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윈드시크릿의 서쪽에는 은혼의 숲이란 금단의 지역이 있었다.
마하임이 오기 전에는 온갖 몬스터와 괴물들의 소굴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키에에엑 키에에엑!~ 마하임 왔다.”
“친구다. 키에에엑.”
마하임이 로어하피와 동맹을 맺고, 이 은혼의 숲은 그들의 둥지가 되었다.
그리고 로어하피들은 빠르게 이곳을 장악했고 그토록 포악하고 많았던 몬스터의 수도 급격히 감소했다.
그래서 지금은 윈드시크릿의 주민들도 가끔 찾아와 약초를 캐는 것 정도는 가능한 숲으로 바뀌었다.
“붉은 바람의 눈을 보러 왔다. 어디에 있지?”
마하임은 자신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로어하피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쾌하게 지저귀던 로어하피들의 마하임의 말을 듣고선 이내 조용해졌다. 그리고 로어하피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크에엑, 족장 다쳤다. 검은 둥지 나무에서 쉬고 있다. 크에에엑.”
“그곳이 어디지? 안내해!”
“크엑 따라와라. 크에에엑!”
로어하피들을 따라 마하임은 곧장 은혼의 숲 깊숙한 곳까지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숲 중앙에 1000년은 넘어 보이는 검은색 고목 아래 몸을 웅크리고 있는 로어하피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크륵, 왔나? 마하임. 어쩐지 그리운 냄새가 난다 했더니 너였군.”
붉은 바람의 눈은 몸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붉은 바람의 눈의 역방향으로 기괴하게 꺾인 날개였다.
“너…. 날개가?!”
“크르르르, 그래. 난 더는 날지 못한다. 나의 시대는 끝났지.”
“누구지? 누가 널 이렇게 만들어놨지?”
“…한 달 전이었다. 크르릉.”
붉은 바람의 눈은 고개를 들어 지난 달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그녀의 일족은 빠르게 은혼의 숲을 장악했다. 위험은 몬스터들은 몰아내고, 함께 공생할 만한 몬스터와는 협력을 하는 등, 은혼의 숲을 생태계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잘되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난 달, 한 무리의 오우거가 이 숲에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키 3미터, 근력은 로어하피를 가볍게 능가하는 이족 보행 생명체 오우거. 거기다 간단한 도구까지 사용하는 이들은 은혼의 숲에서 닥치는 대로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붉은 바람의 눈은 처음에는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오우거는 지능이 높은 종족이라 어느 정도 의사소통도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과의 대화는 실패했다. 그리고 벌어진 두 종족과의 전쟁.
처음에는 하늘을 날 수 있는 로어하피들이 유리했지만, 도구를 사용하는 오우거에게로 점점 승기는 넘어갔다.
그리고 급기야는 로어하피들의 부족장, 붉은 바람의 눈이 치명상을 입으며 로어하피들은 숲 깊숙한 곳으로 밀려나 버리고 말았다.
“우선 날개를 좀 보자.”
“크르릉, 무리다. 이미 부러진 지 오래되어 상처에서는 벌레까지 나온다.”
붉은 바람의 눈의 날개에 난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날개 뼈가 부러지며 피부 밖까지 뚫고 나와 있었다. 이대로는 날기는커녕 이 상처로 인해 죽을지도 몰랐다.
“오페라. 치료할 수 있겠나?”
[스캔 중…. 스캔 완료. 이론상 가능합니다. 마하임 님의 피에는 고농도 나노머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하임님의 피 400ml을 해당 생명체의 상처에 바른 후 뼈를 원래의 형태로 맞추어만 주시면 신속하게 치료 가능합니다.]
마하임은 지체 없이 붉은 바람의 눈에게로 다가갔다.
“우선 뼈를 맞춘다. 아파도 참아라.”
“크르릉. 네게 맡긴다. 친구여.”
순순히 날개를 내미는 붉은 바람의 눈. 그녀의 동족들은 조용히 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하임은 붉은 바람의 눈의 날개를 양손으로 잡고 오페라가 알려 주는 대로 뼈를 맞추었다.
우드드득.
