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군주-142화 (142/194)

142화

“일단 생각은 해 보지.”

“그래, 그래. 내가 졌다. 진지하게 들을 테니까 이야기나 마저 해 줘. 이제 거의 알아들을 것 같아. 네가 한 이야기 시류론(時流論)의 대표적 학설 아냐?”

“오. 다시 봐야겠는걸? 시류론이란 불규칙한 시간의 흐름을 논리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학문…. 그러면 시립자(時粒子)도 알겠네?”

“아아, 물론이지. 네가 말한 그 불규칙한 시간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시간을 하나의 입자로서 설명하는 것이 시류론. 그 입자 단위로 나눈 시간을 시립자라고 말하지. 틀렸어?”

“그렇지. 이제야 말이 통하네. 우리들은 바로 이 시립자의 흐름에 따라 과거에서 매래로 흘러가는 것이지.”

“그런데 이거랑 오리하르콘과 무슨 관계가 있어?”

“아아, 아직도 이해를 못 했군. 답은 이미 나왔잖아. 시간의 흐름은 불규칙적이고 심지어는 과거로 흘러도 간다고. 그렇다면 시간을 멈출 수도 있지 않을까? 광자를 강제 착상시켜 자유 전자의 환원을 막아 영원의 빛을 내뿜게 하는 저 발광석처럼 말이야.”

호운은 천정을 밝히고 있는 발광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설명과 책을 뒤져 왔지만, 시류 이론을 이토록 명쾌한 설명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즉 오리하르콘이란 시립자의 영향에서 벗어난 금속. 다시 말해서, 시간이 정지한 금속이야.”

“정말 대단해! 과연 핵융합 개발부 소속! 거기다가 귀엽기도 하고.”

“으악! 껴안지 마. 싫어.”

호운은 마하임을 뿌리치며 격벽에 장치되어 있는 양자 컴퓨터로 뛰어가 버렸다. 마하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정신 차려, 이제 곧 문이 열리니까. 조심해. 만약 격벽 건너편에 균열이 있다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 버릴 수도 있어.”

“시끄러,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네에, 네에.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격벽 강제 개방.”

[보안 레벨이 확인되었습니다. 시스템 온라인. 격벽이 개방됩니다. 지금은 비상사태입니다. 선내의 안전장치가 완벽하게 동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의를 요망합니다. 카운트다운 시작하겠습니다.]

[3, 2, 1 격벽 개방.]

AI의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통로를 막고 있던 격벽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호운과 마하임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격벽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격벽을 바라보았다.

“다행이군. 저 격벽 반대편은 적어도 균열은 없는 것 같아. 저 정도나 열렸는데 아무렇지 않은 것을 본다면….”

만약 이 격벽 반대편에 균열이 있다면 이곳의 공기는 일순간 격벽 반대편으로 빨려 들어가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러나 격벽이 1미터 가까이 열린 지금도 별다른 징후가 없는 것을 본다면 저 반대편은 충분한 양의 공기와 평균치 이상의 기압이 유지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쿠궁.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열리던 격벽은 마침내 통로 위로 사라졌다. 격벽이 워낙 두텁고 커서 실제 열리는 속도보다 훨씬 더 늦게 느껴진 듯했다.

마하임과 호운 앞에는 또다시 음울한 기운으로 가득한 어둠이 펼쳐졌다. 마하임은 크게 숨을 한 번 내쉰 뒤 손전등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호운과 여러 객실을 돌아다닐 때는 마하임이 봤던 그 지옥 같은 광경은 없었지만 이 앞의 객실은 모르는 법.

천천히 발을 들이민 마하임은 얼굴을 찌푸렸다.

“쯧. 많이도 당했군. 호운, 내 옆에 붙어 있어라.”

“으, 응….”

손전등에 언뜻 비치는 객실의 모습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처참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꾹 참는 호운이었다.

애써 태연하게 말하는 척했지만, 마하임의 목소리 역시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 온 참상은 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길. 어느 미친놈이 이따위 짓을 했지? 이건 인위적인 거야. 명백히!”

마하임의 첫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쌓아 놓은 듯한 시체의 산이었다.

그 역시 산전수전 다 겪어 보았노라고 자부하는 사람, 아니 신선 중 한 명이었지만, 이 광경은 꿈속에서조차 본 적이 없었다.

시신의 대부분은 심하게 회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단 한 구의 시신도 온전한 모습을 지닌 것이 없었다.

팔과 몸통이 따로 굴러다니는 것은 기본이며, 상하체가 뒤바뀐 기괴한 형상의 시신마저 보였다. 뿐만 아니라 이 시신들은 한결같이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날카로운 검으로 절단이라도 한 것처럼 이 시신들의 머리는 깨끗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그리고 머리는 또 어디로 사라진 거지? 서, 설마? 제기랄!”

시체로 쌓아 올린 산…. 그 산의 최상부를 살피던 마하임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그곳을 바라본 그는 사람들의 머리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 산의 최상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람들의 머리였던 것이다.

“용서 못 해! 누가 이따위 짓을!”

갑작스러운 오한과 알 수 없는 음침한 기운을 느낀 호운은 문득 마하임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마하임의 두 눈동자에서는 핏빛과 같은 진한 홍색의 안광(眼光)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정상적인 생명체의 눈동자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안 되지, 여기서 이러면….”

