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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117화 (117/194)

117화

“정녕 윈드시크릿으로 돌아갈 것이냐?”

다음 날, 아르케비니아 성문 앞. 알젠테르가 마하임이 탄 마차 앞에서 말했다. 마하임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해야 할 소식도 있고 말이죠. 비록 희소식은 아니지만….”

마하임은 마차 뒤 칸에 실려 있는 소피아의 시신이 담긴 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젠테르는 아쉽다는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하임 네가 내 옆에서 도와준다면 더 없이 좋을 터인데….”

“아닙니다, 형. 아니 국왕 폐하. 국왕 폐하께서는 혼자서도 충분히 잘해 나가실 겁니다.”

마하임은 웃었다. 알젠테르는 마하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하임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은 알젠테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하임은 달라져 있었다. 순수하고 착했던 그를 아는 알젠테르는 마하임의 변화가 썩 달갑지마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알젠테르 자신도 변해야만 했다. 이 아르케비니아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알았다. 마하임. 내 최선을 다해 아르케비니아를 부흥시켜 보겠다.”

“그럼 전 이만.”

마하임이 탄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윈드시크릿, 마차를 타고 이틀은 꼬박 가야 할 먼 거리였다.

원래라면 호위 병력도 함께하는 것이 맞겠지만, 마하임은 이마저도 거부했다. 마하임은 그저 빨리 윈드시크릿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것이 지혜의 돌인가?”

납작한 정사각형의 금속 조각. 이 금속 조각은 아르케비니아 옥새 하단부에 박혀 있는 것이었다.

카마산을 제거한 뒤 알젠테르에게 부탁해서 의외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의 사용법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엑스칼리버에게 물어봤지만, 이것이 지혜의 돌이 확실하다는 사실밖에 알아낼 수 없었다.

“알타베르나로 돌아가서 안나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지혜의 돌을 장착하면 엑스칼리버의 활동 시간은 비약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레비’가 말한 ‘진실’이라는 것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에 마하임은 꽂혀 있었다.

과연 그 진실이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마하임의 마차 여행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날씨는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알젠테르가 준비해 준 마차는 안락했고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들도 모두 명마였다.

그렇게 이틀을 달려 마하임은 윈드시크릿에 도착했다.

“어? 웬 마차? 멈춰라!”

윈드시크릿의 성문을 지키던 휴이와 듀이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차 앞을 가로막았다.

낮에는 특별한 검문 없이 윈드시크릿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마차와 같은 특별한 것은 검문을 해야만 했다.

“둘 다 오랜만이다.”

“헉! 여, 영주님!”

“오신다고 기별은 해 주시고 오셔야죠! 놀랐잖습니까?”

휴이와 듀이는 눈이 동그래져 마하임을 맞이했다. 마하임은 곧장 성문을 지나 영주관으로 안내되었고 성안에는 마하임 영주가 돌아왔던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

마하임의 영지, 윈드시크릿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수천 명에 불과했던 영주민도 이젠 만 명이 넘을 정도로 늘어났다.

그리고 전쟁으로 파손되었던 성벽도 완전히 복구되어 대륙 그 어떤 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성이 되었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마하임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시장의 시찰을 나온 제페쉬였다.

제페쉬를 본 마하임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입을 닫고 있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마하임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 딸을 데려왔다. 제페쉬. 안타깝지만…. 내가 갔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갑작스러운 마하임의 말에 제페쉬는 말을 더듬었다. 마하임은 말없이 마차 뒷좌석에 실고 온 소피아의 관을 제페쉬에게 보여 주었다.

“…그렇군요. 예상은 했습니다만, 정말 이렇게 되어 버릴 줄이야.”

소피아의 관 앞에서 주저앉는 제페쉬. 카마산의 실험실로 딸이 끌려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것 역시도 알고 있었다.

“미안하다. 소피아…. 이 애비를 용서하거라. 다 이 애비의 잘못이다. 널 구해 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하구나.”

제페쉬는 울부짖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달려온 요한은 소피아의 시신을 보고 넋이 나간 얼굴로 말조차 못 하고 굳어 있었다.

잠시 후 세실과 아나모네, 하륜과 제난까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제페쉬의 애절한 절규가 윈드시크릿에 퍼져 나갔다.

윈드시크릿의 서산으로 태양은 천천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약속된 어둠이 찾아왔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 * *

따스한 모닥불의 불빛이 가득한 방 안. 이곳은 알타베르나에 위치한 윈디의 집무실이었다.

“역시 밤에 먹는 녹차가 최고다요.”

윈디는 엘케인이 타 온 녹차를 홀짝 홀짝 마시고 있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엘케인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왜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겁니까?”

“뭘 말이다요?”

“마하임 님 말입니다.”

엘케인은 짧게 말했다. 윈디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에 한숨을 쉬듯 입을 열었다.

“운명이다요. 언제까지 현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요.”

“하지만 아직 인간들은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프로젝트의 완성이….”

“500년이다요!”

엘케인의 말을 끊고 윈디가 소리쳤다. 윈디는 화가 난 듯 온몸을 부르르 떨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실패한 것이다요. 지난 500년 동안, 우린 아무런 성과도 못 올렸다요. 그저 끝없이 도망만 치고 있을 뿐. 그렇지 않다요? 칼시엘.”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윈디가 말했다. 그러자 투명 마법으로 몸을 숨기고 있던 칼시엘이 마법을 풀고 나타났다.

“여전히 감 하나는 좋군요. 윈디 님.”

“내 밥줄이다요. 근데 이 밤에 관리자님께서 웬일이신지?”

“마하임이 엑스칼리버와 지혜의 돌을 손에 넣은 것은 아시죠?”

