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뭔가 잘못됐어. 격벽이 보이지 않아.”
각 구역은 결코 넓지 않았다. 격벽이 시작된 곳에서 다음 격벽까지는 육안으로도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다음 격벽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하게 넓었다.
“어둠의 장막입니다. 사술이죠. 레비아탄의 짓입니다.”
조용히 읊조리는 루시. 마하임은 그 말을 듣고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루시 님 무슨 말이에요? 레비아탄이라니….”
“그건 중요치 않아. 아마도 우린 여기에 갇힌 것 같다.”
“에? 말도 안 돼! 이벤트 호라이즌은 미로가 아니라고. 이대로 앞으로만 가면 다음 격벽이 나와야 하는데 어째서!”
호운은 채 말을 잊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의 눈에도 다음 격벽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없이 펼쳐진 통로와 그 사이에 뿌려져 있는 사람이 담긴 고치뿐이었다.
“방법이 있습니까?”
마하임은 루시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루시 역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런 식의 술법은 처음 봐요. 잊혀진 고대의 저주인 것 같습니다.”
“흠….”
마하임은 인상을 찡그렸다. 선술에도 이 비슷한 술법이 있긴 했다.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팔진도(八陣圖)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눈속임에 가까운 전술인데 반해, 지금 이곳의 상황은 누가 봐도 현실 그 자체였다.
“일단 전진해 봅시다. 이대로 가만히 서 있어 봤자 달라질 것은 없어요.”
먼저 앞장서는 마하임. 호운도 잠시 망설이다 곧장 마하임의 뒤를 따랐고, 루시 역시도 그 뒤를 바짝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제발 죽여 줘. 제발!”
“부디 자비를! 거기 누구 없어요?”
“아아아,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아!”
사람들이 담긴 고치 가운데로 걸어가는 마하임 일행. 사방에서는 고통을 못 이겨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러나 마하임 일행은 아무 말도 없이 끝없이 이어진 통로를 걸어갔다. 가도 가도 끝은 보이지 않았고, 다음 격벽 역시 보이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마하임 일행은 여전히 이 끝없이 펼쳐진 통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건 저주야. 이 배는 저주받은 거라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호운이 외쳤다. 마하임 역시 상당히 지친 모양인지 숨이 거칠었다. 루시는 조용히 기도문을 읊조릴 뿐이었다.
“저주 따윈 믿지 않아. 호운 다른 길은 없을까?”
마하임의 말을 들은 호운은 고개를 저었다.
“점검을 위한 작은 통로가 있긴 한데, 다 잠겼어. 물리적인 봉쇄라 해킹도 불가능 해.”
“후우, 정말 난감하네요. 최첨단 우주선 안에서 이런 어이없는 일을 당하다니….”
지치기는 루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루시는 눈까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체력 소모는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많았다. 생각 같으면 자신도 주저앉고 싶었지만, 지금 앉으면 두 번 다시 못 일어날 것 같아 억지로 서 있었다.
“라르고 님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됐을 텐데….”
“그 사람은 누구죠?”
“아…. 마법사예요.”
“마법사?”
순간 마하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마법사라니…. 그건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였다.
“농담하는 거죠? 누나. 정말 마법사가 실존해요?”
호운 역시 궁금한 듯 루시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루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마법사는 실존합니다. 그저 옛 과오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은둔해 있을 뿐. 만약 라르고 님이 없었다면 전 여기까지 올 수 없을 거예요.”
루시는 자신을 텔레포트 마법으로 살려 준 라르고를 떠올렸다.
그녀 역시 실제 마법사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그의 마법적 소양은 충분히 마법사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뛰어났다.
“뭐, 있다 치고 어째서 루시 누나가 그런 걸 아는 거야?”
“저도 평범한 의사는 아니기 때문이죠.”
호운의 질문에 루시는 간단히 답했다. 호운은 머리를 잠시 부여잡고 고심하다 뭔가 깨달았는지 외쳤다.
“하긴 이따위 괴물도 있는데 마법사라고 없으란 법은 없겠지. 그러나 저러나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 거야?! 왜 끝이 안 보이지? 이건 말도 안 돼!”
답답한 듯 호운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아파서 더는 못 걸을 것 같았다.
마하임 역시 상당히 지쳐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은 쉬었다 가야 할 것 같았다.
“조금 쉬죠. 쉬면서 머리를 좀 식혀야 할 것 같습니다.”
마하임은 호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자 루시도 말없이 바닥에 앉았다.
사방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의 신음과 비명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제 그것도 익숙해져서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먹을래?”
마하임은 자신의 백팩 속에서 식당에서 챙긴 크래커와 생수를 건넸다. 하지만 호운은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형, 지금 그게 넘어갈 것 같아? 이 난장판에서?”
긴장이 풀리자 이곳에 떠도는 악취까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냄새는 마치 시체가 썩을 때 나는 시취와 매우 비슷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익숙해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토해도 몇 번은 토했을 것이다.
“그래도 드셔야 해요. 호운 형제님. 여긴 저주받은 공간. 체력 소모도 심하고, 식량도 못 구해요. 살고 싶으면 드셔야 합니다.”
루시도 식당에서 챙겨온 크래커와 물통을 매고 있던 가방에서 꺼냈다.
“살기 위해 먹는 거야. 지금은 그것만 생각해.”
이렇게 말하며 마하임은 호운에게 먹을 걸 내밀었다. 호운은 마지못해 받아들었다. 싫든 좋든 사람은 먹어야 힘이 나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잠깐의 휴식 타임. 그리고 간단히 식사를 마친 마하임 일행은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슬슬 움직여 볼까?”
