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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135화 (135/194)

135화

“하아, 정말 큰일이에요. 여기에 비치된 약품은 이미 바닥난 상태. 비상구는 충격으로 완전히 부서져 버렸고, 격벽마저 닫혀 버렸으니 완전히 고립된 거잖아요.”

핏자국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사제복에 꾀죄죄한 얼굴의 루시는 한숨을 쉬듯 입을 열었다.

온몸이 피와 땀으로 번들거려 지저분하기 그지없지만 릴루의 사제답게 전혀 동요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또한 죽었지만 그 가운데서 절망에 빠진 생존자들을 보살피며 성직자의 권능으로서 희망을 새겨 주는 자는 오직 루시 한 명뿐이었다.

사실 라르고 역시 그의 도움을 무척이나 많이 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찢어진 이마를 임시방편 이나마 지혈시켜 준 것도 루시였으며, 히스테리 직전의 자신에게 이성을 되찾게 해 준 것도 바로 그녀였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가 이 모양이 될 정도면 다른 구역도 엉망일 터. 아마도 폭동이 일어났을 겁니다. 공포라는 것은 실로 무서우니까요.”

“네, 그렇죠. 공포란 곧 어둠….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실로 두려운 것이죠. 차라리 이대로 구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라르고와 루시는 생존자들의 구조 작업에 여념이 없는 생존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중상을 입은 10명 정도를 빼면 현재 구조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는 22명.

비록 지금은 이렇게 구조 작업을 돕고 있었지만 처음 이 사태를 직면했을 때 그들의 모습이란 굶주린 몬스터의 모습, 그것이었다.

라르고가 라이트닝을 시전하기 전에는 어둠이란 장막 때문에 아무런 짓도 할 수 없었지만, 그가 시전한 마법의 빛이 이들에게 비추어 오자 그들은 자신들의 추함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이들은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인격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물론 자비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주위에 움직이는 모든 것을 적대시하며 조금의 위협에도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특히 객실 내에 비치되어 있는 몇 되지 않는 식량과 약품의 쟁탈전은 그야말로 피 튀기는 혈전이었다.

라르고는 라이트닝을 시전하다 이 어이없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함께 셔틀을 타고 가던 승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 한순간의 사건으로 인해 그들은 서로를 적으로서 생존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적지 않게 당황한 라르고는 자신도 모르게 이들 사이에 끼어 중재에 나섰다.

비록 그의 나이가 마법사 평균 수명으로 쳐도 황혼을 바라보는 200이었지만 아직도 열혈한이라고 자부하는 그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위는 오히려 역효과만을 낮고 말았다. 이미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생존을 위한 본능…. 그 본능은 파괴적이며 잔혹 그 자체였다.

비록 서로를 적대시하는 그들이었지만 라르고가 이들을 제재하자 곧장 목표물을 바꾸었다.

일종의 군중 심리였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누가 말하지도 않아도 한결같이 라르고에게 살기로 흘러넘치는 눈동자를 번뜩였다.

그것은 실로 두려운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 같은 배를 타고 가던 사람들끼리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라르고는 입을 앙다물었다. 아무리 그들이 이성을 잃고 날뛰고 있지만 일반인에게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을 라르고가 아니었다.

마법사 길드 빛의 탑의 수석 마법사로서, 마음만 먹으면 이 구역 내의 모든 사람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 자신이 있는 그였다.

게다가 그 역시도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라르고는 지체 없이 마나를 재구성했다.

만약 이때 루시의 ‘희망의 노래’가 없었더라면, 그를 포함한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이성을 잃은 상태에 시전한 라르고의 마법으로 인해 한 줌의 재로 변해 있을 터였다.

어둠…. 그리고 빛이 교차하는 곳.

누가 그것을 어둠이라고 했나요.

누가 그것을 빛이라고 했나요.

흩어진 이 혼돈 속에서 홀로 하늘을 바라봅니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빛보다는 어둠이….

더욱 가까이 느껴지지만,

나 그대와 함께 있기에, 그대 나와 함께 있기에.

슬퍼하지 말아요. 절망하지 말아요.

아직은 앞을 바라볼 수 있잖아요.

어느 사이엔가 루시는 구조 작업이 진행 중인 사람들 가운데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지금 이들이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좌석과 좌석 사이에 끼어 겨우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집중 치료실이 지금 당장 준비되지 않는 한 생존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이미 바닥이 축축히 젖을 정도의 출혈은 물론하며 좌석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생긴 파편들로 인해 이들의 몸은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었다.

이러한 그들 앞에서 루시가 희망을 노래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것이었지만, 그의 성력이 가득 담긴 이 노랫말은 죽어 가는 이들의 고통을 그나마 덜어 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좌석 사이에 끼어 죽어 가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루시를 찾았고, 그 역시 최후의 영력까지 다 짜내며 이들을 위해 노래를 이어 갔다.

자, 두 손을 모아요, 의지를 담아 희망을 담아,

이제는 눈을 뜰 때.

뒤는 보지 말아요.

차디찬 밤의 저편에 따스한 아침이 있듯이.

희망은 항상 절망의 저편에 있답니다.

자, 이제 눈물은 그만…. 우리 손을 잡아요.

눈부시도록 찬란한, 그날을 향해….

그날을 향해!

