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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130화 (130/194)

130화

빛의 땅, 잿빛의 하늘, 모든 것이 잿빛으로 물들여진 세계….

금빛 머리칼의 소년이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달려도 끝없이 펼쳐진 이곳. 너무나 친숙하면서도 너무나 싫은 이곳….

왜, 무엇을 위해 달려야 하는지, 그 목적마저 상실한 채 금발의 왜소한 몸집의 소년은 이 단조로운 세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만 제발, 그만, 난, 난 할 수 없단 말야!”

소년은 소릴 질렀다. 누구에게 향한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소리 지르고 또 부르짖었다.

그의 눈에는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새하얗게 반짝이는 눈물이 끊임없이 그의 새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서 도망치는 것인가?]

어디선가 들려온 또 다른 소리…. 그러나 이 소리는 소년의 목소리와는 달리 사람의 소리라 보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소년은 조금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이 소리 속에서 소년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친근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목소리가 아무리 친근하다 하더라도, 금발의 소년은 이 소리가 너무나 싫었다.

소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전보다 더 히스테릭하게 소릴 질렀다.

“도망치는 것이 어때서? 난 싫어! 그리고 능력도 없어! 그래서 도망치는 거야. 그게 어때서? 뭐가 잘못됐냔 말야!”

마치 상처 입은 맹수처럼 울부짖으며 소년은 아무리 달려도 끝을 알 수 없는 이 잿빛의 세계를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럼 도망치고 난 다음에는?]

소년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이 잿빛으로 충만한 땅 위에 주저앉았다.

그의 뺨을 적시는 은빛 물줄기는 이젠 조그마한 샘을 연상시킬 만큼 쉬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이것을 닦을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알아! 나도 알고 있어! 언제까지나, 도망만 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난 할 수 없었어. 아무리 노력해도! 이젠 나도 지쳤어. 모든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너무나…. 무거워.”

너무나 슬픈, 그리고 가슴이 매어질 것 같은 아픔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마하임은 눈을 떴다.

아니 뜰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부어서 제대로 주위를 살피기도 어려웠지만, 눈을 뜬 마하임에게는 자신이 원하건 원치 않건 현실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꿈이었군…. 빌어먹을!”

그는 자신의 선장석 정면에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는 초공간 항해도를 마치 휘어잡으려는 듯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최신의 홀로그램 장치로 허공에 펼쳐진 이 영상은 손에 잡힐 만한 것이 아니었다.

“후.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 버렸을까?”

허무하게 초공간 항해도의 영상을 가로지른 손을 바라보고는 그는 고소했다.

마하임이 지금 하려는 일은 자칫 잘못하면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 수도 있었다.

원래의 계획은 초공간 안에서 자신이 직접 예언된 ‘레비아탄’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연구해 보아도 레비아탄의 정보는 얻을 수 없었고, 진짜 실존하는지조차 지금으로서는 애매했다.

“조용하군.”

유사 블랙홀 내부의 초공간. 초공간 안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공간에 진입한 모든 것은 빛의 속도 이하로 떨어질 수가 없었다. 즉 지금 이벤트 호라이즌은 빛의 속도로 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벤트 호라이즌의 내부는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이벤트 호라이즌의 1차 목적지는 ‘알파센타우리’ 성계.

지구에서 수백만 광년 떨어진 곳이었지만, 이벤트 호라이즌이라면 단 3일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인 우주선으로는 별 탈 없이 알파센타우리 성계에 도착해 이 유사 블랙홀 항법의 안정성은 증명되었지만, 사람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떤 문제가 생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없이 순조롭게 항주는 계속되고 있었다.

“모두 자는가 보네.”

어느 정도 잠이 깨자 마하임은 자신의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허겁지겁 얼굴을 닦았다.

자신이 왜 울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런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 주기는 싫었다.

