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어처구니가 없군.”
마하임은 당황하다 못해 황당했다. 아르케비니아의 옥새가 엑스칼리버의 부품이었다니….
이 옥새가 없이는 엑스칼리버의 본래 성능을 낼 수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왜 시오니아 제국이 아르케비니아 왕국을 공격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르케비니아 왕국은 변경에 위치한 그저 그런 왕국. 지리적, 전략적 요충지도 아니었을 뿐더러, 딱히 땅이 기름지지도 않았다.
시오니아 제국의 입장에서는 득보다 실이 더 큰 원정을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오니아 제국은 전력을 다해 아르케비니아를 공략한 이유는 다 ‘옥새’ 때문이었던 것이다.
“기동 한계 시간에 다다랐다. 앞으로 24시간 동안 본 기체는 충전 모드로 전환한다. NOS 연산 칩 확보 시 충전 시간은 1시간 이내. 기동시간은 20시간 이상 연장이 가능하다.”
엑스칼리버의 말을 들은 마하임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겨우 손에 넣은 엑스칼리버지만, NOS 연산 칩이 없다면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애물단지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하하하. 뭐 좋아.”
마하임은 생각을 바꿨다. 분명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일이었지만, 언젠가 아르케비니아에 진 빚을 값을 생각은 하고 있었다.
단지 힘이 아직 모자랐고 시기상 조금 빨랐기 때문에 미뤄 왔을 뿐이었다.
치이-!
압축 공기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엑스칼리버의 출구가 열렸다. 엑스칼리버에서 내린 마하임은 연구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엑스칼리버를 여기서 옮기고 싶은데 가능할까?”
“아,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엑스칼리버의 AI가 이야기를 하지 않은 모양인데 이건 사실 저희도 최근에서야 알아낸 것이라서요.”
이렇게 말하며 연구소장은 마하임을 엑스칼리버 뒤쪽으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마하임이 탑승자 인증 때 사용한 푸른 패널이 붉은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저 패널에 손을 얹고 외치십시오. ‘엑스칼리버 수납’이라고요.”
연구 소장의 말에 마하임은 미심적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부작용 같은 건 없겠지?”
“걱정 마십시오. 이건 원래 엑스칼리버의 기능 중 하나입니다.”
다시금 확인한 마하임은 엑스칼리버의 붉은색 패널에 손을 얹고 말했다.
“엑스칼리버 수납.”
마하임의 외침과 동시에 엑스칼리버는 새하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 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당황하지 마십시오. 단지 엑스칼리버는 마하임 님의 ‘나노머신’과 동기화가 되어 양자 세계로 사라진 것뿐입니다. 자. 그럼 마하임 님, 다시 엑스칼리버라고 외쳐 주시겠습니까?”
마하임은 잠시 연구소장을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엑스칼리버!”
츄화아악!
공간과 공간이 부딪칠 때 나는 특이한 충돌음과 함께 마하임의 등 뒤에 새하얀 형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선명해지더니 엑스칼리버의 모습으로 변해 나타났다.
“엑스칼리버의 장점은 휴대하기가 편하다는 겁니다. 언제 어디서든 불러낼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궁극의 S급 마장기란 수식어가 붙는 겁니다.”
만족한 듯 웃는 연구소장. 마하임은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 엑스칼리버의 능력에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지혜의 돌이 없어서 지금은 끽해야 5분도 못 움직일 겁니다. 그리고 그 5분을 움직이기 위해서 24시간을 충전해야 하지요. 다시 말해 지혜의 돌이 없는 엑스칼리버는 그냥 애물단지일 뿐입니다.”
마하임이 생각해도 연구소장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성능을 지닌 마장기라도 5분밖에 움직일 수 없다면 계륵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보아하니 지혜의 돌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는 듯하니 따로 설명드릴 필요는 없는 듯하고, 이제 어떡할 겁니까?”
연구소장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하임은 엑스칼리버의 본체를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마하임은 엑스칼리버를 다시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양자 세계에 수납시킨 뒤 말했다.
“알타베르나로 돌아가야지. 그건 그렇고, 가르샤에서 만든 생체 병기를 이곳에 오다가 보았다.”
마하임의 말에 연구소장의 여유 있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솔직히 네놈들이 뭘 만들든 난 상관 안 해. 나는 정의의 용사 따위는 아니니까.”
마하임은 잠시 말을 끊은 후 매서운 살기를 내 뿜으며 말했다.
“하지만 네놈들의 유출한 생체 병기들이 살육을 일삼으며 떠돌아 다니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혹여라도 생체 병기로 인해 시끄러운 소문이 들릴 시,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나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네놈들을 박살 내 버릴 테니까.”
마하임은 쏘아내던 살기를 거두었다. 연구소장은 그제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마나 놀랐던지 연구소장은 바지에 소변까지 지린 상태였다.
“일행들을 불러 줘. 돌아가겠다.”
마하임은 이렇게 말하고선 돌아섰다. 아직 그 무엇도 확실한 것이 없었지만, 이제야 마하임이 몰랐던 ‘진실’의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일단 아르케비니아에 가 보자. 옥새를 얻는 방법은 그다음에 생각해 보고.’
마하임은 그렇게 마음먹으며 가르샤의 연구 기지에서 나갈 채비를 갖추었다.
* * *
가르샤에서 돌아오는 길은 의외로 편했다. 왜냐하면 가르샤에서 특별히 비공정을 빌려 주었던 것이다.
