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마법이란 단순히 마나를 제어하는 것이 아니야. 마법이란 마나에 자신의 마음을 담는 것. 그 그릇에 따라 같은 마법도 천차만별의 형상을 지니게 되지.”
칼시엘이 다시 한번 손을 움직이자 주위의 공간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곳은 조금 전과 전혀 다른 삭막한 기운이 가득한 곳이었다.
여기저기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들, 그리고 그 사이로 흐느적거리며 흐르는 검붉은 용암들.
물은 미친 듯 끓고 있었고,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뻘건 용암들은 당장이라도 여기 있는 모두를 뒤덮어 버릴 기세였다.
“내가 사용한 것은 흔히들 말하는 ‘환영 마법’이야. 일정 공간 안의 마나를 제어해 허상을 만드는 것.
보통은 그저 허상뿐이지만 내 환영 마법은 단순히 상뿐만 아닌 소리와, 감촉, 그리고 향까지 구현이 가능해.”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순간 그 모든 것은 사라지고 처음의 마나의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설명이 좀 어려웠나? 뭐 상관없어. 곧 너희들도 사용할 수 있게 될 거야.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지.”
마나의 방의 마나가 울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하임뿐만 아니라 마나를 느낄 수 없는 루다크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일단은 살아남아 봐. 행운을 빌게.”
다시 한번 마나의 격류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모두가 눈을 떴을 때 그들의 시야에는 전혀 다른 운명의 풍경들이 펼쳐져 있었다.
* * *
그곳은 뜨거운 열기와 살을 에는 듯한 따가운 바람이 가득 찬 곳이었다.
마하임을 비롯한 조원 모두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한동안 눈조차 뜰 수 없었다. 건조한 모래바람과 숨이 탁탁 막힐 정도로 달구어진 대지. 서 있기조차 힘든 죽음의 땅이었다.
“맙소사, 여긴 또 뭐야!”
가장 먼저 시력을 회복한 사람은 루다크였다. 비록 대부분의 능력을 봉인당했다 하지만 제국의 차기 제일검이라 불리우는 그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역시 지금의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에 들어온 광경을 그저 황망하게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이것은 황사(黃砂). 이런 류의 사막을 볼 수 있는 대륙 중앙 쪽뿐인 걸로 알고 있어요.”
안나는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언덕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있었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뜨거운 모래의 기운. 그리고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불의 정령의 자취를….
“대륙 중앙이라면, 화룡의 사막?”
마하임은 흐릿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 화룡의 사막이라는 지명을 힘겹게 되살려 냈다.
한때 무시무시한 광룡 하이넨센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황무지. 아주 먼 옛날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도시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저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일 뿐이었다.
“그럼 우리는 순간이동이라도 했단 말이오?!”
뜨거운 열기에 숨을 헐떡거리며 샤오랑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포탈도 없이 순간이동을 시키는 주문은 전설상에서나 나올 법한 마법이었던 것이다.
“이것 역시 환영 마법인 것 같습니다.”
마하임은 바닥의 모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닌, 마나가 만들어 낸 환상.
그러나 이 환상은 그냥 환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강렬한 불의 기운은….”
불길한 예감이 마하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곳이 테스트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라면…. 그리고 이 강렬한 불의 기운, 그것은 바로 이곳에 잊혀진 고룡 화룡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마, 말도 안 돼! 마법으로 그런 것도 할 수 있다는 말이야!?”
“칼시엘 교수님이라면…. 가능할지도.”
안나는 말을 줄였다. 그녀도 칼시엘 교수의 악명이라면 익히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다! 그 악명 높은 미친 용이랑 싸우란 이야기냐?! 지금 이 인원으로?!”
길길이 날뛰는 루다크. 그러나 선택의 여지 같은 것은 없었다.
이미 마하임 일행들은 싫든 좋든 칼시엘의 마법에 휘말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뭔가, 뭔가 와요!”