하지만 마하임의 이런 걱정은 기우에 불가했다. 항해사 아루시안은 그 장대한 기골에 어울리지 않게 잔뜩 몸을 웅크린 채로 가끔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리고 원래 불침번을 서야 하는 마카 역시도 언제 잠들었는지는 몰라도 코 고는 소리가 마하임의 귓가까지 들려왔던 것이다.

“깨워야 하나?”

마하임은 초공간 도약 직후 있었던 마카와 아루시안과의 대화를 떠올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 이들과 만났을 때부터 항상 서로를 못 잡아먹어 으르렁대는 듯했지만, 그 속에 악의가 없다는 것쯤은 마하임도 잘 알고 있었다.

마하임은 마카를 깨우려다 관두고 마카의 콕핏을 수면 모드로 전환시킨 다음 자신의 선장석으로 돌아왔다.

마하임이 선장석에 앉자 타원형의 선장석은 곧이어 부력을 회복하여 지면과 약 2미터가량 떨어진 허공에 멈추었다.

선장석이 완전히 정지하자 그 즉시 각각의 항해 상태, 그리고 현재까지 기내에서 발생한 몇몇의 사소한 사고 등이 컴퓨터 정면 상단에 홀로그램 영상으로 나타났다.

뭐 특별한 일은 없었다. 선내의 오물 정화 시스템이 약간 불안정한 듯했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것을 고칠 만한 기술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이 완전 정지하더라도 항주에는 크게 지장이 없었기에 마하임은 묵묵히 다른 관제 장치로 눈을 돌렸다.

“잠깐…. 뭐지? 이건?”

마하임의 눈이 다시금 초공간 항해도에 향했을 때, 그는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잠을 막 깨었을 때는 그냥 무심코 지나갔지만, 지금 이 항해도에 나타난 대로라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초공간의 특성상 위치라는 개념이 명확하지 않아서 진행 방향 정도밖에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가 이벤트 호라이즌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긴급 상황입니다. 승무원 여러분 깨서는 일련의 비상사태에 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마하임이 막 마카와 아루시안을 깨우려고 할 무렵 그제야 경보 시스템이 작동했다.

귀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시끄러운 경보 메시지는 일순간 이곳을 가득 채웠다.

“왜 주조종실에 저런 음파 병기가 장착되어 있는 거지? 여긴 전쟁터가 아니란 말이야!”

이 소리는 단잠에 빠져 있는 마카를 단숨에 눈을 뜨게 만들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그는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앞뒤 문맥도 잘 맞지 않는 말로 궁시렁거렸다. 그러나 그의 이런 여유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마카의 바로 건너편 콕핏에서 아루시안이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마카 님에게는 제가 대신 불침번 서 준다고 했습니다. 마침 잠도 안 오고 해서 말이죠. 그리고 지금 이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 쓸 때가 아닙니다. 이것을 한번 보시죠.”

선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마하임은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린 뒤 초공간 항해도를 마카와 아루시안의 콕핏으로 전송시켰다.

아루시안은 아무래도 못마땅한 듯 한참 동안 마카를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마하임이 전송시켜 준 초공간 항해도를 자신의 모니터로 출력시켰다.

“아루시안…. 이건, 미티어 맞지?”

전송된 자료를 한눈에 훑어본 마카는 아루시안의 눈치를 봐 가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루시안은 여전히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러나 아루시안은 사소한 감정을 앞세워 공무를 무시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지금 상황을 파악해서 마하임에게 보고했다.

“질량 불명, 크기 불명의 미티어로 보이는 유동 물체가 본선을 향하여 접근 중입니다. 현재 속도는 ‘웹2’.(광속의 단위. ‘웹2’는 광속의 2배를 뜻함.)

진행 방향 및 속도를 고려할 때 약 20분 전후를 기준으로 92.12%의 확률로 본선과 충돌할 것으로 보입니다. 항주 조례 1조 4항에 의거해 통산 공간으로 긴급 회피를 건의합니다.”

“메카닉, 동의합니까?”

“동의 안 할 수 없잖아. 초공간 항주 중 이 배의 1/1000 정도의 질량을 가진 물체라도 부딪히면 그것만으로도 괴멸이라고.”

