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카마산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소피아는 엑스칼리버를 향해 맹렬히 달려왔다.
구울은 통증을 모른다. 그리고 공포심도 없었다. 거기에다 오러까지 사용하는 구울은 웬만한 마장기를 능가하는 괴물이었다.
기이이잉!
소피아의 검은색 검에서 또다시 새하얀 오러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오러 익스플로전의 전조. 이번 것은 지난번보다 더 강력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너무 가까워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뿐이었다.
‘나는 엑스칼리버를 믿는다!’
그 미래에서는 엑스칼리버 한 대가 수백 대의 마장기를 상대해 승리했다.
지금 여기서 한낱 구울에게 패배한다면 엑스칼리버라는 이름이 울 것이다.
마하임은 쏟아지는 오러 익스플로전을 뚫고 그대로 소피아를 향해 달렸다.
“어림없습니다. 소피아!”
퍼억!
카마산의 외침과 동시에 소피아는 오러 익스플로전을 거두고 검신의 면으로 엑스칼리버의 배를 후려쳤다. 엑스칼리버는 마치 종잇장처럼 튕겨 벽에 처박혔다.
[손상률 5.1% 대충격 방어 실드 관성 제어 장치 정상 작동 중. 전투 속행 가능.]
보통의 마장기라면 이 일격에 두 동강이 났겠지만, 마하임의 마장기는 그 보통의 마장기가 아니었다. 현재는 공격 능력을 대부분 상실했지만, 방어력 하나만큼은 여전히 건재했다.
“놀랍군요. 그 공격을 받고도 움직일 수 있다니. 그 마장기, 가지고 싶어졌습니다. 소피아. 저 마장기를 파괴하지 말고 탑승자만 끌어내라.”
소피아의 심장을 움켜쥔 카마산은 소피아에게 새로운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자 굳은 듯 멈춰 있던 소피아가 다시금 움직였다.
파팟-!
역시나 그 움직임은 육안으로 따라 잡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반면 엑스칼리버의 움직임은 둔하기 그지없었다.
마장기의 무게도 무게였지만, 아직 마하임이 완벽하게 엑스칼리버를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엑스칼리버, 좋은 방법 없을까? 지금 이대로라면 버틸 수는 있어도 이길 수는 없다.”
[요청 확인. 나노머신 시류와 동기화 완료. 대 파워드 슈트 근접 전투에 필요한 지식을 사용자의 뇌에 다운로드하겠다. 갑작스러운 두통이 있을지 모르니 유의하라.]
파지직-!
마하임은 순간 머리가 터져 나가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뒤로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방대한 지식. 그것은 기존의 학습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경지를 일순간 마하임에게 부여했다.
“하아, 하아. 꽤나 거친 수업이군.”
[전송 완료. 전투를 속행한다.]
마하임은 엑스칼리버의 몸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마치 마하임의 몸과 완전히 일체된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하임은 자신의 머릿속에 넘쳐나는 ‘정보’를 이용해 다시금 소피아 앞에 섰다.
“호오, 움직임이 꽤 좋아진 것 같군요. 허나 제 소피아의 상대가 될까요?”
카마산은 비웃듯 말하며 마하임을 내려다보았다. 소피아의 검에서는 다시금 오러가 일렁이고 있었다. 마하임은 호흡을 다잡았다.
이보다 훨씬 위험한 역경도 그는 견뎌냈고, 또한 여기까지 왔다.
마하임은 망설임을 버렸다. 소피아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지만 지금 마하임이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완전히 파괴해 카마산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뿐이었다.
“카마산, 널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웃기군요. 용서는 승자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패배자인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소피아의 심장을 움켜쥐는 카마산. 그러자 소피아는 괴로운 듯 몸을 움찔거리더니 오러 익스플로전을 마하임에게로 날렸다.
푸화확-!
지금껏 본 그 어떤 오러 익스플로전보다 크고 강렬한 기운이 마하임의 엑스칼리버로 쏟아졌다.
방금 전 엑스칼리버의 움직임으로는 피하기가 불가능한 공격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휙! 스으윽!
마하임의 몸과 완전 일체화된 엑스칼리버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날아오는 오러 익스플로전의 위력은 실로 강력했지만, 마하임과 일체화된 엑스칼리버는 연속 회피 동작으로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호오, 제법입니다만, 피하는 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카마산이 명령을 내리자 소피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구울이 됐다고 하지만, 그녀의 능력은 상식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무리 탑급 오러 유저라고 해도 저런 식으로 오러를 남발한다면 5분도 못 버티고 자멸할 것이다.
‘어딘가 분명 약점이 있다. 리스크 없는 강한 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하임은 쉼 없이 공격해 오는 소피아를 관찰하며 엑스칼리버를 움직였다. 그리고 마하임은 깨달았다. 소피아의 움직임에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그렇군. 소피아는 창이 아니라 방패였던 거야. 방패의 역할은 지키는 것. 다시 말해 카마산 네놈을 노리면 되는 거였어.”
“큭, 아픈 데를 찌르시는군요. 하지만 가능할까요? 그 튼튼하기만 한 마장기로?”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마하임은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마장기를 탑승했을 땐 축지를 사용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지금이라면 사용 가능할 것 같았다.
마하임은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땅을 박찼다.
“축지!!!”
엑스칼리버는 튕겨지듯 카마산에게로 날아갔다. 카마산은 깜짝 놀라 공격에만 집중하던 소피아를 불러들였다.
쩡-!
엑스칼리버의 묵직한 펀치가 소피아의 몸에 직격했다. 문자 그대로 카마산은 소피아를 자신의 방패로 썼던 것이다.