마하임은 자신을 추스르려는 듯 얼굴을 가볍게 손으로 두들겼다. 살의로 충만했던 그의 눈동자는 천천히 원래의 옅은 검은빛으로 돌아갔다.

호운은 완전히 공포에 질려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런 호운을 흘깃 쳐다본 마하임은 예전의 조금은 멍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벌써부터 적안(赤眼)을 드러내다니, 나도 아직 멀었군…. 일단은 주조종실에 가서 생각하자.”

그러나 호운은 발을 움직이기는커녕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방금 전 마하임이 뿜어낸 지독한 살기에 눌려 다리가 풀어져 버린 것이다.

“그, 눈은 뭐야?!”

“비밀.”

“무슨 선장이 이래! 너 혹시 나사의 생체 병기나 그런 건 아니지?”

“무슨 실례되는 말이야. 난 100% 평범한 인간 맞아.”

“평범한 인간이 갑자기 눈이 빨개지면서 이상한 기운을 막 뿜어내?!”

호운은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마하임은 달리 변명할 길이 없었기에 호운에게 사과했다.

“미안, 지금으로는 밝힐 수 없어.”

“흥! 됐어. 또 나사 생체 병기 개발부에서 이상한 거 만들었겠지.”

“멋대로 생각해. 자, 업혀. 너 하나 정도는 업고 달릴 수 있으니까.”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는 호운을 바라보던 마하임은 자세를 낮춰 호운에게 자신의 등을 내밀었다.

“뭐 해, 안 업히고. 버려 두고 간다?”

마하임의 재촉에 호운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마하임의 등에 몸을 맡겼다.

“그런데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호운은 마하임의 등에 업힌 채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주위는 그야말로 생지옥을 연상시켰지만, 이상하게도 더는 두렵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어설 수조차 없을 정도로 공포에 질려 있었는데…. 지금은 거짓말처럼 평정을 되찾은 것이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확실한 건 지금 이 상황은 단순한 조난 따위가 아냐. 이 배는 지금 무언가에게 공격받고 있어.”

“그럼 처음 우리를 습격한 그 투명 괴물?”

“그럴지도…. 하지만 여긴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그럼 그 외에도 또 뭔가가 있단 말이야?”

“내 추측이 옳다면 곧 만나게 될 거야. 이런 엽기적인 짓을 한 녀석들을….”

마하임의 말투는 다시 차가워졌다. 잘은 알 수 없었지만, 호운은 지금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토록 많은 사람을 일방적으로 학살할 존재라면 얼마나 강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마하임은 이 말을 끝으로 묵묵히 다음 격벽으로 향하는 데에만 전력했다. 그러나 바닥에 널려 있는 사람들의 시신들 때문에 움직이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될 수 있는 한 시체를 밟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은 해 보았지만, 이곳에는 정말 대책이 안 설 정도의 많은 시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으적, 뿌지지직.

“제길. 결국 밟고 말았나….”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린 마하임은 재빨리 발을 떼어 놓았다.

그가 발을 치우자 그 아래에는 완전히 뭉개져 버린 둥그스름한 물체가 흉한 몰골을 드러내었다,

“역시나군. 크윽…. 보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그의 발아래에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의 머리…. 마치 전차의 궤도에 짓밟힌 것처럼 완전히 부서져 형체마저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사람의 것이었다.

분노, 그리고 뒤이은 역겨움이 마하임의 속을 일순간 들끓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정한 그의 마음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미안하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들을 위해 슬퍼해 줄 여유가 없군. 용서해라. 너희의 원한은 반드시 갚아 줄 테니까….”

이 말을 끝으로 마하임은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시신을 밟든 밟지 않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살과 뼈가 으스러지는 기분 나쁜 울림이 그의 발과 귀를 어지럽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비록 이들이 불쌍하긴 했지만, 그들은 이미 생명의 빛을 잃어버린 고깃덩어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 여기에서 이들을 위해 슬퍼해 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지금 해야 할 과제는 오직 하나. 그것은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이 구역의 총 길이는 약 80미터,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끝없이 널려 있는 시체들. 그리고 마치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좌석들과 선내의 구조물 때문에 이 80미터는 끝없는 미로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학, 학…. 정말 더럽게 힘들군. 완전 군장을 하고 행군할 때보다 더 힘든 것 같아.”

“저기, 미안해. 나 때문에….”

“하핫. 너 때문이 아냐. 겨우 9살짜리 꼬마가 무겁다면 얼마나 무겁겠어? 오히려 무거운 것이 있다면, 지금 이곳에 흐르는 무거운 공기지. 이런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지. 아, 이제 다 온 것 같군. 격벽이다.”

그들의 앞에는 또다시 거무스름한 격벽이 막아섰다. 지나온 격벽과 똑같이 생긴 격벽이었다.

오리하르콘의 특성상 코팅 같은 2차 가공이 불가능한 까닭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른다든가, 구부리는 것조차도 불가능하였기에 오리하르콘은 처음 주조한 모습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오리하르콘으로 만든 물건들의 표면은 무척 거칠었고 색감 또한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내려 줘. 문을 열어야 하잖아?”

호운은 이제 많이 안정이 된 모양인지 처음과 같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하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한 번 살펴보고서는 호운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