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찌르르르 찌르르르.
언제부터일까? 익숙한 풀벌레 소리가 마하임의 귀를 간지럽혔다. 마하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하늘은 캄캄했다. 그리고 그 검은 하늘 사이로 쏟아질 듯한 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어났어?”
생소한, 그러나 어디선가 한번 들어 본 것 같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하임은 고개를 들어 그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아하니 멀쩡하나 보네. 하긴 나의 반쪽이니 당연한가?”
모래로 바스락거리는 바닥에 피워진 은은한 모닥불 사이로 비춰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핑크빛 머리의 성숙한 여성이었다.
그 여성은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실크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었다.
“넌 누구지? 여긴 또 어디고.”
마하임의 말을 들은 핑크 머리카락의 여성은 그를 빤히 바라본 채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보니 그녀의 눈동자도 분홍색 눈동자였다. 저런 머리색과 눈동자는 그 어떤 종족들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역시 위그드라실의 프로젝트가 실행되었나 보네. 네 동료들을 보고 확신했다.”
핑크 머리칼의 여성의 말에 그제야 마하임은 자신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잠들어 있는 동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두 특별한 상처 없이 편히 잠든 모습이었다. 그리고 보니 마하임 자신이 드래곤 피어에 당한 상처도 말끔하게 치료되어 있었다.
“다시 묻지. 넌 누구냐?!”
마하임은 인상을 구기며 벌떡 일어나 오페라를 뽑아 들며 외쳤다. 그녀에게서 광룡 하이넨센에서 느껴졌던 그 불쾌하고도 끔찍한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난, 하이넨센. 하지만 그건 위그라드실이 만들어 낸 환상일 뿐. 나의 진명은 따로 있어.”
“말 돌리지 마라! 너랑 말장난할 시간은 없다.”
마하임은 자신이 하이넨센이라 말하는 여성을 향해 오페라를 겨눈 채 살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그녀는 투명한 핑크색 눈동자로 마하임을 한동안 뚫어지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역시 다 잊은 거구나. 나에게 처음 이름 지어 준 건 바로 너야. 마하임.”
하이넨센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하임의 품에 달려가 그대로 안겼다.
“보고 싶었어! 너무나!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어, 무려 500년이라고! 왜 지금에서야 온 거야, 왜!”
마하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우는 하이넨센. 마하임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 안겨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하이넨센을 밀쳐낼 순 없었다.
그렇게 한 5분쯤 지났을까? 하이넨센은 겨우 진정이 된 모양인지 마하임에게서 떨어졌다.
“뭐 좋아. 약속은 지켰으니, 용서는 해 줄게. 마하임, 나의 반쪽.”
마하임은 마치 뭔가에 홀린 듯 하이넨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무언가 기억날 것 같기도 했지만, 막상 떠올리려면 거대한 벽에 막힌 것같이 아무것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애써 기억해 내려 하지 않아도 돼. 위그드라실의 방화벽은 그리 쉽게 뚫리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내 이름만은 기억해 줘. 네가 지어 준 나의 이름. ‘레비’.”
하이넨센의 말이 마하임의 가슴으로 퍼져 나갔다. 여전히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지만, 마하임의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왜지…? 나,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데. 왜…?”
너무나 슬펐다. 그리고 너무나 그리운 이 기분…. 그것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마하임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설명해 줘, 하이넨센. 넌 뭘 알고 있는 거지?”
“레비야. 내 이름은, 너한테만큼은 레비라고 불리우고 싶어.”
하이넨센, 아니 레비는 방긋 웃었다. 마하임은 흐르는 눈물을 닦은 뒤 말했다.
“레비 가르쳐 줘. 너와 난 무슨 관계지? 모두 설명해 줘.”
레비는 마하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청명한 검은 하늘을 조용히 우러러 보았다. 하늘에 흐르는 은하수의 반짝이는 물결은 마치 손에 잡힐 만큼 선명해 보였다.
“진실을 알고 싶으면 ‘엑스칼리버’를 찾아. 내가 지금 진실을 말 한다 하더라도 넌 믿지도, 이해도 못 할 거야.”
하이넨센은 이렇게 말하고 입을 닫았다. 엑스칼리버. 그것이 무엇인지는 마하임도 알고 있었다.
전설상의 성검의 이름을 빌린 마장기 ‘엑스칼리버’ 회귀 전 대륙을 휩쓴 시오니아 제국의 궁극 병기. 엑스칼리버의 힘은 산을 가르며 하늘을 불태웠다.
노옴 일족의 비장의 카드인 이 엑스칼리버를 얻기 위해 제국은 노옴족을 멸족시키려 했다.
이를 막기 위해 노옴족의 수장, 안나는 엑스칼리버를 제국에 바친다.
하지만 제국은 이 엑스칼리버로 노옴족은 물론하며 주변국까지 침략해 제국의 수중에 들어가고 만다. 그리고 세상은 지옥으로 변한다.
그게 마하임이 알고 있는 미래였다.
“그걸 어디서 찾지? 그건 노옴 일족의 히든카드이지 않나?”
“걱정 마. 네가 나를 찾아냈으니, 엑스칼리버 역시 널 찾을 거야.”
레비는 길게 한숨을 쉰 뒤 마하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별의 시간이야. 또 만날 땐 날 꼭 기억해 주길 바라.”
마하임과 입을 맞추는 레비. 그리고 그와 함께 주변의 모든 것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하늘도 땅도 그리고 레비조차도.
당황한 마하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필사적으로 레비를 불렀지만,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그저 한없이 공허한 공간이 거기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때 레비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명의 때에 다시 만나자. 나의 반쪽. 안녕.”
