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자가 충전식 비상등이군. 나쁘진 않네.”
어둠 속에 갇혀 있다 빛을 보자 마하임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이 빛에 드러난 광경에 마하임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여긴 주조종실이 아니잖아?!”
여긴 화장실이었다. 이벤트 호라이즌에는 파일럿 외에도 각종 연구 기관에서 파견된 과학자들도 다수 탑승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화장실은 반드시 필요한 곳 중 하나였다. 문제가 있다면 마하임 자신은 이곳으로 온 기억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이 역류했나? 나사 최신의 우주선에 수세식 화장실이라니…. 나사 녀석들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뭐, 다행히 냄새는 안 나지만.”
마하임은 마치 물에 빠진 쥐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서 잘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속옷까지 몽땅 다 젖은 상태였다.
아마도 그 충격의 여파 때문에 정화조의 물이 역류한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도 역류를 계속하고 있는 모양인지 물 흐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이 정화조에 오물이 쌓여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오물이 쌓여 있는 상태에서 이런 일을 만났다면…. 마하임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올 것 만 같았다
“여기서 궁시렁댄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일단 여기의 위치부터 알아내야겠어.”
이벤트 호라이즌에는 약 6개의 화장실이 존재했다. 지금 마하임이 있는 곳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마하임은 희미한 비상등의 빛을 의지해 화장실의 출구로 향했다. 원래라면 그의 움직임을 감지해 자동으로 열리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문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역시…. 무언가 문제가 단단히 생겼나 보군. 어쩐다, 할 수 없지. 나사의 특수무기 개발부 녀석들의 장난감을 사용해 보는 수밖에.”
마하임은 자신의 바지를 고정시키고 있는 허리띠를 풀었다. 다행히 그의 바지는 마하임의 몸에 딱 맞춘 슈트 형태의 옷이었기에 허리띠가 없어도 아래로 흘러내리는 일은 없었다.
“이벤트 호라이즌 선장 마하임, 긴급 상황 발생으로 인한 나이프 기동 승인을 요청한다.”
그는 허리띠의 끝에 달린 클립을 양손으로 잡은 후 이렇게 외쳤다.
마하임의 이 소리는 곧바로 허리띠 내에 장착되어 있는 초소형 컴퓨터를 작동시켰다.
[삑. 음성 파동 구조 확인 중…. 확인되었습니다. 긴급 상황을 인정합니다. 초진동 나이프 기동. 타임 리미트는 10분입니다. 오버 타임 시 5분가량 사용이 불가하오니 유의 바랍니다.]
“뭐, 뭐? 초진동!?”
그의 귓속에 장착된 마이크로폰은 허리띠와 연동하여 그의 ‘무기’의 작동을 알렸다.
열선을 이용한 '고주파 나이프' 정도를 기대한 마하임은 초진동이라는 소리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것을 건네주던 특수무기 개발부 소장의 음흉한 미소를 볼 때부터 어느 정도 눈치는 챘지만, 이처럼 황당한 것일지는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부웅.
무언가 기분 나쁜 진동…. 그것은 초진동 나이프가 작동됨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의 허리띠는 미세한 방전을 일이키면서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처음엔 조금 흐느적거리기도 했지만 이내 허리띠는 마치 막대처럼 단단해졌다.
“특수무기 개발부 녀석들, 초진동 나이프라니!”
손끝으로 은은하게 전해져 오는 초진동의 여파를 느끼며 마하임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는 이론 물리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이것으로 만드는 신병기에 대해서는 매우 관심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초진동 병기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초진동 병기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 이유인즉 지금까지도 이 초진동을 견딜 수 있을 만한 물체가 없는 까닭이었다.
초진동 병기라는 것은 물질 본래의 특성을 유지하게 만드는 고유 진동이라는 것에 직접 간섭하여 물질 붕괴 현상을 일으키는 병기를 총칭한다.
문제는 이 초진동이라는 것이 컨트롤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초진동을 생성하기도 어려웠지만 막상 생성하더라도 그 동시에 초진동의 영향권의 안에 있는 모든 물체는 붕괴되고 말았다.
다시 말하자면 자폭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뭐 좋아, 초진동 나이프라…. 어느 정도의 힘이 있는지 한번 볼까?”
하지만 마하임의 허리띠…. 이제는 초진동 나이프가 되어 버린 이것은 초진동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 어떠한 물질도 순식간에 물질 붕괴 현상을 초래하게 만드는 초진동을 말이다.
마하임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이프를 비스듬히 문에 가져갔다. 문에 다가갈수록 초진동 나이프의 진동은 약해졌지만 그 대신 문에서 미미한 방전이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은 문자 그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초진동 나이프가 채 닿지도 않았지만 나이프가 뿜어내는 초진동은 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의 고유 진동을 간섭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이 가루가 되어 버리다니….”
마하임은 초진동 나이프의 위력에 경악했다. 문은 초진동을 접한 지 수초도 지나지 않아 조각조각 부서져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만약 대상이 유기질 물체였다면 이런 광경은 보기 어려웠겠지만 분자 구조가 안정적인 금속질 물체였기에 초진동의 간섭에 약했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이 이렇게 부서져 내려 버리자 마하임은 한동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시간이 없어.”