그의 마지막 노랫말은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지금껏 이를 악물고 참아 온 울음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너무나 힘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무능함이 한없이 저주스러울 뿐이었다.

루시는 엄밀히 따지자면 무녀(武女) 출신의 성직자였다.

이들은 육체와 정신력의 단련을 최우선 목표로 하며, 기타 성직자로서의 치료 능력 등은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었다.

게다가 그가 섬기는 신은 릴루. 태초에 시작의 빛을 따랐던 최고의 무신(武神)으로 전해지는 신이었다.

그 때문에 릴루를 섬기는 사제는 치료 계열보다는 전투 시 보조로 사용되는 능력과 직접 전투 능력 위주로 수련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지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저 저기…. 루시 님”

누군가 말을 루시에게 말을 걸어왔다.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 가운데서 자칫 놓칠 수도 있는 조그마한 목소리였지만, 루시의 귀에는 이 음성이 너무나 또렷이 들려왔다.

“네, 저 여기 있습니다. 자매님. 말씀하세요.”

그에게 말을 건 사람은 아직 유년기를 채 못 벗어난 여아였다. 얼굴을 봐서는 아마도 연방 내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백인인 것 같았다.

이 아이의 몸은 아래와 위에서 짓눌러 오는 3개의 좌석 더미에 깔려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이뿐만이라면 오히려 다행이겠지만 이 소녀의 몸에는 1미터가 약간 넘는 기다란 금속 파편이 관통하고 있었다.

파편은 가냘픈 소녀의 복부를 완전히 관통해 내장까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좌석 더미를 치우더라도 생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루시는 할 수만 있다면 펑펑 울고라도 싶었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루시는 이를 악물고 한 줄기의 눈물만으로 모든 것을 자제했다. 천천히 무릎을 굽힌 그는 과다 출혈로 혈색 하나 없는 이 소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저….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엄마…. 불러 줄 수 있나요?”

비록 힘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은 목소리…. 이 목소리야말로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녀의 목소리는 루시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듯했다.

소녀의 어머니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이 구역 상단 부분에 쌓여 있는 시체 더미 속에 묻힌 지 오래였다.

다른 사람이 옮겼다면 그나마도 좀 나았을 테지만 이 소녀의 어머니의 시신은 바로 그 자신이 옮겼기 때문에 더욱더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엉망이 된 객실 안은 처음보다 공간 활용도가 형편없이 떨어졌기에 시신들을 그냥 놔두고서는 구조 작업이고 뭐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임시방편이나마 죽은 자들을 객실 앞부분으로 모은 것이다.

그 때문에 시체를 쌓아 놓은 객실의 상단부는 악몽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지독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자매님…. 지금 자매님의 어머님은 다친 사람들을 돌본다고 무척 바쁘시답니다. 너무 다친 사람이 많아서요. 조금만 참고 기다려 주시겠어요. 제가 곧 불러오죠.”

“아, 괜찮아요. 성직자님. 엄마보고 저 잘 있다고만 전해 주세요. 저보다 많이 다친 사람들이 많잖아요.”

“…….”

무어라 말은 해야겠지만, 루시는 소녀의 이 한마디에 그만 목이 메고 말았다. 루시는 자신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을 내린 신을 원망했다. 아니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의 신관으로서 이토록 처절한 좌절감은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자신이 평범한 힐러 정도만 되었어도 이렇게까지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그녀를 더더욱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루시 님. 바쁘신데 죄송하지만 이제 중상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보셔야겠습니다. 진통제가 다 떨어졌기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루시에게 슬픔에 젖어 있을 만한 여유는 없었다. 지금도 중상자를 간호하던 여성 중 한 명이 자신을 부르기 위해 온 것이다.

객실 내에 비축되어 있던 항생제와 진통제는 모두 소모한 지 오래였기 때문에 부상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노랫말뿐이었던 것이다.

“그럼 자매님, 조금만 더 참으시길…. 곧 사람들이 자매님을 꺼내 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잠시 눈을 붙이시는 것이 좋겠군요.”

“루시 님, 저 걱정은 마세요. 어서 가 보세요. 난 아직은 괜찮으니까요….”

루시를 안심시키려는 듯 소녀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소녀의 이 웃음은 한눈에 보아도 고통에 찌든 생기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은 지체할 수 없었다. 지금 죽어 가는 사람은 비단 이 소녀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는 소녀의 손을 마지막으로 꼭 붙잡아 준 다음 중상자가 모여 있는 객실의 중앙 부분으로 향했다.

불행 중 다행히 객실의 중앙 부분은 그나마 훼손이 덜 된 곳이었기에 객실의 좌석을 침대 삼아 중상자들을 치료할 수 있었다.

심각한 상처를 입은 중상자들은 이미 사망한 뒤였으므로 현재 남은 사람들은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 양호하다는 것 역시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몸에 금속 파편이 수십 개 정도 박혀 있는 것은 기본이었고, 팔이나 다리가 모두 성한 사람은 한두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솔직히 이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루시는 이러한 그들이 있는 객실의 중앙으로 곧장 향했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본 몇몇 중상자들은 일제히 신의 자비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지금 이들에게 신의 자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직자인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설령 신이 이들을 버린다 할지라도 그는 이들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성직자이기 이전에 사람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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