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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99화 (99/194)

99화

“무슨 추태인가, 공주. 공주는 그대 한 몸만 생각하는 건가? 프리드라하 공국은 이제 제국의 속령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것을 왜 모르는가?”

그녀는 부끄러웠다. 저런 분이 자신의 한 명밖에 없는 아버지란 사실에….

레이 공주는 그 뼈아픈 현실에 다시 한번 절망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레이피어 하나도 제대로 다룰 수 없는 나약한 몸….

힘이 없는 이상(理想)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레이 공주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앤더슨 왕자는 죽었다. 이제 잊어버리도록 해라. 카오디오스 왕국의 운명을 아는가?

그네들은 최후까지 항전을 고집하다 어린아이조차 한 명 남기지 않고 멸족 당했다. 공주, 그대의 조국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가?”

레이 공주는 필사적으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가슴은 이미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연합군의 수장인 앤더슨 왕자가 그 치열한 난전 속에서 행방불명됨과 동시에 연합군의 운명을 그야말로 파국으로 치달았다.

프리드라하 공국 병사들의 잇단 항복, 그리고 배신. 하지만 카오디오스 왕국은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최후의 한 명까지도 검을 들었다. 그리고 용납지 않았다. 자신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 이국의 무자비한 말발굽에 짓밟히는 것을….

그러나 힘의 차이는 너무나 명확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한마음으로 저항을 해보았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멸족(滅族)의 비운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저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내일의 태양이 밝으려면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요.”

“공주, 그대도 이 아비의 마음을 헤아려 주길 바란다. 나 역시 망국의 왕이 아닌가? 지금은 숨을 죽이고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 없다. 알겠느냐?”

“네. 아버님.”

기회? 그녀는 순간 터져 나오는 조소를 가까스로 참았다. 그 기회를 위해서 자신을 제국의 제물로 받치겠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물론 그런 기회라도 오면 다행이겠지만, 지금의 프리드라하 공국의 모습을 보아서는 제국이 주는 떡가루나 받아먹고 비굴한 삶을 영위할 것이 자명했다.

“그럼 난 내려가 보겠다. 너도 조만간 내려오도록. 제국의 황태자가 너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단다.”

그의 비굴한 미소. 레이 공주는 생각 같아서는 정말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자신의 아버지였고, 그녀 역시 무너져 가는 조국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수밖에 없는 연약한 여자일 뿐이었다.

“조금 이따가 내려가겠어요. 지금은 혼자 있고 싶으니까”

“그렇게 하려무나.”

이 말을 남기고 그는 레이 공주의 방을 빠져나갔다.

방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또다시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는 희미하게 그녀의 방을 울려왔다.

이제 화낼 힘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한없이 공허하기만 한 그녀의 마음. 모든 것이 허무하고 또 허무할 뿐이었다.

레이 공주는 상아로 만들어진 화장대 앞으로 갔다. 그리고 눈물을 닦아내고 헝클어진 머리를 손보았다.

그다지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닌 외모.

레이 공주는 화장대의 거울을 바라보며 아무 의미 없는 미소를 지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웃어 본 지도 참으로 오래된 것 같았다. 약 일주일 전, 앤더슨 왕자가 출전하는 것을 배웅하는 것으로 마지막이었으니 말이다.

“흑, 으흑, 흑….”

갑자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미 말라 버렸으리라 생각했던 그 눈물샘에서 또다시 뜨거운 액체들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아직도 생생한 그녀의 유일한 사랑, 앤더슨 왕자가 손에 잡힐 듯 떠올랐다.

아직 시신이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미 국운은 기울어졌고, 그녀 자신은 원치 않은 결혼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죄송해요. 저 끝까지 살아서, 왕자님의 복수를 해 드리고 싶지만. 그렇지만….”

레이 공주는 흐느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화장대 옆에 놓여 있던 붉은 진홍색의 스카프를 들었다.

앤더슨 왕자의 목에 걸어 주기 위해 자신이 손수 짠 스카프…. 하지만 더 이상 그것은 필요치 않았다. 레이 공주는 활짝 열려진 발코니로 걸음을 옮겼다.

“달…. 밝군요.”

2층 높이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발코니는 이곳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바라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을 하늘, 그 끝없이 넓고 공활한 그 창공에 두둥실 떠오른 두 개의 달, 마치 그 달과 경쟁이라도 하듯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그리고 이 프리드라하 저택을 감싸 안듯 둘러싼 숲.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과 같이 펼쳐져 있었다.

“엔더스 왕자님. 부디, 용서를.”

레이 공주는 스카프를 발코니 끝의 난간에 걸었다. 그리고 둥그스름하게 매듭을 만들었다.

문뜩 언젠가 본 희곡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임을 여의고 고통에 겨워 결국 목을 매는….

당시 그걸 보고 비웃었던 자신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했다. 하지만 그 희곡의 주인공과 지금의 자신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녀는 씁쓸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그 둥근 매듭에 자신의 목을 걸쳤다.