마카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마하임에게 말했다.

항해법의 절차상 동의를 구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만, 이것을 달리 해석한다면 ‘자살할래, 말래.’ 하는 식의 물음과 같았다.

어쨌든 이벤트 호라이즌은 꼼짝없이 통상 공간으로 잠시 회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은 그리 흔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드문 일이라고 말하기도 곤란했다.

무인 우주선 실험 중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몇 번 있었고, 심지어는 이 미티어와 충돌해 행방불명된 무인 우주선도 있었다.

“선내 승무원 전원 동의함으로 본선은 03시 40분을 기해 통상 공간으로 일시 회피하도록 하겠습니다. 핵추진 엔진 일시 중지.”

마하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명령을 내렸다. 이것 역시 형식상의 절차에 불가했지만, 이것을 따르는 것도 선장에게 주어진 몇 안 되는 일거리 중 하나였다.

“핵추진 엔진 중지. 이벤트 호라이즌 웹1로 고정되었습니다.”

“통상 공간 이탈용, 유사 블랙홀 생성 미사일 잔탄, 200. 제2탄 발사 준비 완료!”

“제2탄 발사.”

“제2탄 발사!”

경쾌한 마카의 외침과 동시에 미사일이 이 공허로 가득 찬 세계를 향하여 힘차게 솟구쳐 올랐다.

첫 1탄 발사 때처럼 2탄 발사도 동일한 30여 발이 연사되었지만, 제2탄의 미사일 구조는 1탄과 사뭇 달랐다.

1탄에 비하여 그 크기도 3배 이상 컸고 모습도 막대형의 1탄과 다르게 완벽한 구형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초공간 안의 모든 물체의 진행 속도는 아무리 느려지더라도 빛의 속도 이하로 느려질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그보다 느려진다면 그것은 곧 소멸을 의미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곳에 통상 공간의 관성이란 것이 적용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초공간 내에서 사용하는 미사일에는 관성 제어 필드, 그리고 최소 웹2 이상의 추진을 위한 엔진이 장착되어 있어야지만 ‘발사’가 가능한 것이다.

“유사 블랙홀 반응 확인. 30초 후 통상 공간으로 진입합니다. 지금부터 모든 작업은 자동 항법 장치로 처리하겠습니다.

통산 공간 진입 시 좌표상 위치는 통합 좌표 기준 90.21.00. 지구 기준 10.00.20. ‘심연의 포효’ 성계 입니다.”

아루시안은 침착하게 통상 공간 진입의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것을 알려왔다. 이렇게 된다면 알파센타우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며칠이 더 걸릴지도 몰랐다.

“이러면 예정보다 도착 예정 시간이 꽤나 지연되겠지? 어휴 전날 밤도 그렇고 왜 이렇게 일이 꼬인다냐? 일단 다른 승무원이 타고 있는 구역에는 안내 방송을 보냈고…. 빌어먹을 미티어…. 미티어!!!”

투덜거리던 마카는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지금까지 일정한 속력으로 전진하던 이 정체불명의 미티어가 갑자기 급가속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가속이 아니라 순간이동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채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웹2에서 웹4로 순간적으로 가속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더욱이 놀라운 점은 이 가속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미티어 급가속! 현 속도 웹4…. 아니 웹6. 가속 계속 진행 중입니다!”

아루시안은 초공간 항해도가 나타내는 이 황당한 사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초공간상의 한계 속도는 웹5. 그러나 이것 역시 정체불명의 미티어가 남긴 기록상의 수치일 뿐이었다.

지금의 이벤트 호라이즌이 최고 속도를 낸다 하더라도 이 속도의 절반 정도가 한계였다.

그러나 지금 이 미티어는 지금까지 초공간상에서 발견된 그 어떠한 물체도 넘지 못한 금단의 속도를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뜨렸다.

“맙소사. 저 미티어, 가속 후 다시 항로를 수정하고 있어. 목표는! 이벤트 호라이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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