“그렇다요. 애초에 예상한 전개 아니다요?”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너무 빠릅니다. 윈디 님 권한으로 거기까지 간섭할 처지가 아니실 텐데요? ‘위그드라실’ 님이 아신다면 소멸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흥, 그따위 노친네, 내 알 바 아니다요. 소멸시키라면 시키라고 하라요. 난 나의 길을 간다요. 이미 그렇게 결정했다요.”

윈디는 잘라 말했다. 칼시엘은 그런 윈디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셨군요. 마치 인간들처럼 말입니다.”

“어리석기는. 우리 AI도 마찬가지다요. 지난 500년 동안 변한 게 하나도 없다요. 이래선 1000년이 지나도 레비아탄이 점령한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요.”

윈디의 말에 칼시엘은 입을 닫았다. 엘케인은 안절부절못하며 둘의 날 선 대화를 지켜볼 뿐이었다.

“전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뭘 말이다요.”

“당신이 위그드라실 님의 백업 시스템이라는 걸 말입니다.”

“신경 끄라요. 넌 관리자로서의 역할만 제대로 하면 된다요.”

“알겠습니다. 오늘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

칼시엘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처음과 마찬가지로 허공에 사라졌다. 물끄러미 사라진 칼시엘을 바라보던 윈디는 다시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 차다요. 다시 한 잔 부탁한다요. 엘케인.”

“네. 알겠습니다.”

엘케인은 찻잔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 윈디는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여기까지 왔다요. 부디, 인류에게 희망이 있기를….”

* *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제페쉬의 딸 소피아는 윈드시크릿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공동묘지에 묻혔다.

조용히 진행된 장례식. 제페쉬는 더는 울지 않았다. 그저 황망히 자신의 딸의 마지막을 지켜볼 뿐이었다.

장례식은 차분하고 조용하게 끝났다.

“돌아가면 영지 회의를 열겠다. 어찌 되었건 살아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

마하임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냥 슬퍼하기에는 그들의 앞에 남은 일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영주관 안. 조촐한 아침 식사와 더불어 회의가 시작됐다.

“음, 일단 정기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영지민이 지난달보다 5000명 더 늘었습니다. 최대한 정착 지원을 해 주고 있지만, 인력난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하륜은 블랙커피를 홀짝거리며 마하임에게 보고했다. 마하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닝빵 하나를 입에 집어넣었다.

“설탕 유통은 잘 되어 가나.”

“네, 그것은 저 제난이 맡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설탕 유통을 시오니아 제국에서 묵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문제 없이 유통은 되고 있지만, 그래도 보는 눈이 많기에 정상적인 유통보다는 암시장을 통한 유통을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제난의 보고에 마하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윈드시크릿의 설탕 유통은 어느 정도 정착을 한 것 같았다. 이주민들을 동원해 설탕 재배, 정확히는 사탕무 재배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덕분에 윈드시크릿의 세수는 이전의 10배 이상 증가했고 이것은 고스란히 윈드시크릿의 요새화와 주민들의 편의 시설 확충에 모두 재투자되고 있는 중이었다.

“예산이 좀 남아서 고대인들의 상수도 시설을 좀 흉내 내어 봤습니다. 아직 시범 사업이지만, 수돗물 공급망은 완성 단계라 이제 평민의 집에서도 물을 바로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하륜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발달한 시오니아 제국에도 아직 상수도 시설이 없어 평민들은 우물물을 길어 먹어야만 했다.

그런데 일개 영지가 상수도를 만들어 개개인의 집마다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다니, 이것은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아, 요즘 바빠 미치겠다니까. 하륜이 이 일 저 일 다 벌여 놔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

과로를 해서인지 푸석푸석해진 자신의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만지며 세실이 투덜거렸다.

“급료는 충분히 지불해 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애초에 당신이 할 수 있다고 해서 맡긴 겁니다.”

“윽! 그렇게 많이 맡길지는 몰랐지!”

하륜의 말에 세실은 발끈하며 외쳤다. 세실은 요한과 함께 윈드시크릿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외지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들이 많아져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 사고를 처리하다 보니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영주님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또 알타베르나로 돌아가실 생각입니까?”

묵묵히 스프를 떠먹던 제페쉬가 말했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우울함이 느껴졌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

일하는 데 있어 자신의 감정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그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있다. 그 문제만 해결하면 돌아올 생각이다.”

솔직히 하륜에게 영지를 맡겨 놓고선 너무 방치한 느낌도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다행히 하륜이 딴 맘을 먹지 않고 영지를 잘 관리해 주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윈드시크릿은 이미 오래전 망했을 것이다.

“그럼 언제 돌아가나 주인.”

아나모네는 내심 아쉬운 듯 마하임의 곁에 다가와 말했다.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검은 두건과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색 슈트를 입고 있었다.

“내일쯤 가 볼 생각이다.”

“그냥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나? 주인이 없는 윈드시크릿은 싫다.”

고개를 떨어트리는 아나모네. 마하임은 말없이 몸을 일으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곧 돌아올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알았다. 주인.”

아나모네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마하임은 다시 앉아 먹다만 고기 조각을 입 안에 털어 넣고서는 말했다.

“간만에 영지 시찰이나 해 볼까? 다들 준비해서 따라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아, 귀찮은데…. 뭐 까라면 까야겠지.”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서로의 대답은 조금씩 달랐지만, 마하임은 자신의 영지가 이제야 제대로 자리를 잡아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아직 할 일도 많고 해결할 문제도 산더미 같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밖으로 나가자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그쳐 있었다.

구름 사이로 비춰 오는 따스한 햇살. 윈드시크릿에도 천천히 봄이 찾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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