그것의 움직임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안나였다. 아주 약하긴 했지만 그녀는 분명 느낄 수 있었다.
발끝으로 전해져 오는 미미한 진동을…. 그리고 그 진동은 안나뿐만 아니라 모두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기 시작했다.
“루다크, 샤오랑을 부탁한다.”
“흠. 이왕이면 귀여운 안나로 했으면 좋겠는데.”
“…….”
마하임은 뭐라고 말 하는 대신 어느 사이엔가 뽑아 든 오페라를 루다크의 목에 지긋이 가져다 댔다.
“난 농담도 못 해? 그 칼 어서 치워!”
“시끄러워! 피하기나 잘 피해. 왔다!”
바로 그때였다. 바람을 따라 희미하게 흐르던 유사가 마치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울렁이더니, 거대한 기둥 같은 것이 갑작스럽게 하늘로 치솟았다.
그것은 정말 거대했다. 하나의 기둥, 아니 그것은 기둥이 아니었다. 분명 살아서 꿈틀대는, 생명체였다.
그리고 그 생명체는 정확히 마하임의 파티를 향해 날아들었다.
“흩어져!”
마치 이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마하임은 안나를 감싸 안고서 가볍게 몸을 피했다. 샤오랑을 들쳐 업은 루다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샌드윔이에요!”
마치 지렁이를 수천만 배 확대시켜 놓은 것처럼 보이는 몬스터, 샌드윔.
드래곤의 배설물이 주식이라고 전해지는 이 녀석은 그 덩치만 놓고 보더라도 상당히 위험한 녀석이었다.
더군다나 유사 속에 숨어 있다 갑작스럽게 먹이를 덮치는 녀석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정신 바짝 차려. 한 마리가 아니니까!”
따가운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흐르는 유사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은 분명 하나가 아니었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꿈틀대는 모래의 움직임은 사방으로 흩어진 마하임들의 위치를 정확히 따라잡고 있었다.
“바보! 위험해!”
“큭!”
한 차례 큰 도약 후 숨을 돌리려던 루다크에게 연이어 샌드윔이 공격해 온 것이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씩이나…. 이미 피할 공간 따위는 없었다.
“물의 의지여, 지금 나에게 화답하라. 수둔, 급급여율령!”
앙칼진 샤오랑의 외침과 함께 푸른색의 부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부적은 날카로운 물의 기운으로 변해 샌드윔의 허리를 관통했다.
퍼어억-!
요란한 충격음과 함께 샌드윔이 무너져 내렸다. 샤오랑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놀랐다.
자신이 쓴 수둔은 그다지 강한 위력의 부적술이 아니었다. 그런데 단숨에 저 거대한 샌드윔을 뚫어 버리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샌드윔의 공격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연이어서 몰려드는 샌드윔. 마하임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젠장! 라이트닝 볼트.”
3클래스 전기 마법. 무영창으로 사용하기에는 부담되는 마법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지지지직-!
마하임의 의지에 따라 재구성된 마나는 강력한 뇌전의 형태로 변해 녀석의 몸에 그대로 직격했다.
귀가 떨어져 나갈 듯한 굉음과 함께 눈부신 섬광이 순간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눈부심이 사라지자 보인 것은 커다란 바람구멍이 뚫린 샌드윔이었다.
“라이트닝 볼트가 이렇게 대단한 거였나?”
자신이 사용한 마법이었지만 마하임 자신조차 믿기지 않았다.
이 마법으로 할 것 같으면 ‘난 견습 마법사예요.’라고 광고라도 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그야말로 초보적인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위력은 웬만한 ‘파이어 볼’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와하하하, 대단해 역시 내가 인정한 적 답다!”
루다크는 그야말로 십년감수했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쓸며 호탕하게 웃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잡아먹기라도 할 듯 으르렁거리던 사이였는데도 그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단순한 건지 아니면 호탕한 건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루다크였다.
“후우, 겨우 한숨 돌렸소.”