가루가 되어 버린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마하임은 곧이어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력이 나갔기 때문에 상당히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한 밖은 의외로 밝아 보였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간 마하임은 가장 먼저 이 빛의 정체부터 살폈다.
“발광석이군. 벌써 실용화된 건가?”
천장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발광석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 발광석은 주변의 빛을 흡수했다가 주변의 광량이 약해지면 자동으로 빛을 방출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기가 없어도 주변을 밝힐 수 있어 차세대 조명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새로운 조명이었다.
하지만 그 공정의 복잡성과 수율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 가격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쌌다.
“아예 발광석으로 도배를 해 놨군. 그런데 사람들…. 허억!”
발광석의 푸르스름한 빛에 드러난 광경에 마하임은 순간 초진동 나이프를 놓칠 뻔했다.
이곳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다. 10여 명이 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곳은 마치 피를 퍼부어 놓은 것 같이 혈흔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중간중간에는 사람들의 ‘조각’으로 뒤덮여 있었다.
생존자는 고사하고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시신조차 없었다.
팔, 다리, 그리고 몸통 할 것 없이 모두 제각기 따로 놀고 있었다. 그나마도 산산이 부서져 형체마저 알아보기 힘들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건. 도대체 뭐야! 우욱!”
나름대로 비위가 좋다고 자부하는 그였지만 지금의 이 참혹한 광경 앞에서는 입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역겨운 피 냄새. 그리고 흉하게 널려 있는 살과 뼛조각들.
생존자 따위는 있을 리 없었다. 저런 상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란 그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마하임은 바닥에 허릴 굽히고서는 한동안 정신없이 토했다.
언제 어디서 적이 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에 이러한 짓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구토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당장이라도 미쳐 버릴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제길. 안 돼. 더 이상. 진정해, 마하임.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마하임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단전호흡을 통해 정신을 추슬렀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단전호흡의 효과는 정말 탁월했다. 단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그토록 심했던 구토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던 것이다.
“하아 오늘 원 없이 망가지는군.”
한숨을 땅이 꺼져라 내쉰 마하임은 다시금 눈을 들어 이곳에 펼쳐진 ‘생지옥’을 바라보았다.
순간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토하고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은 정황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야 무슨 대책이라도 세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이를 악물고 이곳을 천천히 살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안 사실이었지만 이곳은 꽤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좌석도 상당히 고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고급 우주 관광 여객선의 특실 같은 느낌이었다.
좌석 수를 볼 때 승객은 약 10명. 이 사람들은 모두 절명한 것으로 보였다.
굳이 맥을 짚어 볼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시신이 산산조각 나 있었기 때문에 굳이 살펴볼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이상의 조사는 불가능했다. 제대로 사인을 조사하려면 이 피바다를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는데…. 도저히 용기가 생기지 않는 마하임이었다.
“큭. 그러고도 네가 신선이냐?! 정신 차려, 마하임!”
20년 동안의 지옥 훈련…. 그것을 떠올린 그는 다시금 자신감을 되찾았다. 사실 그동안 받아온 훈련에 비하면 지금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야 수로 헤아릴 수도 없는 일이었고 모의 시가전에서 팔다리 하나쯤 날아가 버리는 일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선계의 의술은 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고 팔다리 하나쯤 잘린 것은 곧바로 회복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한 번 당하고 나면 한동안 밥조차 먹기 힘들 정도로 괴로웠다.
뿐만 아니라 주술을 통해 이루어지는 훈련은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이었다.
이 훈련은 자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원초적인 공포를 끌어내 자신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경험하게 했다.
고르고 뽑은 신선 후보생일지라도 신선이 되는 것은 100명에 한 명 나올까 말까였고, 매년 10%가량이 이 훈련을 받던 중 자아가 붕괴되어 버릴 정도로 이 훈련은 가혹한 것이었다.
“제길….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마치 폭탄에 직격이라도 한 것 같아.”
통로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 아니 시체라고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살 조각과 이미 검게 변해 버린 피를 살펴보며 말했다.
그것은 마하임이 선계에서 훈련 중 보았던 흡정대법으로 폭사한 시체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단순히 흡정대법으로 인해 폭사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었다.
우선 흡정대법을 사용할 수 있을 만한 타락한 신선, 즉 흑신선이 이 우주선에 탈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설령 흡정대법에 당했다 하더라도 저토록 몸이 산산조각 날 수 없었다.
사람의 몸이란 언뜻 생각하면 매우 나약하고 조그만 외부의 충격에도 쉽게 부서지는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인체는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단백질의 집합체였으므로 외부의 충격에 상당히 강한 편이었다.
만약 금속으로 이 정도의 밀도와 구성으로 물체를 재구성한다면, 궁극의 금속이라 불리는 오리하르메이드에 필적하는 견고한 물체가 될 것이다.
그리로 무엇보다도 지금 이곳에는 흡정대법이 사용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끈적끈적한 피 냄새와 시체가 부패하면서 생긴 역겨운 악취뿐이었다.
“그럼 도대체 뭐냐고. 정황을 보아서는 이 사람들 모두 한순간 이렇게 된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마하임은 이제는 공포보다 답답함이 앞섰다.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지금의 이 광경은 또 무엇인지 그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가 처음 생각한 흡정대법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