침입자여!”
바로 그때 마하임의 머리 위에서 나타난 앤더슨. 마하임은 이를 악물고 오페라를 치켜들었다.
깡!
우지직!
마하임의 검과 앤더슨의 검이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부딪쳤다. 마하임의 발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순간 팔 관절이 빠질 것 같은 고통에 마하임은 신음을 토해냈다.
[경고, 양쪽 팔 관절 손상. 긴급 수복합니다]
마하임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경고음. 그와 함께 진통은 줄어들었지만, 앤더슨의 공격은 진행형이었다.
“제법이지만, 네놈 역시 필멸자일 뿐!”
앤더슨은 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마하임은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단 한 방이라도 맞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놈의 검에서 흩뿌려지는 푸른색 검기는 강철마저 두부처럼 자를 수 있었다.
마하임의 검, 오페라가 아니라면 막을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내 검기를 막는 검이라니. 놀랍군.”
“큭, 아직 멀었다! 파이어 볼!”
3클래스 동급 최강의 마법, 주문 없이 무영창으로 사용한 마법이었지만 그 위력만큼은 강대했다.
쿠아아앙!
한 차례 뜨거운 열기와 거대한 불기둥이 숲을 대낮같이 환하게 밝혔다. 앤더슨은 파이어 볼을 맞고 그대로 뒤로 튕겨 밀려났다.
“하악, 하악.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마하임은 말했다. 파이어 볼의 이글거리는 화염 속에서 앤더슨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하임을 향해 검기가 피어오르는 검을 치켜들었다.
“가소롭군. 이 정도의 힘으로 날 쓰러트릴 셈인가?”
“닥쳐! 나는 승리해야만 한다! 여기서 쓰러지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나는 해내야만 한다! 그 빌어먹을 미래를 바꾸고 말 테다!”
마하임은 쏘아진 화살처럼 앤더슨에게로 파고들었다. 앤더슨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마하임의 검과 앤더슨의 검이 부딪쳤다.
파아앗-!
눈부신 섬광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마하임은 볼 수 있었다. 지난 500년 동안 이곳에 묶여 있어야만 했던 앤더슨의 과거를.
“허억-!”
마하임은 뒤로 물러났다. 앤더슨 역시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잘 보았다. 그대의 과거. 아니 그대의 미래를.”
먼저 입을 땐 앤더슨이 말했다. 마하임은 침묵했다. 앤더슨이 겪었던 절망스러운 그 과거가 마하임의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그 절망과 그 괴로움. 마하임의 눈물샘에서는 저도 모르게 새하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군. 너 역시 마찬가지였나?”
바꿀 수 없는 과거를 괴로워하며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영령. 그는 악령이 아니었다.
단지 과거에 매여 그 어느 곳도 가지 못하고 묶여 있는 죄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데려다주마. 널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로.”
마하임은 손을 앤더슨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앤더슨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운명. 그녀를 지켜 주지 못한 나의 죗값이다.”
“웃기지 마!”
마하임은 앤더스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그리고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따위 운명! 거부하겠다! 운명이란 포기한 자의 변명일 뿐. 데려다주마.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말겠어!”
앤더슨을 일으킨 마하임은 그를 부축한 채 걷기 시작했다.
영혼인 앤더슨에게 무게가 있을 리 없었지만, 저주처럼 뿌리박힌 그의 운명이 앤더슨을 놓아 주지 않았다.
“포기해라. 그리고 돌아가라. 그대는, 나와 같은 길을 걷지 마라.”
“그건 내가 선택할 일이다! 넌 일어나라! 그리고 걸어가란 말이다!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마하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의지에 반응한 나노머신은 한계치까지 마하임의 육체를 강화시키고 또 강화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기적을 이 땅에 구현했다.
“미, 믿을 수 없어. 움직인다?!”
꿈쩍도 하지 않았던 앤더슨의 거체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마하임의 온몸은 부서질 것 같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아득히 멀리 보이는 프리드라하 성.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곳으로 마하임은 걷고 또 걸었다.
“그대와 같은 사람이 나와 함께했다면, 역사는 나에게 미소 지었을지도 모르겠군.”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항상 현재만이 존재할 뿐. 달린다.”
마하임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이 움직일 때마다 땅은 아무런 힘없이 푹푹 파였다.