* * *
“일어나세요. 모두들!”
희미한 의식 사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누구인지조차 인지하기가 어려웠지만, 이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전멸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눈을 뜬 마하임이 본 것은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칼시엘 교수였다.
칼시엘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뒤, 마법으로 허공에 영상을 띄웠다.
“샌드윔에게 쫓겨 도망치다, 광룡의 레어에 침입해 하이넨센을 깨워 드래곤 브레스 일격에 전멸이라. 운도 0점, 실력도 0점. 이래 가지고는 졸업은 고사하고 모두 유급 감입니다.”
허공에 펼쳐진 마법으로 구현된 영상은 윈디의 홀로그램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적나라하게 마하임 파티의 ‘삽질’을 보여 줬다.
이렇다 할 반격조차 못 하고 이리 도망치고 저리 도망치다 하이넨센의 드래곤 피어에 전투 불능에 빠지고 뒤이어 이어진 드래곤 브래스 한 방에 모두 새까맣게 타 버리는 데드 엔딩.
마하임 자신이 보기에도 부끄러워 질 정도의 졸전이었다. 그러나 그 영상에서 빠진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인간으로 변한 하이넨센, 아니 레비와의 만남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안나, 샤오랑, 루다크! 일어나세요. 여긴 여관이 아닙니다!”
그녀의 외침에 안나와 샤오랑, 그리고 루다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몸을 일으켰다.
루다크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다짜고짜 칼시엘에게 달려가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이 망할 꼬맹이! 그런 얼토당토 않는 괴물과 싸우라니 말이 되냐?! 꼬맹이 니가 그 드래곤이랑 싸워 봐. 이길 수 있나 없나?!”
발끈한 루다크는 잡아먹을 듯 칼시엘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비웃는 듯한 칼시엘의 차분한 목소리뿐이었다.
“닥치세요! 예초에 누가 드래곤과 싸우라고 했나요? 문제의 포인트를 한참 잘못 집었습니다. 한심해서 헛웃음이 다 나오네요. 그리고 알타베르나의 학생이라는 것을 다행으로 아세요. 감히 내 멱살을 잡다니, 우리 학교 학생만 아니었다면 찢어 죽여 버렸을 테니까.”
칼시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마력이 그녀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쾅-!
“컥?! 이 빌어먹을 교수가 또?!”
“꺄아아악! 잘못했어요, 칼시엘 교수님!”
“악! 난 아무 말도 안 했소! 억울하오!”
“…….”
처음 칼시엘 교수와 만났을 때 썼던 그 마압이었다. 마하임의 일행들은 칼시엘의 마압에 짓눌려 바닥에 처박혀 신음조차 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마하임은 그런 고통 속에서도 하나의 의문에 꽂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레비와의 대화를 칼시엘 교수는 못 봤다는 이야긴가? 그럼 그건 꿈? 아니야, 그런 꿈은 존재할 수 없다.’
레비와의 대화는 아직도 선명히 마하임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레비는 마하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진실’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진실은 노움 일족의 ‘엑스칼리버’와 연결된다.
“기분 같아선 이대로 모두 F학점을 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지금부터 이 파티원들은 노옴 일족의 본거지, 노우스랜드의 ‘가르샤’로 갑니다.”
이 말을 들은 안나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르샤는 다름 아닌 안나의 고향이자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다짐한 곳이기도 했다.
“저기…. 교수님, 전….”
“거부는 용납 못 합니다. 노우스랜드의 가르샤에서 안나 님과 마하임 님을 지명해서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노우스랜드는 알타베르나와 자매결연을 맺은 국가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죠? 무사히 졸업하고 싶으면 다녀오세요. 지금 학교 밖에 가르샤에서 보낸 길잡이가 대기 중입니다. 그럼 전 이만.”
칼시엘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마압은 사라졌다. 마압에 짓눌려 괴로워하던 모두는 그제야 자유를 되찾았다.
가르샤는 안나의 고향이기도 했지만, 엑스칼리버가 잠들어 있는 땅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마하임을 지명해서 불렀다는 것은 ‘엑스칼리버’와 연관이 있음이 분명했다.
‘뭐 가 보면 알겠지.’
마하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칼시엘은 그 자리에서 휙 돌아 처음 이곳에 왔었을 때처럼 순간이동 마법진을 시전했다.
파앗-!
눈부신 마법진이 허공에 생겨났다. 그리고 그 안으로 사라지기 직전, 칼시엘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선 마하임을 바라보았다.
“마하임 군.”
“네?”
“방금의 전투에서 뭔가 이상한 점 없었나요?”
칼시엘의 말에 마하임은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확실치는 않았지만, 칼시엘 역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마하임은 애써 얼굴에 표정을 지우며 칼시엘의 말에 대꾸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뭐 간단한 예를 든다면, 하이넨센이 인간형으로 변해서 나타났다든지 하는 걸 말합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마하임을 쏘아보는 칼시엘. 그녀의 시선은 마하임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하지만 마하임은 눈도 한 번 깜짝이지 않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로 말했다.
“그런 건 보지 못했습니다. 그 환상 속에서의 전투는 칼시엘 교수님께서 보여 주신 영상이 전부였습니다.”
마하임의 말에 칼시엘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입을 뗐다.
“그리 나오시는 겁니까? 알겠습니다. 가르샤에서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이것으로 확실했다. 칼시엘은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감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칼시엘은 마하임이 본 그 어떤 마법사보다 강했고, 설령 사실대로 말한다고 할지라도 진실을 들려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진실은 고사하고 모든 것을 묻어 버릴지도 모르지.’
지금으로서는 가르샤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엑스칼리버를 찾는다. 그것이 마하임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