키에에엑!
고통에 몸을 움찔거리는 붉은 바람의 눈. 하지만 발버둥은 치지 않았다. 마하임은 즉시 다음 처치에 들어갔다.
“다음은 피 400ml.”
마하임은 자신의 팔뚝을 내밀어 오페라로 상처를 냈다. 피 400ml는 꽤 많은 양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생명의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마하임의 피는 이미 썩어 가는 붉은 바람의 눈의 날개를 적시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마하임의 피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하나로 뭉쳐지더니 날개에 난 상처 속으로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조직 복원 중. 파손된 뼈 처리 중. 골절 부위 봉합 중…. 치료 완료 예정 앞으로 5분]
붉은 바람의 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날개가 뽑혀 나갈 것처럼 아팠는데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 힘도 들어가지 않았던 날개에 다시 힘을 줄 수 있었다. 날개를 살짝 움직여 보는 붉은 바람의 눈.
“움직일 수 있다. 다시 날 수 있다. 키에에엑!”
기뻐 외치는 붉은 바람의 눈.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바람의 눈의 상처는 거짓말처럼 아물었다. 붉은 바람의 눈은 날개를 퍼덕여 펄쩍 하늘로 날아올랐다.
“키에에에엑-!”
하늘을 종횡무진으로 날아다니는 붉은 바람의 눈. 마하임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하임의 팔에 난 상처는 이내 아물었다. 마하임은 다시 한번 고대인의 기술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푸억 푸덕 촤아악!
하늘을 날던 붉은 바람의 눈은 마하임의 곁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마하임을 향해 말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 나의 친구여.”
“신경 쓰지 마라. 너희를 이곳에 불러들인 것은 나다.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마하임은 붉은 바람의 눈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붉은 바람의 눈은 그런 마하임을 자신의 날개로 꼭 품어 주었다.
“너와 같은 수컷이 남아 있었다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씁쓸하게 말하는 붉은 바람의 눈. 마하임은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그 오우거들은 어디 있지? 한번 만나 봐야겠다.”
“안 된다. 마하임. 그놈들은 포악하고 위험하다!”
펄쩍 뛰며 마하임을 말리는 붉은 바람의 눈. 하지만 마하임은 결심한 뒤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만나야지.”
마하임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살기를 애써 누르며 말했다.
‘감히 내 영지의 내가 선택한 영지민을 건드려? 가만히 둘 수 없다. 그것이 오우거라면 더욱이.’
윈드시크릿 인근에 오우거가 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렇다면 붉은 바람의 눈을 다치게 했다는 오우거는 외래종이 확실했다.
붉은 바람의 눈조차 다치게 만들 정도의 오우거라면 강함은 물론이며 영악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우거는 인육을 먹는 것으로 유명한 몬스터였다. 만약 대화가 안 통한다면 빠른 척결만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안내해 줘. 윈드시크릿에 피해가 생기기 전에 정리해 두고 싶다.”
“크르르릉. 좋다. 여차하면 우리 무리 전부를 동원해 놈들과 싸우겠다.”
흥분한 붉은 바람의 눈이 외쳤다. 다른 로어하피들도 포효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런 로어하피를 바라보던 마하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내만 해 줘. 싸우는 것은 나 혼자 한다.”
“케에엑. 이길 수 없다. 놈들은 강하다. 사악하다.”
“이길 수 있다. 나를 못 믿는 거냐?”
마하임은 붉은 바람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붉은 바람의 눈은 마하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숨을 길게 쉬었다.
“하아…. 나의 친구여, 그대의 강함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이럴 것까지는 없다.”
“걱정 마라. 너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마하임은 이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마하임이 이미 결심을 했다는 것을 안 붉은 바람의 눈은 날개를 퍼덕이며 말했다.
“키에에엑, 타라. 내가 직접 안내해 줄 것이다.”
마하임은 훌쩍 뛰어 붉은 바람의 눈의 몸에 올라탔다. 붉은 바람의 눈은 하늘 위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거친 날갯짓으로 창공을 향해 단숨에 솟아올랐다.