“……!!”

바로 그때, 무심코 저택의 아래를 바라본 레이 공주는 온몸에 전율이 흐름을 느꼈다.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그곳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발코니 끝에서 내려왔다. 레이 공주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1층을 향해 달렸다.

자신이 신발을 신지 않았다는 것조차 그녀는 잊고 있었다. 이미 마음은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지만, 레이 공주의 몸은 한없이 느리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그를 만났다.

“저, 정말인가요? 앤더슨 왕자님?”

그는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피로 얼룩진 갑주, 너무나도 익숙한 그 모습.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 모습을 그 느낌을…. 레이 공주는 떨려 오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발걸음조차 옮기기 힘들 정도였다.

“미안하오, 레이 공주. 지금에서야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다오. 미안하오. 용서, 용서해 주시겠소?”

레이 공주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그 울컥한 기분. 이미 언어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앤더슨에게로 달렸다. 그리고 양팔을 벌여 자신의 가슴에 앤더슨의 지칠 대로 지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잘 오셨어요. 정말 잘 오셨어요.”

끝없는 기다림, 그 마지막을 바라보며 둘은 뜨거운 재회의 눈물을 흘렸다. 레이 공주는 그 가슴 벅찬 감격에 애써 눈물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기다렸어요, 정말. 오실 줄 믿었어요. 꿈에서조차 당신만을 그리워했어요. 이젠 됐어요. 이따위 썩은 나라, 어찌 되어도 좋으니 우리 도망가요. 당신의 뒤라면 지옥이라도 따라가겠어요.”

“…….”

앤더슨은 침묵했다. 그의 눈동자는 끝을 알 수 없는 슬픔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차마 앤더슨은 말할 수 없었다. 지금의 이 현실을…. 하지만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 그것을 외면한다고 비켜 날 순 없었다.

그는 시리도록 쓰라린 가슴을 안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만하시오, 공주. 그대도 알지 않소. 우린 이미 오래 전 이승을 등진 몸이라는 것을.”

“예? 무슨 말씀이세요?

의아한 표정의 레이 공주가 반문했다. 그리고는 앤더슨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는 투정 부리듯 말했다.

“무슨 농담을. 이렇게 따스한데, 누가 이승을 등졌단 말인가요?”

“레이 공주. 이제 그만 눈을 뜨시오.”

레이 공주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 잠시 멈추었던 눈물의 샘이 또다시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 저도 알고 있단 말이에요! 하지만, 하지만 잠시도 안 되나요? 당신을 느끼고 싶었을 뿐인데. 단지 그뿐인데!”

모든 것은 순간의 환상일 뿐. 이미 500년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 프리드라하 공국은 이미 오래전에 잊혀졌고 자신 역시 이 땅에 묶여 있는 지박령에 불과하다는 것을.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이 어리석은 사람을 어떻게 해야 용서해 주시겠소. 그렇게 지켜 주리라 맹세했건만, 그렇게 약속하고 떠났건만 난, 난 이제야 겨우. 이제야... 흐윽, 큭.”

앤더슨은 더 이상 말을 못 잊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괴로움. 전하지 못한 소중한 감정들. 터져 나올 듯한 마음의 울부짖음. 이룰 수 없는 사랑, 그것을 알면서도 미련에 얽매인 영혼.

그는 레이 공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고, 또 구했다. 500년 전, 자신이 저지른 그 어리석은 일들을 가슴이 터져라 한탄하며.

“무슨 말씀을. 겨우, 겨우 500년인걸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천년이라도, 아니 만년이라도 기다리겠어요.

당신의 약속…. 저 믿었어요. 반드시 돌아온다는 그 약속. 전 잊지 않았어요. 그리고 봐요. 이렇게 당당히 돌아오셨잖아요. 전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답니다.”

반짝이는 액체로 가득한 레이 공주는 미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앤더슨의 손을 자신의 얼굴로 이끌었다.

“이제 모든 것은 시작으로, 그리고 끝으로. 키스…. 키스해 주실래요?”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간 시간 속의 잔상. 그것을 외면할 만큼 레이 공주는 어리석지 않았다.

앤더슨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레이 공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그리고 두 개의 입술은 겹쳐졌다.

조금은 부드럽게, 혹은 격렬하게 둘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다. 500년 그 기나긴 세월 속에서도 삭아질 수 없었던 그 뜨거운 마음들.

둘의 꿈은 비운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 질 수 없었지만, 누구를 원망하랴! 누구를 저주하랴! 이미 잊혀져 버린 역사의 흐름을 욕할 수는 없는 법.

앤더슨은 마지막으로 미소 지었다. 레이 공주는 앤더슨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라져 갔다. 500년 전 걸어갔어야 할 그 평온한 안식의 길로….

어디선가 흘러온 구름은 또다시 달을 가렸다. 어두워진 숲. 아무래도 내일은 흐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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