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적랑으로 변한 헤라의 팔은 검붉은 피를 쏟으며 바닥에서 움찔거렸다.
“두 번 재생되지는 않나 보군.”
헤라의 잘린 팔 단면에서도 피는 계속 흘러내렸다. 헤라는 고통스러운 숨을 헐떡거렸다.
하지만 헤라는 개의치 않고 다시금 마하임에게 달려왔다.
쿵쿵쿵
육중한 울림이 마하임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마하임은 검을 치켜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덩치만 커졌지, 느리다. 오히려 적랑으로 변하기 전이 훨씬 위협적인걸.”
적랑화된 헤라는 남은 한 손을 미친 듯 휘두르며 마하임을 공격해 왔다. 하지만 마하임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최소의 움직임만으로 간단히 헤라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가차 없이 오페라를 휘둘렀다.
“케에에엑!”
거대 적랑이 된 헤라의 가죽은 오페라의 공격마저 튕겨낼 정도로 부드러우면서도 딱딱했다.
하지만, 모든 부위가 그렇게 견고한 것은 아니었다. 관절, 특히 다리 관절은 부분은 상당히 약해 오페라로 살짝만 그었을 뿐인데도 피가 터져 나왔다.
“그르르륵, 난 질 수 없어…. 크윽!”
방금의 충격으로 정신이 조금 돌아온 모양인지 헤라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온몸의 힘이 빠지고 있었다. 오페라에 당한 상처는 치료되기는커녕 점점 상처가 벌어져 출혈이 심해졌다.
승산은 이미 없었다. 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도망쳐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반드시 복수를 하고 말거다! 설령 네놈이 나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헤라는 이렇게 외치며 커다란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 직후 눈부신 빛이 적랑으로 변한 헤라의 입에서 번뜩였다.
[경고, 생체 레이저 반응 확인. 즉시 회피하십시오.]
“뭐?!”
뜬금없는 오페라의 경고에 마하임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퓨우우웅 펑 퍼퍼퍼펑-!
헤라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빛은 방금 전 마하임이 서 있던 곳을 스치듯 지나가며 모든 것을 불태웠다.
그 강렬한 열기는 마하임뿐만 아니라 꽤 떨어져 있는 루다크와 안나, 샤오랑, 그리고 해운에게까지 느껴졌다.
“최후의 발악인가? 하지만 너도 한계인 모양이로군.”
아슬아슬하게 ‘사광’을 피한 마하임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다시 전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사광을 사용한 헤라는 적랑의 몸에서 본래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후…. 이런 식으로 끝날 줄은 몰랐어.”
희미하게 웃는 헤라. 그의 몸은 모든 에너지를 다 소모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든 생체 병기의 공통점이었다.
생체 병기는 물질 대사를 조종하여 상식을 초월한 힘을 끌어낸다.
하지만 그 힘의 근원까지 사용해 버리면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막을 수 없는 붕괴가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하나 있어. 들어줄 수 있겠나?”
“들은 뒤 생각해 보지.”
“까칠하긴. 너…. 가르샤로 가는 중이었지?”
“그렇다.”
“가르샤에 가게 된다면, 혹시라도 조금의 자비심이라도 있다면, 부탁한다. 나와 같은 실험체가 아직도 많이 있다. 그 녀석들은 죽지도 못하고 영원한 괴로움을 당하고 있지.
그들을 구해 줘. 구해 줄 수 없다면 모두 죽여 줘.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그렇게 약속했다. 녀석들과.”
헤라의 눈에는 눈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미 다리가 붕괴되어 서 있지도 못하고 반쯤 무릎을 꿇은 채로 그녀는 최후의 숨결을 내쉬고 있었다.
“생각해 보지.”
“후, 그래…. 그것으로 좋아. 안녕이다. 인간.”
마치 다 불탄 나무처럼 재가 되어 바닥으로 무너지는 헤라. 마하임은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주변은 죽은 적랑들의 시체가 하나둘 원래의 인간 형태로 돌아오고 있었다. 끔찍한 살육의 현장…. 마하임은 이를 악물었다.
“가르샤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주겠다. 네놈들의 흑막을.”
* * *
마하임은 헤라를 위해 자그마한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일행에게로 돌아오자 그곳도 마하임이 본 광경과 비슷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에 있는 적랑들은 대부분 이곳 마을 사람들이었다. 헤라가 죽자 적랑으로 변해 있던 마을 사람은 원상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미 살아 있는 자는 없었다. 적랑은 강시처럼 시체로 만들기 때문에 원래의 인간으로 돌아온다더라도 시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저기…. 그 흡혈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돌아온 마하임에게 해운은 물었다. 마하임의 얼굴은 순간 일그러졌지만, 이내 본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내가 죽였다.”
“혹시 그 흡혈귀가 무슨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넌지시 물어보는 해운. 마하임은 당장 해운의 멱살을 잡아 진실을 토해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으로서는 헤라의 말 말고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게다가 내일이면 좋든 싫든 가르샤에 도착한다.
그때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옳았다.
“혹시라도 들으셨다면 다 잊으십시오. 흡혈귀는 거짓말쟁이에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홀리는 요물입니다.”
“…….”
마하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분위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잠자코 입을 닫고 있던 안나가 마하임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마하임. 루다크는 무어라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닫았다.
샤오랑은 죽은 마을 사람들을 애도라도 하듯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연신 숙이고 있었다.
전투가 다 끝난 뒤에도 모두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결국 새벽 동이 터 오는 것을 보고 마하임 일행은 다시금 수송용 장갑차에 올라탔다.
여전히 승차감은 최악이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모양인지 처음처럼 멀미를 심하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칫, 나랑 싸울 때보다 더 강해졌나?’
