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알젠테르가 동요하고 있는 것이 마하임에게까지 느껴졌다.
지난 10여 년간 알젠테르는 카마산의 꼭두각시였다. 그의 곁에서 본 카마산은 악마 그 자체였다.
지금껏 카마산에게 도전했다가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하임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음…. 제가 좀 늦었습니다. 왕자님들.”
때마침 들려온 목소리. 그는 다름 아닌 카마산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나누고 있으신지요. 하긴 간만에 보셨으니 반갑기는 하시겠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카마산. 그는 잿빛 로브를 걸치고 크고 붉은 보석이 박혀 있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둘에게 다가왔다.
마하임은 얼굴이 절로 구겨졌지만, 애써 표정을 감추며 머리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재상. 별고 없으셨는지요.”
“저야 언제나 그렇지요. 국왕 폐하의 승하는 참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명군이셨는데.”
카마산의 주름살 진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의 정확한 나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100살이 훌쩍 넘었다는 것이다.
고위 마법사는 마나를 제어해 자신의 노화를 늦추어 일반적인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카마산의 나이는 추측만 할 뿐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하임 왕자님. 요즘 윈드시크릿에서 묘한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상관없지 않습니까? 반역만 일으키지 않으면 절대 윈드시크릿에 간섭하지 않겠다 약조했을 텐데요. 그래서 롤카가 윈드시크릿을 공격했을 때 침묵하신 것 아닙니까.”
“아아. 그랬었죠. 하지만 ‘설탕’이 얽혀 있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눈을 번뜩이는 카마산. 이미 윈드시크릿에서 설탕을 취급하고 있고 상당히 많은 부가 축적되고 있다는 것을 카마산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 딱 절반만 이윤을 나눠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설탕을 만들든 뿌리든 저 카마산은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겠습니다.”
마하임은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칼만 안 들었지, 카마산은 강도나 마찬가지였다.
마하임은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하하하. 그래, 그 정도는 편의를 봐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길게 끌어선 좋을 게 없을 겁니다. 결심이 서면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럼 전 이만.”
카마산은 비웃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추모관 밖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카마산이 밖으로 나가자 마하임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전하시군요. 카마산은.”
“알았으면 돌아가거라. 카마산을 죽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고. 네가 상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길고 짧은 것은 직접 대어 봐야 아는 법. 속단은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예전에 제가 쓰던 방. 비어 있죠? 그곳에서 오늘 묵겠습니다.”
“그리하거라. 딴생각은 하지 말고.”
알젠테르는 불길한 예감을 떨치지 못하고 마하임을 배웅했다.
비록 마하임은 배다른 형제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가장 친하게 지내 온, 알젠테르에게 있어선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알젠테르는 어려서부터 아무런 힘도 연고도 없는 마하임을 지켜 주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만약 알젠테르가 마하임을 지켜 주지 않았다면 마하임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다.
“마하임…. 너만큼은 지켜 주마. 나의 유일한 친구여.”
씁쓸한 얼굴의 알젠테르. 그는 긴 한숨을 내쉰 뒤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 * *
밤이 돌아왔다. 아르케비니아 성 주변의 인가에서는 밤에도 제법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마하임은 자신이 어렸을 때 어머니와 썼던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아무리 떠올려 봐도 좋은 추억은 없었다. 아르케비니아 성안에서의 하루하루는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첩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지니고 온갖 암투가 난무하는 아르케비니아 왕실에서 살아남기란, 처절함이 수반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돌아왔다.”
금의환향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카마산에게 진 빚은 확실히 갚을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타이밍, 카마산이 혼자 있을 때는 몰라도 그가 병사를 움직였을 때 상대하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무척이나 위험했다.
마법은 일반적으로 크게 두 종류로 구별할 수 있다.
마하임이 사용하는 4원소를 기반한 자연 마법. 그리고 마법의 근원 마나의 어두운 힘을 기반으로 하는 사령 마법.
카마산은 이 사령 마법에 정통했고, 사령 마법을 이용한다면 불사의 군대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마하임이라도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똑똑.
상념에 잠겨 있던 마하임은 누군가의 노크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누구십니까?”
“나다. 알젠테르.”
“문 열려 있습니다.”
마하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을 열고 마하임의 방 안으로 들어온 알젠테르.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은 검은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빨리 피해야 한다, 마하임. 카마산이 널 죽여 설탕을 독차지하려 한다.”
“…….”
짧든 길든 언젠가는 오리라 생각했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완벽한 계획을 세워 일을 진행시킬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카마산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오너라. 정문 쪽은 이미 카마산의 병사들로 점거당했다. 다행히 카마산은 왕가의 비밀 통로는 모르니 일단 그곳으로 가자.”
“네, 알겠습니다.”
마하임은 일단 알젠테르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카마산과 싸우게 된다면 알젠테르도 휘말릴 위험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알젠테르만큼은 지키고 싶었기에 마하임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라 왕가의 비밀 통로로 향했다.
왕가의 비밀 통로는 아르케비니아 왕가의 왕족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곳으로서, 긴급 상황 발생 시 성 밖으로 대피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미안하다, 마하임. 내가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아닙니다. 형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구나.”
