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됐소! 저에게 모두 붙으시오! 발동, 기린부(麒麟符)!”
샤오랑은 이렇게 외치며 품에서 부적 한 장을 허공에 던졌다.
팟-!
부적은 눈부신 빛을 내뿜으며 어둠으로 가득한 이곳을 순간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그 빛의 중간에는 전설상의 신수, 기린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히유우우우웅-
기린은 낮게 포효했다. 그 모습은 사슴의 머리에 호랑이의 몸을 지닌, 기묘한 모습이었다.
기린은 상위 신선계에 살고 있는 신수로서 성스러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기린이 뿜어내는 백은의 힘은 모든 악과 사술을 물리치는 신비한 힘을 지녔다.
깨갱-!
미친 듯 루다크에게 달려들던 적랑들은 기린의 성스러운 빛을 보자 감전이라도 된 듯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더는 다가오지 못하고 그저 으르렁대면서 서성거릴 뿐이었다.
“이렇게 좋은 게 있으면 진작 좀 쓰지 그래?”
“좋아할 것 없소. 저 기린부는 30분 뒤에 그 효력이 다할 것이오. 그전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린 모두 죽은 목숨이외다.”
샤오랑의 말을 들은 루다크는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많은 적랑을 처치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그 녀석에게 기대를 걸어 보는 수밖에.”
루다크는 마하임이 사라진 어둠 속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서걱-!
깨깽!
마하임의 쾌검이 번뜩일 때마다 적랑의 목은 종잇장처럼 쉽게 잘려 나갔다. 제2격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마하임의 공격은 그 하나하나가 일격 필살.
적랑 수십 마리가 마하임을 둘러싸고 사방에서 공격을 해 왔다. 하지만 마하임은 등 뒤에 눈이라도 달린 듯 전 방향에서 펼쳐지는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 역공을 날렸다.
파칵, 츄하하학!
깽!
크르르릉 캐액-!
적랑들의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마하임의 몸은 순식간에 적랑의 피로 얼룩졌다. 하지만 적랑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마하임을 공격했다.
“역시 죽지 않는군. 죽지 않으니 공포심도 없는 건가?”
마하임은 침착하게 자신에게 달려드는 적랑의 급소를 노리며 놈들을 쓰러트렸다. 하지만 적랑들은 쓰러지기가 무섭게 이내 되살아나 다시금 마하임을 공격해 왔다.
[적 손실률 제로. 분석결과 고차원적 생명 공유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적랑들의 무지막지한 공격 속에서도 오페라의 보고는 마하임에게 선명히 전해졌다.
결과는 예상대로라고 할까? 마하임은 이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번 해 본 적이 있었다. 회귀 전 흑신선들이 풀어 놓은 좀비들과 싸웠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략을 바꿔야겠군.”
마하임은 오페라의 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러자 오페라의 표면에 흐르는 ‘초진동’의 부드러운 파동이 되살아나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오페라의 검신은 나노 튜브로 만들어진 지상 최강의 경도를 가진 금속. 그에 초진동 공명 현상이 더해지자 오페라가 베지 못할 것은 물리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불사라고 무적은 아니지.”
마하임은 급소를 노리지 않고 철저히 적랑의 팔다리만 공격하기 시작했다.
심장이나 머리가 없어도 적랑은 공격할 수 있었다. 애초에 놈들에게는 장식이나 마찬가지인 생체 기관이었다. 하지만 팔다리를 잘라 버리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공격을 하려면 움직여야 하는데 팔다리가 잘려 버리면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불사체라 잘린 팔과 다리 역시 시간이 지나면 재생되기는 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날 적으로 만든 것을 후회해 주마. 흡혈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은 마하임은 기계적으로 적랑의 팔다리를 절단해 나갔다.
두려움이 없는 적랑의 공격은 빠르긴 했지만, 단순했다. 이렇게 단순한 공격을 마하임이 맞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설령 맞는다 하더라도 마하임의 몸속의 나노머신은 순식간에 마하임의 몸을 치료했다.
“시시하군. 강시보다 훨씬 못한걸.”
마하임을 공격하던 20마리의 적랑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직 살아는 있었지만 팔과 다리가 모두 절단된 상태에서 놈들이 마하임을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큭, 호호호. 이거야 원. 간만에 나와 같은 괴물을 만나게 됐군.”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흡혈귀 헤라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의 몸에서는 푸르스름한 귀기가 마치 아지랑이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너도 가르샤의 작품이냐?”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마하임은 차갑게 답하며 검을 갈무리했다. 헤라는 양손을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왜냐면 나도 가르샤의 생체 병기니까. 물론 실패작이지만.”
헤라의 양손에서 기분 나쁜 공명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페라의 초진동 공명 현상이었다.
[삑. 생체 반응 초진동 공명 현상 확인. 오페라 초진동 중화 모드로 전환합니다.]
초진동은 그 어떠한 금속, 심지어는 오페라의 나노 튜브로 만들어진 검신조차 부술 수 있었다.
하지만 초진동이라고 만능은 아닌 법. 물체의 고유 진동수를 왜곡하는 진동을 흘려내면 충분히 무효화시킬 수 있었다.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지. 나와 손을 잡지 않겠나? 너도 가르샤의 장난감이지 않나? 산 자를 죽은 자처럼 취급하는 그 노옴들에게 같이 복수하자. 그리고 우리만의 세계를 만드는 거야!”
광기를 흩뿌리며 헤라는 말했다. 뼈에 사무칠 정도의 가르샤에 대한 증오로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노옴족은 구 인류의 유물을 발굴하여 이를 이용해 각종 이익 사업을 벌이는 상인이었다.
물론 구인류의 유물을 발굴해 파는 일은 대륙에서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가르샤의 노옴들은 단순히 발굴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응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응용의 결과, 금단의 생체 병기에까지 손을 댄 것이다.