* * *
은혼의 숲 최남단. 그곳에는 작은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닥불을 중심으로 10여 마리의 키 3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오우거가 모여 있었다.
“나시무스, 정찰을 완료했다.”
“수고했다, 토카마. 시오니아 제국의 동태는?”
“추격의 조짐은 없다. 유난히 하피들이 시끄럽게 우는 것 빼고는.”
그들은 통일해 맞춰 입은 듯 회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오우거가 지능이 높긴 하지만 여타 몬스터보다 높다는 것이지, 갑옷을 만들고, 창이며 검 같은 병장기를 착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고도로 훈련된 군대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벌써 3주가 지났다. 시오니아 제국의 추적은 여기까지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말했을 텐데, 속단하지 말라고. 제국은 끈질기다.”
나시무스는 모닥불에 나뭇가지 몇 개를 더 던져 넣었다.
그들의 출신은 시오니아 제국 이종족 특무대 ‘엘카’. 나시무스는 그들의 대장이자 이번 탈영을 주도한 오우거였다.
“대장. 그 하피한테 당한 상처는 좀 어떤가?”
나시무스의 부관 토카마는 나시무스의 오른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피까지 맺혀 있었다.
“내가 방심했다. 그렇게 크고 강한 로어하피가 이곳에 있을지는 예상치 못했다.”
“아니다, 대장. 우리가 제멋대로 로어하피를 사냥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후, 지금에 와서 잘잘못을 따지는 건 의미 없다, 토카마. 모두 살아 있으면 그것으로 된 거야.”
나시무스는 토카마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미소 지었다.
그들은 가르샤의 생체 병기 제조장에서 태어나 제국에 팔려 10여 년간 온갖 위험한 작전에 끌려 다니며 소모품으로 사용됐다.
처음에는 50마리가 넘는 큰 무리였지만, 지금 남은 오우거는 겨우 10마리. 그것도 대다수 크고 작은 상처로 전투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어쨌든 자유란 좋은 거다. 억지로 싸울 필요도 없고.”
이곳, 은혼의 숲으로 온 나시무스의 무리는 비교적 평온하게 지내고 있었다.
은혼의 숲에는 토끼나 멧돼지 같은 야생 동물도 풍부했고, 무엇보다도 숲이 우거져 은폐할 곳이 많아 안심하고 숨어 있을 수 있었다.
단지 일부 배고픈 오우거들이 로어하피를 사냥하려다 그들의 우두머와 전투가 있었던 것 말고는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 나시무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쉿! 누군가 온다! 모두 경계 태세!”
나시무스의 외침에 토카마를 비롯한 오우거들은 재빨리 병장기를 챙겨들고 흩어졌다.
나시무스는 자신의 예민한 귀에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저것은 분명 로어하피의 날갯짓 소리였다.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파공음이 정확히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째서 로어하피가 이곳에?!”
토카마는 창을 손에 들고 긴장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느 로어하피보다 2배는 거대해 보이는 하피가 천천히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나시무스. 창으로 요격해야 하나?”
“…아니 불필요한 교전은 줄인다. 일단 지켜보자.”
그들의 적은 시오니아 제국이지, 야생 로어하피가 아니었다.
로어하피가 무척 뛰어난 지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시무스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로어하피는 집요한 복수자로 유명했기에 괜한 충돌은 원치 않는 피를 부를 뿐이었다.
츄화확 푸덕푸덕.
로어하피 한 마리는 정확히 오우거들이 피워 놓은 모닥불 앞에 앉았다. 그제야 나시무스는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인간이 타고 있다?’
로어하피가 인간을 태운다니, 그런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로어하피는 용맹하고 절대 길들일 수 없는 종족이었다. 그런 로어하피를 타고 온 인간이라니, 보통의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여기에 있는 것 다 알고 있다. 오우거! 모습을 드러내라!”
오우거만이 알고 있는 고어가 인간에게서 들려왔다. 어떻게 인간이 저 언어를 알고 있는지 의문이었지만, 그는 나시무스의 무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문답무용인가? 그럼 일단 눈에 띄는 녀석부터 박살 내 볼까?”
나시무스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인간이 자신의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