몸을 일으키는 마하임. 저주인지 주술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저기 양쪽 통로의 벽을 한번 살펴보는 건 어떨까요? 이것이 주술 계열이면 결계석이나 그런 게 존재할 거예요.”
“결계석?”
“네. 레비아탄을 섬기는 사교도들이 결계석을 이용해 사술을 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서 말이죠.”
릴루교 역시 레비아탄을 섬기는 사교도와 사이는 좋지 않았다. 심지어는 성전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무력 충돌까지 있었다.
그 때문에 릴루교도와 사교도는 서로 앙숙이었고 이건 미연방 정부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관계였다.
“그 결계석은 어떻게 생겼죠?”
“결계석은 그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습니다. 보통은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는데, 룬 문자가 새겨져 있죠.”
“룬 문자?”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기묘한 모양입니다. 아마 보시면 한눈에 알 수 있을 거예요.”
호운은 루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과학이고 이성이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굿판이라도 벌리고 싶은 것이 지금 호운의 마음이었다.
“그럼 흩어져서 찾아보죠.”
“네, 알겠습니다.”
마하임을 비롯한 모두는 사방으로 흩어져 루시가 말한 룬 문자가 새겨진 결계석을 찾기 시작했다.
루시는 눈을 다쳐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이미 심안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기에 육체의 눈이 없다고 해도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았다.
“설마 이건가?”
호운은 자신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기묘하게 생긴 말뚝 모양의 금속 봉을 찾아냈다.
그 봉은 말라비틀어져 있는 시체 한 구의 배에 박혀 있었는데, 유달리 주변의 것들과 이질적으로 보인 것이다.
“네, 맞아요. 이 지독한 죽음의 기운. 사교도의 결계석이 맞습니다.”
용도는 알 수 없었지만, 사교도의 것만은 틀림없었다. 저것이 있는 곳에는 그 장소가 어떻든 항상 죽음과 다툼이 일어났다.
그런 사교도의 요물이 어떻게 이 최첨단 우주선에 설치되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럼 이걸 어떻게 하죠?”
“뽑아서 부숴 버리면 됩니다만, 결계석은 특수한 재질의 금속으로 만들어져서 부수기가 힘들 거예요.”
아직도 사교도들의 결계석의 재질은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텅스텐 합금이었지만, 거기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더 함유되어 있어, 주력 전차의 주포를 맞고도 사교도의 결계석은 부서지지 않았다.
“흠, 일단 시도는 해 봅시다. 저도 나름의 한 수는 있으니까요.”
마하임은 대뜸 사교도의 결계석을 뽑아냈다. 그리고 초진동 나이프를 작동시켜 결계석에 가져다 됐다.
부웅 부웅.
초진동 나이프의 작동과 함께 초진동 공명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천천히 결계석에 초진동 나이프를 가져다대는 마하임. 그러나 결계석은 조금도 변함없이 그 모양을 지키고 있었다.
“맙소사 초진동이 안 통한다고?”
호운은 깜짝 놀랐다. 초진동 나이프는 이론상 물리 세계의 그 어떠한 물질도 분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저 결계석은 초진동 나이프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짐작은 했는데 역시나네. 좋아 그럼 이건 어떨까?”
마하임은 정신을 집중했다. 기를 순환시켜 단전에 모아 압축시키고 또 압축시켰다.
그리고 그 압축된 기를 일순간 초진동 나이프를 매개로 하여 방사시켰다.
츄화핫!
마하임의 초진동 나이프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설마 그건 검기?”
“어? 호운, 네가 어째서 그걸 아는 거지?”
“형은 무협 영화도 안 봐? 검에서 솟구쳐 오른 푸른색의 기운. 이건 누가 봐도 검기잖아. 대단한걸. 검기는 초고수 기공사가 아니면 못 쓰는 걸로 아는데.”
무협 마니아인 호운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마하임은 조금은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리며 검을 치켜들었다.
“그 이야긴 나중에 하고, 일단은 잘라 봐야지.”
마하임은 망설이지 않고 검기를 뿜어내는 초진동 나이프로 결계석을 내리쳤다.
서걱-!
초진동마저 견뎌낸 결계석이었지만 초진동에 검기를 합치자 단 1초도 버티지 못하고 일도양단 나 버렸다.
“잘려지는군….”
쿵-!
바로 그때였다. 통로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큰 진동이 이곳을 덮쳤다.
마하임과 호운, 루시 할 것 없이 몸을 재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그 진동은 격렬했다.
쿠쿠쿠쿠쿵!
진동은 한동안 이어지다 멈췄다. 그리고 진동이 멈추고 나자, 끝없이 펼쳐진 통로는 사라지고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다음 구역으로 향하는 격벽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됐다! 만세, 통로가 보여!”
기쁜 나머지 호운은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말했다. 마하임도 그제야 한시름 놨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바로 그때 들린 루시의 목소리에 마하임은 잠시 흐트러졌던 감각을 다시금 날카롭게 만들었다.
“뭐지? 고치에서 뭔가 꿈틀거려.”
호운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갇혀 있는 고치가 유난히 심하게 꿈틀거리고 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바닥에서 조금씩 꿈틀대는 고치들은 일제히 몸을 비틀며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뭐지? 뭐가 시작되려는 거야?!”
“레비아탄의 기운입니다. 서둘러야 해요!”
루시는 다급하게 외쳤다. 마하임은 본능적으로 호운과 루시의 손을 잡고 얼마 떨어지지 않는 다음 격벽을 향해 달렸다.
격벽 앞에 도착한 마하임은 호운을 바라보며 목청껏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