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주조종실. 마하임과 호운, 그리고 루시는 각자 조정석에 앉아서 이벤트 호라이즌을 다시 기동시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호운, 비상 전원 시스템 다시 한번 확인해 줘.”
[에러. 에러. 시스템 작동 불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동력선 손상.]
이벤트 호라이즌의 매인 컴퓨터는 여전히 협조를 해 주지 않았다.
호운은 정식으로 우주선 제어를 배우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나름 천재과에 속했기에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빠르게 조작법을 익혀 가고 있었다.
“전력선 우회하고 11번 회로 개방. 핵융합로 재기동 준비.”
[OK 핵융합로 재가동 테스트 준비 완료.]
“핵융합로 기동!”
[OK 핵융합로 기동.]
구우우우웅.
핵융합로가 작동하면서 발생한 진동이 이벤트 호라이즌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이벤트 호라이즌의 주 동력원인 핵융합로는 아직 많은 개선점이 필요한 프로토 타입이었다. 하지만 외우주 탐사를 위해서 핵융합로의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 발생량은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핵융합로 작동 성공. 주전원 장치 기동.]
AI의 말과 동시에 어둠으로 뒤덮여 있던 주조종실의 조명이 작동하면서 일순간 환해졌다. 그리고 보인 것은 마카의 것으로 보이는 대량의 혈흔이었다.
“미안하다, 마카. 지켜 주지 못해서.”
마하임은 짧게 묵념했다. 그리고 조종석의 콘솔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왜 핵융합로가 20%밖에 효율을 못 내고 있는 거지?”
“아. 나도 몰라. 여기 조종 시스템은 처음이라고.”
“큰일인데. 이걸로는 초공간을 벗어날 수 없어.”
모니터를 바라보던 마하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초공간에서 물리 세계로 돌아가려면 선체에 강력한 자장을 덧씌워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핵융합로가 최소 80% 이상의 효율로 작동해야만 했다.
“망할 고물 배! 왜 안 되는 거야!”
화가 난 호운은 조종석의 제어판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기껏 온갖 위험을 해치고 여기까지 왔는데, 핵융합로 이상으로 초공간을 벗어날 수가 없다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루시가 말했다. 루시는 초공간 항주법에 대해 아는 바는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핵융합로에 가 봐야겠어.”
“미, 미쳤어 형?! 가는 길에 또 어떤 괴물이 있을지 알고!”
지금 이벤트 호라이즌 안에는 아직도 처치하지 못한 레비아탄 조각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직 선내의 시스템이 다 작동한 게 아니라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10마리 이상은 될 듯했다.
“여기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 없어. 그리고 레비아탄의 조각의 말이 맞다면, 지구와의 시간 괴리가 더 심해지고 있을 거야.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막상 지구에 도착해도 우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수백 년이 지나 있을 테니까.”
시간의 흐름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것은 이미 수백 년도 전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이미 밝혀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현재 이벤트 호라이즌이 위치한 초공간에서의 시간 흐름은 통상 공간과의 시간 흐름과 차이가 났다.
이러한 시간의 괴리 현상을 막기 위한 차폐막이 이벤트 호라이즌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미티어와의 충돌로 인해 작동이 멈춰 버렸다.
“시간이 없어. 여기서 우물 쭈물거리면 수백 년은 훌쩍 지나가 버릴 거다.”
“망할!!!”
호운은 조종석을 내리쳤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그는 절망했다.
“걱정 마. 난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그건 알고 있어, 형. 하지만 그 괴물도 보통 괴물은 아니잖아.”
“그렇다고 여기서 멍 때리고 있을 순 없지.”
마하임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조종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맞다! 아까 메인 컴퓨터를 살피다가 본 건데 이 배에는 최신형 전투 안드로이드가 한 대 탑재되어 있어.”
“벌써 그게 나왔나?”
인간과 흡사하면서도 인간을 훨씬 능가하는 능력을 지닌 로봇. 상용화 단계까지 이르렀지만 여러 가지 정치적 문제 때문에 상업화는 못 하고 있다고 들었다.
“응. 나사 애들이 테스트용으로 몰래 한 대 넣어 놓은 것 같아. 그 안드로이드의 백업을 받으면 훨씬 움직이기 편할 거야.”
“좋아. 그 안드로이드는 어디에 있지?”
“어, 세팅은 이미 끝났어. 주조종실의 격벽 밖에 대기시켜 놨어.”
“그래. 좋아. 나쁘지 않네. 혼자 가는 것보단 났겠지.”
성큼성큼 주조종실 밖으로 나가는 마하임, 이를 바라보던 루시는 마하임에게 말했다.
“잠시만 멈춰 주시겠어요?”
“무슨 일이죠? 루시 님.”
“기도해 드릴게요.”
“전 신을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릴루 신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지금 해드리려는 것은, 일종의 축복입니다.”
루시의 말에 마하임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루시의 앞으로 다가갔다.
“축복이라. 뭐, 받아도 상관은 없겠죠.”
“후훗, 좋아요.”
루시의 앞에 무릎을 꿇는 마하임. 루시는 마하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두 눈을 감았다.
“전쟁의 신 릴루시여. 여기 당신의 용사가 있사오니 무한한 용기로 함께하여 주세요! 큐어라!”
