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온전한 밤이 내려앉았다.
2층 여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살풍경한 마을 풍경뿐, 여전히 인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여관 주인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마하임 일행은 멀미로 텅 비어 버린 배를 딱딱한 빵과 육포로 대충 저녁 시사를 때워야만 했다.
“좀 괜찮습니까? 샤오랑 님.”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소이다.”
샤오랑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직도 정상 컨디션이 아닌 것을 마하임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안나와 루다크도 마찬가지였다.
“마을에 오면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뭐 노숙이나 다름이 없잖아!”
투덜거리는 루다크는 육포 한 조각을 입으로 찢어 먹었다. 불행 중 다행히 비상식량을 챙겨 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쫄쫄 굶을 뻔한 것이다.
“샤오랑 님. 아직도 그 주술의 기운이 느껴져요?”
“느껴지는 정도가 아니오. 더 강해졌소. 아깐 흐릿하게 느껴졌을 뿐인데, 지금은 이 방 안까지 스며들고 있소.”
안나의 질문에 샤오랑은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본 것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하임은 몸을 일으켜 이 방 유일한 창으로 향해 밖을 내다보았다.
오늘은 그믐인지 달도 보이지 않았다. 밖은 어느 듯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 6시간 뒤 해가 뜰 겁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출발할 수 있습니다.”
주술의 음습한 기운은 해운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해운 역시 불안한지 안절부절못하며 딱딱한 빵을 한 조각 입에 물었다.
마하임은 허리에 차고 있는 오페라를 잠에서 깨웠다.
‘오페라.’
[네, 말씀하십시오.]
‘근처에 이상 반응이 있나 살펴봐 줘.’
[명령 확인, 다목적 감지 센서(ECS) 기동.]
지금으로서는 구현 불가능한 구인류가 남긴 유산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하임은 오래지 않아 그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삑, 검색 완료. 300미터 전방에 인간형 이동 물체가 감지되었습니다. 수는 30, 35, 40…. 총 45명. 생체 에너지가 감지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로봇, 혹은 초자연적 현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인 것 같습니다.]
말할 것도 없었다. 샤오랑이 말한 그 주술로 만들어진 ‘무언가’가 나타난 것이다.
마하임은 즉시 창문을 열고 밖을 확인했다.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 횃불들, 방금 전만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마을 깊숙한 곳에서 횃불을 든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불청객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심각한 표정의 마하임의 말에 모두는 창문 쪽으로 몰려왔다.
“저건 뭐야? 횃불?”
“마을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저건 사람이 아니오. 저것에게서 느껴지는 건 사악한 기운이 전부요!”
“만약 저게 적이라면 이곳에 있어선 안 됩니다. 고립될 수도 있습니다.”
각자의 의견은 조금씩 달랐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지금 이곳에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죠.”
마하임의 말에 모두는 각자의 물건을 챙겨들고 문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는 촛불이라도 있어서 약간의 빛이라도 있었지만 밖은 바로 앞도 안 보일 정도로 깜깜했다.
샤오랑은 품속에 손을 넣더니 부적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화둔!”
짧은 외침과 함께 샤오랑은 부적을 허공으로 던졌다. 그러자 부적이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며 타오르더니 푸른 불빛이 허공에 하나 생겨났다.
“유지 시간은 1시간이외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움직입시다.”
마하임 일행은 샤오랑이 만들어 낸 푸른 불빛을 의지해 여관 밖으로 향했다.
“큭, 제법이군. 벌써 포위했나?”
루다크의 눈이 꿈틀거렸다. 여관 밖으로 나오자 횃불을 든 사람들이 여관을 빙 둘러싸 완전 포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평범한 마을 사람 같이는 않군요.”
긴장한 티가 역력한 안나가 말했다. 포위한 사람들은 좌우로 조금씩 흔들거릴 뿐,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노옴…. 노옴을 내놔라….”
바로 그때 횃불을 든 사람들이 일제히 외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느릿하면서도 기분 나쁘게 주위로 퍼져나갔다.
“저주 받을 노옴…. 우리는 용서 못 한다.”
“노옴…. 노옴을 내놔라.”
“우리는 노옴을 원한다. 노옴을 내놔라.”
흐늘거리며 횃불을 든 사람들은 외쳤다. 마하임의 인상은 구겨졌고, 노옴족인 안나와 해운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변했다.
“아무래도 노옴족에게 원한이라도 있나 보군.”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는 루다크. 애써 웃고는 있지만, 딱딱하게 굳어 있어 누가 봐도 억지웃음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전투는 피할 수 없는 것 같군.”
마하임은 단숨에 오페라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횃불을 든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돌아가라! 더 이상 다가온다면 베겠다.”
마하임의 외침은 주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횃불을 든 사람들의 외침이 멈췄다.
“호호호. 애송이 주제에 담은 제법 크구나.”
불쾌한 여성의 웃음소리와 함께 횃불을 든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니 그녀는, 핏빛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키는 상당히 커, 적어도 마하임보다는 커 보였다. 그녀는 마치 유령처럼 걸어와 마하임 일행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둠의 군주, 헤라. 넌 특별히 내 곁에서 시중을 들게 해주마.”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헤라는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창백했지만, 그럭저럭 미녀라 불릴 만한 모습이었다.
“하! 시중 좋아하네. 놈은 내 라이벌이다! 너 같은 년한텐 과분하지. 얌전히 길을 터라. 그럼 죽이진 않으마.”
루다크의 외침이 공허하게 울렸다. 헤라는 그런 루다크를 바라보며 비웃었다.