마하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다크는 쓴맛을 다셨다. 비록 자신의 힘 중 일부가 봉인된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지난밤 마하임이 보여 준 무력은 자신을 능가하고 있었다.
‘더 강해져야 해. 절대 질 수 없다…!’
주먹을 불끈 쥐는 루다크. 장갑차 안의 조그마한 창으로 밖을 바라보자 숲과 산이 쏜살같이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시오니아 제국에도 이러한 장갑차가 있긴 했지만, 지금 자신이 탄 이 장갑차보다 빠른 장갑차는 보지 못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렸을까, 멀리 거대한 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크기는 알타베르나의 중앙탑보다는 낮았지만 그 위용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었다.
“이제 다 왔습니다. 저곳이 가르샤의 제1연구 기지, 그라운드 제로입니다.”
해운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강철로 만들어진 거대하고도 불길한 탑.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지만, 책에서라면 몇 번 본 적 있었다.
장갑차는 거침없이 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하임 일행은 가르샤에 첫발을 내디뎠다.
* * *
가르샤의 제1연구 기지는 기본적으로 거대한 철로 만든 구조물이었다.
지상3층, 지하 8층의 역피라미드 형태의 건축물인데 그 기원은 구 인류가 만든 ‘빌딩’을 개조해 만들었다고 했다.
겉보기에는 무척 거대했지만, 내부는 마하임이 똑바로 서기조차 힘들 정도의 좁은 통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나마 장갑차가 멈춰선 선착장은 넓었지만, 조금만 걸어가자 좁디좁은 통로들이 미로처럼 이어졌다.
게다가 어디선가 풍겨오는 매캐한 냄새는 장갑차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심했다. 비위가 약한 샤오랑은 이 냄새를 맡자마자 다시 한번 헛구역질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가르샤에.”
좁은 통로를 몇 차례 지나, 그나마 넓은 장소에 도착하자 검은색 투구를 쓴 짧은 수염의 노옴이 서 있었다.
그는 노옴들 중 상당한 높은 지휘에 있는 모양인지 해운은 그를 보고서 곧장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연구소장님. 말씀하신 분들을 모셔 왔습니다.”
“흠, 고생했다. 넌 근무 위치로 돌아가도록.”
“네!”
해운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연구소장은 마하임 일행을 향해 말했다.
“어느 분이 마하임 님이십니까?”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역시 마하임이었다. 마하임은 가볍게 손을 들며 말했다.
“접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왜 저를 찾으신 겁니까?”
마하임은 연구소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철저히 비밀을 지키는 것을 보면 뭔가 숨기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그건 차차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식사부터 하시죠? 옛말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옛말은 처음이군.”
“아,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구 인류의 속담이거든요. 그럼 가실까요?”
앞서 걷기 시작하는 연구소장. 마하임 역시 오늘 종일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못했기에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뒤따라갔다.
“원래라면 좀 더 성대한 환영식을 하려고 했는데, 지금 이곳에 있는 연구원 전부가 ‘유물’…. 아니, 이제 밝혀도 상관없겠군요. ‘엑스칼리버’를 막기 위해 지하에 투입되어 있어 부득이 제가 마중을 나왔습니다.”
마하임은 짧게 신음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엑스칼리버’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시기상은 훨씬 앞섰지만 가르샤의 노옴들이 전설상의 마장기 ‘엑스칼리버’를 이미 찾아낸 모양이었다.
“저기, 엑스칼리버는 작동 불능 상태였던 걸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지켜보고 있던 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사실 가르샤가 엑스칼리버를 찾아낸 것은 꽤 오래전 일이었다. 하지만 엑스칼리버는 그 어떠한 외부 충격에도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로샤의 연구자들은 몇 년을 연구하다 결국 포기하고 창고에 봉인해 버렸다.
“돌아오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오셨군요. 공녀님.”
“저도 가르샤의 상급 연구원이니까요. 이런 비상시라면 더욱이요.”
“역시 전 소장님의 따님답군요. 일단은 식사부터 하시죠. 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까요.”
연구소장은 마하임 일행을 작은, 노옴 기준으로는 꽤 큰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이미 고기 위주의 꽤 근사한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엘프가 있었다면 기겁할 만한 광경이었지만, 마하임 일행 중 엘프는 없었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정도의 광경이었다.
“역시 노옴제 햄이 최고라니까! 고생해서 따라온 보람이 있소.”
샤오랑은 식탁에 앉자마자 허겁지겁 눈앞에 펼쳐진 진수성찬을 입 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루다크는 커다란 칠면조 구이 다리를 뜯더니 단숨에 입에 넣었다.
“으, 이렇게 부드러운 칠면조는 처음이다. 크흑!”
눈물까지 글썽이며 칠면조를 뜯어먹는 루다크. 마하임은 한심한 듯 그런 루다크를 바라보다 자그마한 과일 몇 개를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연구소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말해 봐라. 숨기지 말고 모두.”
“후, 의심이 많으시군요. 좋습니다. 사실 숨길 것도 없습니다. 저흰 아무것도 한 게 없거든요. 그냥 갑자기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요.”
일주일 전이었다. 가르샤의 제1연구소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롭게 발굴한 구 인류의 유물로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하 8층 창고에 봉인되어 있던 엑스칼리버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움직이기 시작한 엑스칼리버는 닥치는 대로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했습니다. 이런 메시지를 사방에 퍼트리며 말이죠.”
연구소장이 주머니에 있던 조그마한 막대를 꺼내 버튼을 누르자, 사람의 목소리이긴 했지만 너무나 건조한 톤의 목소리가 이 방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