둘은 말없이 어둡고 습한 통로를 걸어갔다.
마하임도 그렇지만 알젠테르 역시 아르케비니아에서의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카마산의 꼭두각시로서의 왕족 생활은 자유 따위는 없었다.
카마산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죽을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마하임뿐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하임만큼은 지켜 주고 싶은 것이 알젠테르의 본심이었다.
“윈드시크릿으로도 돌아가지 말거라. 카마산이 아르케비니아의 전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갈 생각이다. 이대로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떠나렴.”
알젠테르는 마하임에게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알젠테르가 비자금으로 조금씩 모아온 금은보화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하임은 순간 코끝이 찡해짐을 느꼈다.
자신이 유일하게 따르고 믿은 형, 알젠테르. 마하임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늘 밤 이 비극과 절망을 모두 끝내리라.
“형님. 잠시만 쉬십시오.”
퍽-!
마하임의 주먹이 알젠테르의 복부를 가격했다. 알젠테르는 묵직한 기운이 실린 마하임의 일격에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잠든 것처럼 기절해 버린 알젠테르.
마하임은 그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눈을 뜨시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을 겁니다.”
마하임은 뒤돌아섰다. 그리고 카마산과의 전투가 기다리는 아르케비니아 왕궁으로 다시금 돌아갔다.
그렇게 마하임의 반격은 시작되었다.
* * *
아르케비니아 왕궁으로 돌아온 마하임. 이미 병사들은 궁내에 잔뜩 깔려 있었다. 마하임은 싸우기 좋은 공간부터 물색하기 시작했다.
너무 넓어서도 너무 좁아도 안 됐다. 카마산이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기에 불편한 곳이어야만 했다.
여러 장소를 물색해 보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곳은 다름 아닌 추모관이었다.
게다가 아르케비니아의 국법상 국왕의 시신을 손상시키는 자는 극형에 처한다는 법도 있었다.
물론 카마산에게는 그다지 효력은 없겠지만, 그래도 국왕의 시신 앞에서 싸운다면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후, 아버지.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서 유감입니다.”
마하임은 죽은 듯 관에 누워 있는 자신의 아버지, 카리고나 2세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하임의 아버지가 맞긴 했지만, 마하임은 단 한 번도 그를 자신의 아버지라 생각지 않았다.
그는 마법과 여자밖에 모르는 아버지로서는 최악의 사람이었다.
마하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그리고 왕위 계승권 문제로 자신의 아들딸들이 수도 없이 죽어 나가는 데도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그는 국정 모두를 재상 카마산에게 맡겨 놓고 마법과 여자만 탐할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 지옥이 완성된 것이다.
“오~! 여기 계셨구려. 마하임 왕자님. 한참이나 찾았답니다.”
병사 수십 명과 함께 카마산이 추모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마하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또 알젠테르 왕자와 함께 야반도주라도 한 줄 알았습니다.”
“말하고 싶은 것이 뭐냐? 카마산.”
마하임은 카마산을 노려보며 말했다. 카마산은 마하임의 말을 듣고서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핫! 많이 변하셨군요, 마하임 님. 예전에는 제 말에 말대꾸조차 못 하시던 분이 말이죠. 대체 윈드시크릿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네가 알 필요는 없지. 용건이나 말해라. 나는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걸 제일 싫어하거든. 하긴 굳이 말할 것도 없겠지. 병사들까지 끌고 온 것을 보면 말이야.”
마하임은 허리에 차고 있던 오페라를 뽑아들었다. 이를 본 카마산의 얼굴은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명색이 왕자라 편안히 죽여 드리려고 했는데…. 이거 생각을 바꿔야겠습니다.”
“하, 누구 마음대로? 네놈 생각처럼은 안 될 거다, 카마산.”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인데, 좋습니다. 우선 제 병사들부터 쓰러트려 보시죠. 그럼 인정은 해 드리겠습니다.”
카마산의 신호와 함께 중갑옷을 입은 창병들이 마하임을 포위하듯 둘러쌌다. 마하임은 피식 웃으며 창병들에게 말했다.
“여기에 국왕 페하의 시신이 있는 건 너희도 잘 알 거다. 혹여나 실수해서 국왕 페하의 시신에 상처가 난다면, 너흰 죽은 목숨이다. 그게 아르케비니아 법이니까.”
마하임의 말에 창병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 법이 아니라도 국왕의 폐하의 시신 앞에서의 전투라니, 꺼림칙한 게 사실이었다.
“하핫. 아르케비니아의 법? 이제 그딴 법은 의미가 없습니다. 원래는 알젠테르 왕자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실세로서 아르케비니아를 다스리려고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마하임 왕자를 죽이고, 알젠테르 왕자까지 죽여서 아르케비니아를 제 나라로 만들 겁니다. 카마산 왕조가 시작되는 것이죠. 하하하핫!”
병사들은 굳은 듯 서 있었다. 마하임은 카마산을 노려볼 뿐이었다.
카마산의 말은 그다지 새로운 것도 없었다. 이미 아르케비니아의 실질적 지배자는 카마산이라는 것은 지나가는 아이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금에 와서 그가 왕좌에 앉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헛소린 그만하고 우선 나부터 죽여 보시지. 할 수 있다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