“죽인다라. 뭐 좋아. 피차 대화가 필요한 상대는 아닌 듯하고. 인간 놈들은 모두 내 노예로, 노옴 놈들은 사지를 찢어 죽여 주마.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면, 가르샤의 노옴들도 모조리 죽여, 나의 원한을 풀리라!”
헤라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 횃불을 든 사람들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컥 끄어어억…!”
“으그그극.”
“키에에엑!”
그것은 도저히 사람이 낼 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지는 끔찍한 울림. 그리고 그 울림과 함께 놈들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너무나 빠르고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키가 커지고 근육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그 근육 위로는 붉은색 털들이 순식간에 자리 잡았다.
“드, 들어 본 적 있소. 저건 적랑! 흡혈귀의 노예.”
겉모습은 흡사 제국의 마도병, 워울프와 흡사했지만, 저 녀석은 붉은 털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몸에서 뿜어내는 시뻘건 기운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호오, 제법 견문이 있구나. 넌 특별히 산 채로 박제를 해 주지. 가라! 나의 종들아!”
헤라의 외침과 동시에 적랑으로 변해 버린 40여 명의 사람이 동시에 마하임 일행에게로 달려들었다.
“루다크, 샤오랑. 안나와 해운을 지켜라! 난 저 흡혈귀의 목을 딴다!”
마하임은 망설임 없이 돌진해 오는 적랑 무리에게로 달려들었다. 털이 붉고 조금 더 덩치는 컸지만, 기본적으로 제국의 워울프보다는 못한 놈들이었다.
“원한은 없지만…. 죽어라!”
마하임의 오페라는 단숨에 가장 가까운 적랑의 목을 베어 버렸다. 워울프는 생명력이 강했기에 머리와 몸이 분리되기 전에는 끊임없이 살육을 강행한다.
물론 지금 마하임의 앞에 있는 적랑은 워울프와는 달랐지만, 기본적인 특징은 똑같아 보였다.
“야야! 혼자만 가 버리면 어떡하라고?!”
“닥치고 다가오는 놈들이나 막아 보시오!”
“이익! 제기랄!”
몰려오는 적랑을 바라보며 루다크는 입술을 악물었다.
해운은 애초에 전투원이 아니었고 마장기가 없는 안나는 평범한 소녀에 불과했다. 그리고 샤오랑은 영환도사였기에 적랑과의 접근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루다크 혼자서 이 3명을 모두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좋아! 이 루다크 님의 저력을 보여 주마! 하압!”
쿠쿵-!
기합과 함께 루다크가 입고 있던 상의가 터져 나갔다. 그리고 부풀어 오르는 루다크의 근육들. 무투회에서 선보였던 투체 변신술이었다.
“그때는 형편없이 당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그의 근육은 붉다 못해 검게 변했다. 그의 몸에서는 암흑투기 특유의 검은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와라! 멍멍아! 뼈와 살을 분리시켜 주마!!!”
루다크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이미 두 마리의 적랑이 루다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덥석. 우직!
적랑 두 마리는 단숨에 루다크를 찢어 버릴 듯 날카로운 이빨로 그를 물어뜯었다. 하지만 루다크의 몸에는 생채기도 하나 나지 않았다.
“그딴 이빨로 이 몸의 투체 변신술을 뚫을 수 있으라 생각하나?”
루다크는 자신의 몸을 물어뜯은 적랑 두 마리의 목을 단숨에 꺾어 버렸다.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적랑들. 하지만 적랑들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적랑은 무리를 지어 루다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루다크는 주먹을 불끈 움켜졌다. 그리고 외쳤다.
“한번 견뎌 봐라, 암흑권풍!”
루다크의 외침과 동시에 그의 주먹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검은 기운은 루다크에게 달려드는 적랑들은 단숨에 뒤로 튕겨내 버렸다.
“훗! 간단하군.”
여전히 암흑투기를 흘리며 루다크는 여유롭게 말했다.
“컥, 키익. 커, 키익!”
“케르르르릉….”
암흑투기를 맞은 적랑은 입에서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바닥에서 쓰러진 채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적랑들은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심지어 그가 목을 부러트린 적랑 두 마리도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마, 저 적랑들, 불사체인가?”
“불사체.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생명을 공유한다는 말이외다! 저 헤라라는 흡혈귀가 죽기 전엔 계속 부활할 것이오.”
“뭐라?! 그렇게 중요한 것을 왜 지금 말하냐고!”
샤오랑의 말에 발끈한 루다크.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는 적랑들. 루다크는 다시금 암흑투기를 온몸에 두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썅,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잠시만 시간을 벌어 주시겠소? 이 주술엔 시간이 필요하오.”
“좋아. 한번 버텨 보지.”
루다크는 다시금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어진 난전에 피와 살이 튀었다.
루다크는 필사적으로 적랑과 맞섰지만 적랑은 그야말로 불사. 배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큰 상처를 입어도 이내 부활했다.
“썩을! 이거 완전 괴물이잖아?”
입에서 흐르는 피를 닦는 루다크. 할 수만 있다면 금제를 풀고 거대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능력은 지금 봉인된 상황이었다.
불행 중 다행히 암흑 투기는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한정적이라 이 싸움은 루다크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루다크다! 이깟 강아지 놈들에게 당하지 않는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투체 변신술 때문에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잔상처는 어쩔 수 없었다.
연이은 적랑의 공격에 루다크의 몸 곳곳이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루다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암흑투기로 적랑을 몰아 세웠다.
그러나 아무리 루다크라 할지라도 한계는 있었다. 점점 힘이 다해 가고 있음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샤오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