“너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가르샤는 나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악마들이야. 날 봐!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괴물이 되어 버렸어!
나 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놈들의 장난감이 되어 죽어갔는지 넌 모를 거야! 나와 힘을 합치자. 너와 나라면, 가르샤 아니 시오니아제국마저도 무릎 꿇게 만들 수 있을 거야.”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낸 헤라는 거칠게 숨을 몰아셨다. 그녀의 말에는 거짓은 없었다.
마하임도 어렴풋이 노우스랜드의 악행은 알고 있었다. 시오니아 제국의 마도병 워울프도 노옴의 작품이었으니까.
“네 입장을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납득은 하지 못하겠다.”
“왜지?”
헤라는 으르렁대며 말했다. 마하임은 당연한 듯 입을 열었다.
“너도 노옴과 다를 게 없으니까. 여기에 있는 적랑. 모두 이 마을 사람들이지? 그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끔찍한 괴물이 된 걸까?”
“우, 웃기지 마라! 놈들에게 나와 같은 희귀종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 갔는지 네놈을 모를 거야!”
“그래. 난 몰라.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 것 같군. 네놈 역시 똑같이 사람을 죽인 살인마라는 것을 말이지.”
오페라를 치켜드는 마하임. 더는 대화할 가치도 없었다. 악을 물리치기 위해 자신이 악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난센스.
그 이유가 아무리 그럴 듯해도 그것이 명분이 될 수는 없었다.
“…뭐 좋아. 애초에 너의 의견은 필요 없어. 널 적랑으로 만들면 모두 해결될 문제야. 얌전히 죽어서 내 적랑이 되어라.”
“해봐.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서로를 노려보는 마하임과 헤라. 먼저 움직인 것은 헤라였다.
[나노머신 반응 확인. 적의 오버클럭이 확인되었습니다.]
“뭐!”
마하임이 미처 반응도 하기 전, 헤라는 마하임의 배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뒤로 물러섰다. 그 움직임은 너무나 빨라 마하임은 잔상마저 보지 못했다.
“크윽!”
마하임의 배에서 피가 터져 나오듯 흘러내렸다. 조금만 더 깊이 상처를 입었다면, 내장까지 손상을 입었을 터였다.
“순간적으로 피한 것은 인정해 주지. 하지만 다음은 없을 거야.”
자신의 손에 묻은 마하임의 피를 혀로 핥는 헤라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누가 봐도 마하임은 치명상. 헤라는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창상(創傷) 확인. 긴급 치료를 시작합니다. 치료 완료에 걸리는 예상 시간 3초.]
오페라의 말과 동시에 마하임의 배에 난 상처에서 피가 멈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상처는 아물었다. 완전 치료에 걸린 시간은 3초에 불과했다.
“네, 네놈도 불사체인가?!”
경악한 표정의 헤라가 말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치명상이었는데 그걸 순식간에 치료해 버리다니, 그 회복력은 적랑의 것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알 거 없고. 넌 여기서 죽는다. 죄 없이 죽어간 마을 사람들을 위로비가 되어라. 오버클럭 x10 발동.”
[오버클럭 x10 발동합니다. 예상 유지 시간 5분.]
마하임은 단숨에 헤라와의 거리를 줄였다. 헤라도 오버클럭을 사용했지만 마하임의 오버클럭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성능은 떨어졌다.
“캬악!”
단말마의 비명. 헤라의 오른쪽 팔은 너무나 허무하게 마하임의 오레라에 의해 절단됐다.
헤라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팔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왜! 왜냐고! 난 그저 복수하고 싶은 것뿐이야!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노옴이라고!”
너무나 분했다. 너무나 억울했다. 어렸을 때 가르샤의 사냥꾼에게 생포당한 그녀는 수십 년을 가르샤의 실험체로 살아야만 했다.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겪으며 그녀는 복수의 날만 기다렸다. 그리고 며칠 전, 가르샤에서 고대인의 유물이 폭주하면서 생긴 틈을 이용해 헤라는 겨우 자유의 몸이 되었다.
자유의 몸이 된 그녀는 이 마을로 숨어들어 마을 사람들을 적랑으로 만들어 복수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인 듯했다.
“네 마음은 알겠다만, 넌 사도를 선택했다. 네가 나에게 죽는 이유는 오직 그것뿐. 승자가 정의가 된다. 그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지. 그렇지 않나?”
마하임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심 가슴 한구석이 찝찝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헤라를 살려 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 그랬었지. 난 패자였어. 언제나 그랬지. 하지만…. 이제 됐어. 난 더는 패배하지 않아. 설령 이 목숨이 다 불타오를지라도!”
헤라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붉은색 털이 뒤덮었고 몸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입이 튀어나오고 날카롭고 커다란 이빨이 입 사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잘려진 팔은 순식간에 재생되면서 더욱 크고 거대해졌다.
“스스로 적랑이 된 건가? 좋은 선택은 아니군.”
헤라의 변신은 얼마 가지 않아 끝났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키가 3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적랑이었다.
그 모습은 지금껏 본 적랑이 조그마한 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하고 끔찍했다.
크르르르르.
낮게 으르렁거리는 적랑이 되어 버린 헤라. 변신이 끝나기가 무섭게 헤라는 마하임에게로 달려들었다.
부우웅!
헤라는 마하임을 단숨에 짓이겨 버릴 듯 자신의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마하임은 너무나 간단히 헤라의 공격을 피해 버렸다.
“적랑으로 변한 건 너의 실수다.”
그리고 오페라의 검신이 잔상을 그리며 헤라의 팔을 파고들었다.
헤라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그녀의 팔은 거짓말처럼 간단히 잘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