그가 짊어지고 있는 앤더슨의 영혼의 무게는 물리적 한계를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어깨가 부서질 것 같은 느낌. 척추는 그 극심한 무게를 못 이겨 당장이라도 탈골이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고통이 더해 갈수록, 마하임의 의지는 더욱더 강해졌다.
그리고 그 의지는 곧 힘이 되어 마하임 발걸음을 지켜 주었다.
구름은 비켜났다. 청아한 달빛의 마하임의 앞을 밝혀 주었다.
밤의 숲이 주는 상쾌함, 부드러운 바람의 속삭임. 신의 기적은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
-사랑하는 그대여.
지난 500년. 밤이면 밤마다 어김없이 들려오는 구슬픈 목소리….
그 소리는 어김없이 오늘도 이곳의 하늘을 울려오고 있었다.
프리드라하 저택으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 소리는 더욱 선명히 들려왔다.
[사랑하는 그대여.
지금은 어디에.
저 하늘의 별을 그대라 생각하고.
나 오늘도 밤을 지새웁니다.
저의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저의 눈물을 느낄 수 있나요.
왜 말씀이 없으신 거죠?
나의 사랑. 나의 꿈.
이제 대답해 주세요.
당신을 향한 간절한 나의 마음을.
그대 기억해 주세요. 단 한 번만이라도.
아, 사랑스러운 그대여.
지금은 어디에.
나 오늘도 당신만을 그리며.
새벽녘 흩어지는.
저 희미한 별빛에 이 애달픈 마음 담아 봅니다.]
앤더슨은 터질 것 같은 슬픔에 목이 멨다.
500년…. 그 기나긴 시간의 끝자락에서 겨우 듣게 된 레이 공주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앤더슨은 표현할 길 없는 감격과, 슬픔을 동시에 맛보아야 했다.
천천히 숲에 가려 있던 프리드라하 저택이 앤더슨의 눈에 들어왔다.
저택은 그 기나긴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여전히 본연의 자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레이 공주, 내가 왔소. 이 앤더슨이 돌아왔소!”
마하임과 앤더슨은 이제 누가 앤더슨인지 누가 마하임인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하나가 되어 있었다.
앤더슨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는 옛 고성, 프리드라하 저택 앞에 섰다.
“저, 정말인가요? 앤더슨 왕자님?”
프리드라하 저택의 2층 테라스. 그곳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머리카락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레이 공주.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미안하오, 레이 공주. 지금에서야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다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레이 공주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그 울컥한 기분. 이미 언어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앤더슨에게로 뛰어내렸다. 엔더슨은 양팔을 벌려 그녀를 받아 들었다. 레이는 앤더슨의 지칠 대로 지친 얼굴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잘 오셨어요. 정말 잘 오셨어요….”
끝없는 기다림, 그 마지막을 바라보며 둘은 뜨거운 재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 그 마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의 흐름은 시간과 심지어 공간마저 초월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하임은 느낄 수 있었다. 500여 년 전, 이곳에서 시작된 그 비극의 서막을.
* * *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흥겨운 음악 소리,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들. 그러나 이 소리가 눈엣가시, 아니 저주스러운 장송곡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용서 못 해…. 저것들이 이 나라를 이끌어 왔다는 귀족들이란 말인가?”
레이 공주는 그야말로 이를 갈았다. 연이은 패전, 그리고 그녀의 조국은 제국의 손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결사 항전을 부르짖던 귀족들은 이미 제국의 앞잡이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고, 그녀 역시 내일이면 정략결혼의 비운을 맛보아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모멸감,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와인 잔을 벽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그곳에는 그녀의 조국을 상징하는 붉은 매가 선명히 그려진 깃발이 처량하게 매달려 있었다.
정말 이제는 우습지도 않았다. 아니 그 무엇보다도, 이런 치욕을 당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에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딸아, 게 있느냐?”
“네, 아바마마. 들어오시죠.”
때마침 들려온 현 프리드라하 대공의 목소리에 레이 공주는 표정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 비웃는 듯한 미소는 여전했다.
그녀는 결사 항전을 부르짖었지만, 프리드라하 공국의 왕은 소위 백성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항복을 결정했던 것이다.
백성…. 정말 우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언제부터 귀족들이, 그리고 이 공국의 왕이 백성들을 생각했단 말인가?
그렇게 백성들을 생각했다면 지난 100여 년 동안 지속된 내전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오직 서로의 끝없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 대지는 이미 사람들의 피로 가득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