이마에 땀을 닦는 샤오랑. 자칫 잘못했으면 샌드윔의 간식거리가 될 뻔한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물 흐르듯 흐느적거리는 유사는 아직도 꽤나 많은 수의 샌드윔이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큭, 또 몰려오는 건가?”
모래를 헤치고 다가오는 샌드윔의 모습이 모두의 눈에 생생히 들어왔다.
그 수는 대략 잡아도 6마리. 더군다나 모래 아래라 공격할 방법조차 없었다.
“어…?! 뭐지?”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몰려오던 샌드윔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춘 것이었다. 그리고 제자리를 맴돌던 샌드윔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뭐지? 왜 사라졌지?”
루다크의 외침이 불길하게 울렸다.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온몸에 한기가 들었다.
이 뜨거운 사막 위에서 말이다. 그것은 본능적인 공포였다. 그리고 뒤이은 거대한 포효!
키에에에에엑-!
사막을 뒤흔드는 괴성. 그것은 화룡. 하이넨센의 울부짖음이었다.
“저, 정말 화룡인 가요?”
전설적인 화룡 하이넨센. 흔히들 광룡이라 불리는 이 광룡은 300년 전, 대륙 연합군의 손에 의해 토벌되었다.
이때 나온 희생자만 해도 무려 8천 명에 다다랐고 부상자는 1만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바로 그 악명 높은 광룡이 지금 이곳에 나타나려 하고 있었다.
“미, 믿을 수 없어요!”
탄식과 같은 안나의 외침이 흘러나왔다.
이야기만 들었지,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생명체.
그것은 흡사 커다란 산이 갑자기 출몰한 듯한 느낌이었다.
모래 언덕 아래서 떠오른 녀석의 몸집은 실로 대단했다. 온몸을 뒤덮은 붉은 비늘과 광기로 번뜩이는 두 눈.
하이넨센은 그 존재 자체가 위협이었다.
“저, 저건 이길 수 없어.”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루다크조차도 이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녀석의 거대한 날개가 퍼덕일 때마다 주변은 세찬 모래 폭풍이 몰아쳐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녀석은 천천히, 그러면서도 빠르게 마하임의 일행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대기를 가르며 점점 거리를 좁혀 오는 하이넨센은 그야말로 죽음의 사자와 같은 것이었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이것은 현실이 아닌 환상. 게다가 이것은 시험이었다. 답이 없는 시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은 그 답을 모를 뿐. 마하임은 차갑게 식어 갔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버틴다. 어차피 도망칠 수도 없어!”
마하임은 검을 뽑아 들었다. 하이넨센의 거대한 덩치는 보는 것만으로 압박감이 몰려왔지만, 마하임은 이를 악물고 참고 또 참았다.
“아, 안 돼! 모두 귀를 막아요!”
그것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안나였다. 마치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사악한 의지, 그 의지가 하이넨센의 몸으로부터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끼에에에에엑-!
강렬한 음파 공격. 그것은 과거 하이넨센 토벌대를 괴멸 상태로 몰고 갔던 그 악몽의 기술, 드래곤 피어. 그 앞에서는 그 어떠한 방어도 무의미했다.
“헉, 헉, 헉….”
모두 쓰러졌다. 코며 눈이며 심지어는 귓구멍에서까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일하게 쓰러지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 마하임뿐이었다.
그르르릉-
홀로 서 있는 마하임을 향해 하이넨센은 낮게 울었다.
마하임은 침을 삼켰다. 곧이어 하이넨센의 입에서 붉은 화염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드래곤 브레스?!’
실제 본 적은 없었지만, 드래곤 브레스의 위력은 동화책에서 나올 만큼이나 유명했다.
드래곤 브레스 한 방에 도시 하나가 증발했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니,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키에에에에엑-!
하이넨센의 입에서 넘실거리던 불길은 드래곤 피어를 가볍게 능가하는 포효와 함께 마하임에게로 쏟아졌다.
그것은 신의 힘에 필적하는 절대적인 소멸의 불길.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