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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113화 (113/194)

113화

알타베르나에서 아르케비니아까지의 거리는 마차로는 2주일, 걸어서는 한 달 이상 걸리는 먼 거리였다.

불행 중 다행히 예전에 윈드시크릿에 갈 때 타고 갔다 망가진 윈디의 비공정이 수리가 완료되어 이걸 타고 아르케비니아로 갈 수 있었다.

어째선지 샤오랑과 루다크도 같이 가고 싶다고 떼쓰듯 말했지만, 그들은 알타베르나에서의 수업이 있었다.

마하임은 아버지 장례식이라는 거창한 핑계가 있었지만, 그들은 수업을 빼먹을 만한 핑곗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안나 역시 마하임을 아르케비니아까지 데려다주고 바로 돌아와야만 했다.

“마하임 님과 함께 있고 싶은데….”

아르케비니아로 향하는 하늘. 비공정을 몰고 가는 안나는 곧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지난번 가르샤에 가서도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이번에는 무려 단둘이서 이렇게 여행을 하게 됐는데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으니, 안나는 가슴이 답답했다.

“안나 님 아르케비니아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음…. 지금의 날씨라면 오늘 오후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차가운 아침 바람이 안나와 마하임이 있는 비공정 안 조정실까지 파고들었지만 그다지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하임은 따끈하게 끓여진 차 한 잔을 비공정을 조종하고 있는 윈디에게 건넸다.

“직접 우려낸 차입니다. 드실 만할 겁니다.”

“아…. 고, 고마워요.”

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마하임이 건네준 찻잔을 받아 들었다.

마하임이 품절남이라는 사실은 안나도 잘 알고 있었다. 시아라와 마하임의 관계라면 알타베르나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방학이 끝난 뒤, 시아라를 본 사람은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가족 문제로 휴학했다는 것뿐이었다.

마하임도 이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알타베르나에는 온갖 소문이 다 들렸지만, 마하임은 개의치 않고 학교생활을 할 뿐이었다.

“음, 마하임 님?”

“왜요. 안나 님.”

“저기…. 님 자는 좀 빼 주셨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안나 님도 빼 주시죠? 그냥 저를 마하임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이제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해지지 않았나요?”

방긋 웃으며 말하는 마하임. 안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 그럼…. 마하임. 저기 궁금한 게 있어요.”

“뭡니까? 안나. 제가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다 이야기해 드릴게요.”

“저기…. 시아라 님하고는 잘 지내시나요? 요즘 보이지 않아서.”

안나는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사실 정말 하고픈 말은 따로 있었지만, 마하임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안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아,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연락이 닿지 않아요.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졌습니다.”

방학이 끝나도 시아라는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윈디를 통해 전해 들은 것은 그녀가 개인 사정으로 휴학을 했다는 것뿐.

마하임도 나름대로 조사해 보았지만, 시아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군요.”

슬픈 듯 말꼬리를 흐리는 마하임. 그런 마하임을 바라보며 안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마하임의 마음속에는 안나 자신이 들어갈 자리는 없는 듯했다.

‘하지만 포기 못 해. 아직 기회는 있어. 난…. 포기하지 않는 여자라고!’

주먹을 불끈 쥐며 다시금 결의를 다지는 안나.

차가운 아침 햇살은 이제 정오를 향하는 따스한 기운으로 바뀌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의 상쾌한 공기가 비공정 안을 가득 채워 갔다. 아르케비니아의 하늘은 오늘도 맑을 것 같았다.

* * *

늦은 오후. 태양이 서쪽 하늘로 사라질 적에 아르케비니아 성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시오니아 제국의 비공정이 관측된 것이다.

병사들이 비상 소집되고 아르케비니아의 자랑인 정예 마법사 부대도 혹시 모를 전투에 대비해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비공정에서 나온 사람은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다.

“충! 마하임 왕자님께 인사드립니다.”

경비대장 기사 애쉬는 성문 바로 앞에 착륙한 비공정 안에서 내린 마하임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마하임이 비록 왕위 계승 서열 순위에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인물이었지만, 애쉬 정도 되는 직위의 기사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군, 애쉬. 일어서도 좋다.”

마하임의 말에 애쉬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하임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마하임이 윈드시크릿으로 귀향 가듯 쫓겨난 지 2년이 지났다.

2년 전의 마하임과 지금의 마하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르케비니아 왕궁에서 살던 마하임은 비쩍 말랐지만 배만 불숙 나온 볼품없는 3류 왕족에 불가했다.

하지만 지금의 마하임은 잘 단련되고 숙련된 기사와 같은 모습이었다. 너무나 완전히 달라져, 애쉬는 마하임을 처음 봤을 때 자칫 못 알아볼 뻔했다.

“일단 들어가시죠. 자세한 것은 궁에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애쉬의 말에 마하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공정 출구에서 마하임을 배웅하러 나온 안나를 향해 마하임은 손을 흔들었다.

안나는 씁쓸한 감정을 지우지 못하고 애써 웃으며 마하임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하임은 아르케비니아 성 안으로 들어갔다. 안나는 비공정을 몰아 다시 알타베르나로 기수를 돌렸다. 마하임의 또 다른 전쟁은 다시 막이 올랐다.

* * *

아르케비니아 성. 이곳은 언제 보아도 숨 막히는 곳이었다.

높은 성벽과 그보다 더 높은 왕성의 첨탑. 화려한 조각들로 넘쳐나는 천혜의 고도, 아르케비니아.