소피아가 아무리 튼튼한 구울이라 할지라도 엑스칼리버와의 질량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엑스칼리버의 주먹에 직격한 소피아는 뒤로 튕겨 그녀의 뒤에 숨어 있던 카마산과 뒤엉켰다.
“커어억-!”
카마산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소피아는 카마산과 부딪힌 뒤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래. 역시 본체를 노리면 되는 거였어. 소피아의 강함은 인정하마. 하지만 그건 소피아가 강한 거지, 카마산 네놈이 강한 건 아니지.”
마하임은 차갑게 웃으며 쓰러져 있는 카마산에게로 다가왔다.
“이 천한 것이!!! 소피아!”
카마산은 다시 한번 소피아를 불렀다. 소피아는 마하임의 거친 일격에도 아무런 타격이 없는지 돌무더기 속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마하임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왔다.
‘마장기에 탔다는 생각은 버리자. 맨몸으로 싸운다고 생각해야 한다.’
마하임은 다가오는 소피아의 움직임을 읽었다. 빠르고 강력했지만, 못 피할 공격은 아니었다.
마하임은 몸을 옆으로 틀면서 소피아의 오러가 가득 실린 검을 피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소피아의 몸통에 돌려차기를 박아 넣었다.
퍼억-!
마장기 엑스칼리버의 무게는 약 1.5톤. 소피아의 몸무게 45kg.
애초에 체급에서부터 둘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단지 마하임이 초반에 고전한 이유는 엑스칼리버를 제어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마하임의 돌려차기를 맞은 소피아는 마치 끈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처박힌 뒤 다시금 허공에 떠올랐다.
“이 악몽을 끝내자, 소피아.”
퍼억!
마하임은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 소피아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발경!”
터엉-!
역시 엑스칼리버를 타고서도 발경은 사용할 수 있었다. 엑스칼리버의 질량과 마하임의 발경의 힘이 합쳐지자 그 위력이 수십 배는 강해졌다.
소피아는 마하임의 발경을 맞고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그리고 움직임을 멈췄다.
“마, 말도 안 돼!”
카마산은 경악했다. 자신의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만든 구울이 이토록 허무하게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일어나라! 소피아. 일어나란 말이다!”
카마산은 비명처럼 외치며 소피아를 다시금 조종하려 해 보았지만 소피아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퍽-!
급기야는 카마산이 들고 있던 소피아의 심장이 터져 버렸다. 그것은 곧 카마산의 술법이 완전히 해제되었음을 의미했다.
치이-
압축 공기 소리와 함께 엑스칼리버의 해치가 열렸다. 밖으로 나온 마하임은 멘탈이 붕괴되어 말조차 제대로 못 잇는 카마산 앞으로 다가갔다.
“사, 살려 주십시오, 왕자님. 제발! 이 나라를 지금껏 유지한 게 저라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없었다면 이 왕국은 이미 오래전에 망했을 겁니다!!”
무릎을 꿇은 카마산이 마하임 앞에서 양손을 모아 빌었다.
적어도 그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방탕하고 여색만을 밝히는 국왕이 지배하는 아르케비니아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모두 카마산의 노력 덕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르케비니아를 위해서가 아닌 카마산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도 그건 인정한다. 고맙다. 아르케비니아를 지켜 줘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죄가 사라지진 않지.”
마하임은 허리에 차고 있는 오페라를 뽑아 들었다. 카마산은 몸을 부르르 떨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이미 뒤범벅되어 있었다.
“소피아! 소피아를 인간으로 돌려놓겠습니다! 저라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제발….”
“날 웃길 생각이라면 그만둬라.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건 신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야! 난 할 수 있어! 시간만…. 그래, 시간만 주면. 내가 살려 줄 수…!”
마하임은 고개를 저었다. 설령 소피아를 인간 상태로 돌릴 수 있다 하더라도 그는 죽어야만 했다.
이 아르케비니아가 온전한 독립 국가로 남아 있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유언은 잘 들었다. 죽어라.”
오페라의 번뜩임과 함께 카마산의 목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카마산의 몸에서 솟구쳐 오르는 피. 마하임은 천천히 오페라를 갈무리했다.
“허무하군.”
쓰러져 있는 카마산을 바라보던 마하임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추모관은 소피아와 마하임이 싸운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천정 여기저기가 무너졌고 벽 역시 심하게 파손되어 카리고나 2세의 시신은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마하임은 시신을 찾아보려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그에게 딱 맞는 무덤일지도 몰랐다.
폭군의 최후가 아름다워서는 안 되는 법. 그것이 자신의 친아버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으으으….”
바로 그때 들려온 소리. 마하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소피아가 쓰러져 있는 곳이었다.
“이봐 괜찮아?! 이봐!”
마하임은 쓰러져 있는 소피아를 흔들며 말했다. 그러자 소피아는 희미하게 눈을 뜨며 말했다.
“당신은 누구?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나요?”
“난, 마하임. 네 아버지는 나의 신하다. 모두 안전하게 잘 있다.”
“그렇군요….”
소피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몸은 이미 생명의 기운이 다해 천천히 굳어 가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은 순전히 기적이라는 표현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버님께 전해 주세요. 소피아는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전해 주세요. 전 아무래도 아버지 곁으로 다시 못 돌아갈 것 같으니까요.”
소피아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더는 말을 잊지 못했다. 지금 이렇게 유언을 남긴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마하임은 소피아의 눈을 손으로 감겨 주었다.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녀의 명복을 빌어 주는 것이 전부였다.
“겨우, 한 발자국 뗀 셈인가?”
이로써 역사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카마산이 죽음으로써 아르케비니아는 이제 마하임의 형, 알젠테르의 것이 될 것이다.
마하임이 알고 있는 그 미래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일.
그 일을 마하임은 해내고 말았다. 지금부터는 그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