확실히 수송용 장갑차를 타는 것보다는 편하고 빨랐다. 하지만 비공정을 탔다고 멀미를 안 하라는 법은 없었다.
“우에에엑!”
마하임은 언제나처럼 멀쩡했지만, 샤오랑과 루다크는 장갑차를 탔을 때만큼이나 심하게 멀미에 시달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안나는 익숙한 듯 괜찮았다는 거.
“마하임 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안나는 가르샤에서 구한 수재 햄을 마하임에게 들이밀었다. 겉보기에는 그다지 맛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햄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시장에서 인기가 많았다.
“잘 먹을게요.”
안나가 준 햄을 한입 베어 무는 마하임. 햄의 깊은 풍미가 한 입만 베어 먹었는데도 입 안에 가득했다. 과연 윈디가 탐을 낼 만큼 맛있었다.
“좀 더 있다가 오시지 그랬습니까. 고향은 간만 아닌가요?”
마하임은 햄을 씹다가 안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나는 무언가를 생각하다 머릴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졸업부터 하고 생각해 볼 거예요. 게다가 고향이라고 하지만,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어서 말이죠.”
안나는 어려서 어머니을 잃고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러다 가르샤의 생체 실험장에서의 사고로 아버지를 잃자, 가르샤가 하는 모든 것들에 염증을 느껴 알타베르나로 도피 아닌 도피를 했었다.
그렇게 옛일을 조금씩 잊어 갈 무렵, 원치 않게 안나는 다시금 고향 가르샤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좀 달라졌을 줄 알았는데 예전과 전혀 다를 게 없더군요. 좋은 기억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앞으로도 갈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안나는 비공정 밖으로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쓸쓸히 말했다.
마하임은 무어라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도 없었다. 그저 지금 마하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의 곁에 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기이이잉-!
비공정이 속도를 높이기 위해 엔진을 가속했다.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지평선 너머로 알타베르나를 감싸고 있는 산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마하임의 곁에 선 안나는 마하임의 어깨에 살짝 몸을 기댔다.
살짝 떨리는 안나의 몸. 비공정 위 갑판의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는 몰랐지만, 그녀의 몸이 오늘따라 더 가냘파 보였다.
마하임은 아무 말도 않고 안나의 어깨를 살짝 감싸 앉았다. 시아라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자신을 도와준 안나에게 이 정도 답례는 해 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에엑! 세상은 불공평해! 왜 난 뭐만 타면 멀미를 하냐고!”
“으으으, 그건 저도 마찬가지요. 이제 더는 토할 것도 없는데, 또…. 우엑!”
비공정 갑판에서 끊임없이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루다크와 샤오랑. 가르샤의 모험은 그렇게 끝나 갔다.
* * *
“어서오라요. 가르샤의 일은 잘 해결했다요?”
알타베르나로 돌아오자 가장 먼저 마하임 일행을 맞이한 것은 윈디였다. 윈디는 군침을 뚝뚝 흘리며 마하임에게 말했다.
“사 왔다요? 가르샤 명물 특제 햄. 안 사 왔다면 저주할 거다요!”
난리 아닌 난리를 치는 윈디에게 마하임은 가르샤에서 돌아올 때 선물로 받은 햄 한 무더기를 윈디에게 건넸다.
“와우! 햄이다! 윈디, 햄 더미 속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요!”
좋아서 날뛰는 윈디를 바라보던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윈디는 그럼 마하임을 바라보다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참! 아르케비니아에서 편지가 왔다요. 한번 읽어 보라요. 중요한 이야기라고 했다요.”
윈디는 마하임에게 편지를 건넸다. 편지는 아르케비니아 왕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마법으로 이중 삼중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왕가의 일원이 아니라면 절대 열어 볼 수 없도록 봉인된 것을 볼 때, 보통 일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마하임은 의식을 집중해 편지에 걸려 있는 봉인을 해제했다. 그리고 천천히 편지를 꺼내 들었다.
“서거?! 그 아버지가?!”
편지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적혀 있었다.
마하임의 아버지는 아르케비니아의 국왕이자 대마법사였다.
대마법사의 평균 수명은 140살.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수명조차 어느 정도 인간을 초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무병장수를 위해 대마법사의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마하임의 아버지는 이제 80살에 불과했다. 그런데 서거라니, 이건 필시 뭔가의 변고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아르케비니아로 가 봐야겠습니다. 윈디 님.”
윈디는 잠시 생각하다 마하임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요?”
“네.”
“그다지 슬퍼 보이지는 않는다요?”
“그런 아버지였으니까요.”
마하임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마하임의 국왕, 카리고나 2세는 그의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얼굴조차 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하임이 카리고나 2세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지켜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키지 않지만 정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알겠다요. 다녀오라요. 아버지의 장례식에 아들이 빠지면 곤란하지 않겠냐요.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하라요. 최대한 편의를 봐주겠다요.”
마하임은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필요한 것도 없었을뿐더러 지금 마하임이 아르케비니아로 간다면 싫든 좋든 왕위 계승권을 두고 쟁탈전에 휘말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마하임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 간단히 짐을 챙겼다.
지금 마하임이 필요한 것은 부도, 권력도 아닌 엑스칼리버를 완전하게 만들 아르케비니아의 옥새 하나뿐이었다.
이를 손에 넣으려면 원하건 원치 않건 싸움에 휘말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충분하고 남을 만큼 마하임은 강해졌다. 남은 것은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이권을 챙기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