낭랑한 루시의 기도문이 끝남과 동시에 마하임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마하임의 몸에는 잔상처가 가득했을 뿐 아니라 피로도 극에 다다라 있어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루시의 기도가 끝남과 동시에 마하임의 몸에 난 상처와 피로는 한순간 사라졌다.
“놀랍군요. 성직자의 기도가 이렇게 효과가 좋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악의 힘이 강할수록 선의 힘도 강해지죠. 다녀오세요. 마하임 님. 릴루님의 가호가 함께하길.”
루시는 마하임의 양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마하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주조종실 밖으로 나갔다.
조종실 밖에는 버려둔 아루시안의 시체가 아직 남아 있었다. 마하임은 이를 애써 무시하며 소형 무전기로 호운을 호출했다.
“호운. 격벽 앞에 도착했어. 열어 줘.”
“알았어, 형. 그리고 격벽이 열리면 안드로이드가 대기하고 있을 테니 놀라지 마.”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여기까지 오면서 볼 것 못 볼 것 다 봤으니까.”
“하하, 그건 그래. 뭐, 격벽 열게.”
호운의 외침과 동시에 격벽이 열리기 시작했다. 마하임은 만약을 대비에 초진동 나이프를 꺼내 들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격벽 뒤는 여전히 어두웠다. 아직 핵융합로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했기에 실내조명이 다 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하임은 조심스럽게 격벽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방 생명체 확인. 탑승 넘버 011224 마하임 선장으로 확인.”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몸에 딱 달라 붙는 슈트를 입고 있는 금발 머리의 여성이었다.
“이게 안드로이드인가?”
일단 겉보기에는 인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미녀라서 인간과 동떨어진 느낌까지 들었다.
“반갑습니다. 안드로이드 시리얼넘버 8787124. 모델명 노아, 인사드립니다. 현 시간부로 마하임 선장님을 서포트합니다. 본 안드로이드는 다목적 안드로이드로서 전투, 경호, 치료, 요리, 성행위까지 가능합니다.”
“성행위까지는 좀 오버 스펙 아닌가….”
안드로이드를 위아래로 살펴보던 마하임은 말했다. 만약 호운이 이게 안드로이드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면 인간으로 착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였다.
“형,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요. 지금 안드로이드랑 그런 거 할 시간 없으니까.”
“야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냐? 쓸데없이 무전하지 마. 끊는다.”
무전을 끊은 마하임 안드로이드를 향해 말했다.
“널 뭐라고 불러야 하지?”
“노아라고 호출하시면 됩니다. 다른 별칭이 필요하시다면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 됐어. 노아. 좋네. 좋은 이름이야. 가자 노아. 목적지는 핵융합로가 있는 선미 구역이야.”
“명령 확인.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하는 노아. 노아는 안드로이드답게 이 시체와 피로 얼룩진 선내를 아무렇지도 않게 걷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게 있는 줄 알았다면 벌써 사용했을 텐데.”
마하임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전장에서 선두에 선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가 동반되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일을 노아가 대신 해 주는 것만으로도 한결 전진하기가 편했다.
“경고! 초음파 탐지기에 언노운의 움직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거리는?!”
“10미터 앞. 곧 육안으로 보일 겁니다.”
마하임은 노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놈들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몸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약간의 일렁임이 있었을 뿐이었다.
“육안 확인 불가. 적외선, 자외선, 초음파 센서 동시 작동. 적 색적 시작.”
가시광선 영역을 넘어 다양한 색적 기능을 지닌 노아는 즉각 모든 센서를 풀가동해 다가오는 적, 레비아탄의 조각의 위치를 확인했다.
“언노운 개체 수 3. 전투 모드 온라인. 요격하시겠습니까?”
“좋아. 부탁해.”
“명령 확인. 적 섬멸하겠습니다.”
노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아의 양팔이 순간 분해되는 듯싶더니 이내 총 모양으로 모습을 바뀌었다.
“레일건 발사 준비 OK. 3점사 모드 전환. 파이어.”
지이이이잉.
투캉 투캉 투캉!
마하임의 동체 시력으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레일건의 탄환이 순간 음속의 벽을 뚫으며 다가오는 레비아탄의 조각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야말로 원샷 원킬. 제2격은 필요 없었다. 레일건의 탄환은 회전하면서 레비아탄의 조각의 몸을 일순간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렸다.
“맙소사. 레일건이라고?”
레비아탄의 조각을 단숨에 제압한 노아를 바라보며 마하임은 입을 닫을 수 없었다.
레일건이란 탄환을 두 대의 도전용(導電用) 레일 사이에서 가속하여 쏘는 포를 총칭한다. 그 원리는 리니어 모터(linear motor)와 동일하다.
레일건의 탄환 속도는 무려 100km/s나 되는데, 대기권 안에서는 공기의 저항 때문에 ‘3km/s’가량, 또는 ‘60발/s’라는 발사 속도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고출력의 발전기가 있어야 하기에 소형화 및 실용화는 부적격하다는 게 일반론이었다.
하지만 마하임 앞에 서있는 저 안드로이드는 그 일반론을 단숨에 무너트리고 있었다.
“적 섬멸 완료. 이동 개시합니다.”
다시 팔을 손 모양으로 되돌린 노아는 어둠을 해치며 걷기 시작했다. 마하임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아군이었길 망정이지, 만약 적이었다면 레비아탄의 조각보다 훨씬 무서운 적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마하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아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어느새 마하임과 노아는 두 번째 격벽 앞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