그러나 마하임에게 있어서 이곳은 절대 그리운 고향 같은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마하임의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의 어머니는 국왕의 변덕으로 인해 들어온 정실 왕비도 아닌 첩. 그리고 그 첩의 아들인 마하임이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던 두 모자는 마하임이 5살 되는 해에 영원한 이별을 해야만 했다.

의사들은 자연사라고 했지만, 마하임은 믿지 않았다.

이 왕궁에서 그녀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렇기에 그의 어머니는 마하임이 5살 되던 해에 별다른 증세도 없이 돌연사로 생을 마감했다.

어머니의 죽음 후, 마하임은 살아 있지만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 왔다.

죽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마하임은 못나고 방탕한 왕족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13년 후. 마하임은 윈드시크릿의 영주로 발탁되어 떠나게 된다.

“후우, 내가 돌아왔다. 아르케비니아.”

마하임은 성안을 거닐며 중얼거렸다. 떠나올 때는 그저 무력한 꼬마였을 뿐이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자신의 앞을 막는 것이 그 무엇이든 마하임은 분쇄할 각오가 되어 있었고, 또한 그럴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하임이 자신도 모르게 살기를 끌어올리자 안내를 하던 애쉬가 깜짝 놀라 마하임에게 말했다.

“왕자님, 어디 몸이 좋지 않으십니까?”

“아니다. 그냥 좀 감정이 격해졌을 뿐이다.”

“아아. 그렇죠. 국왕 폐하의 서거는 정말 유감입니다. 조금만 더 가시면 추모관이 나옵니다. 따라오시길.”

다시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는 애쉬. 마하임은 끌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갈무리하고 그 뒤를 걸었다.

왕궁의 내실에 들어오자 화려한 분위기는 어느 듯 사라지고 소박한 장식과 기름등이 은은하게 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내실의 중앙에는 새하얀 꽃으로 장식된 관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관 안에는 아르케비니아의 왕 카리고나 2세가 잠든 듯 누워 있었다.

“당신도 결국 죽고 말았군.”

마하임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는 뛰어난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가 들인 후궁만 12명. 첩까지 친다면 20명이 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낳은 아들들은 어려서부터 피 터지는 서열 경쟁을 해야만 했다.

독살, 암살, 파벌…. 그런 것은 일상이었고, 그 일상 때문에 마하임의 자신의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후 많은 일이 있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으려는 왕자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무력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카리고나 2세였기에 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이때 쿠데타에 참여한 11명의 왕자가 사형당했다.

그야말로 피를 피로 씻는 내전의 나날. 돌이켜 보면 마하임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좀 늦었구나. 아우여.”

추모관 후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하임의 이복형제인 현 왕위 계승 서열 1위 알젠테르 왕자였다.

그는 마법사의 재능은 보통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아 지금껏 살아 있을 수 있었다.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하하, 국왕 폐하께서 승하하셨는데 왜 별고가 없겠는가. 자, 이리로 앉게.”

“네, 형님.”

아르케비니아의 수많은 공주와 왕자들은 다 죽었다. 치열한 암투 끝에 살아남은 왕위 계승권자는 마하임과 알젠테르 왕자밖에 없었다.

나머지 형제자매는 끝없이 이어진 왕위 쟁탈전에 희생양이 되어 모두 죽었다. 그런 와중에 마하임이 살아남은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윈드시크릿에서의 일은 들었다. 고생이 많았겠더구나.”

“네, 걱정해 주신 덕에.”

“그래, 형으로서 도와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적어도 식량 지원은 해 줬어야 하는 건데.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더구나.”

알젠테르 왕자가 감상에 젖어 있는 그 상황에서도 마하임의 머리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러 가지 가정과 확률상의 근거 그리고 지금까지의 느낌과 정황. 적어도 당장 마하임 자신에게 어떠한 위해를 가해 올 조짐은 없었다.

그렇게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무게에 짓눌려 숨을 쉴 수도 없을 것 같은 그 침묵을 깬 것은 알젠테르였다.

“하하하,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왕위 쟁탈전 같은 것은 할 이유가 없으니까. 참, 여기에 얼마나 머물 작정이냐?”

“아버님의 입관식은 보고 떠날 생각입니다.”

“이곳에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습니다.”

형의 질문에 마하임은 딱 잘라 말했다. 이미 그에게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마하임에게 있어서 가슴 아픈 추억들만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내일 당장 떠나라.”

알젠테르는 담담하게 말했다. 마하임은 주위를 한번 살펴보았다. 적막감마저 느껴지는 추모관. 마하임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카마산 때문입니까?”

마하임의 말에 알젠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마산. 사실상 아르케비니아의 권력 서열 1위이자, 이곳에서 마하임이 가장 경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뛰어난 마법사이자 정치가이며, 또한 야심가였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아르케비니아 귀족들 사이에 스며들어 암약했고, 카마산의 계략에 말려든 멍청한 귀족들은 그의 꼭두각시가 되어 놀아났다.

그 결과, 지금의 상황이 완성된 것이다.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아르케비니아의 실권은 카마산이 모두 가지고 있지.”

씁쓸한 미소를 짓는 알젠테르. 그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이른 죽음도 저 카마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하지만 그 말을 꺼내는 것조차 알젠테르는 두려웠다.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형님.”

“뭐지?”

“제가 카마산을 제거한다면 무엇을 해 주실 수 있을는지요.”

마하임의 말을 들은 알젠테르는 깜짝 놀라 마하임의 입을 가렸다.

“말조심하거라. 카마산은 대마법사다. 그의 마법으로 지금 이곳도 감시하고 있을지 모른다.”

“상관없습니다. 제 질문에 답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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