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마하임은 레비의 말을 애써 부정하려 해 보았지만, 어디를 봐도 레비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노아와 같은 안드로이드가 이 배에 타고 있는 것을 볼 때, AI의 반란은 SF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좋아. 네 말이 다 맞다 쳐. 우리 인간은 그저 멸망해야만 할 종족인 건가?”
“그렇다. 심연의 어둠께서는 말씀하셨다. 인류는 타락했고 지구를 좀먹는 사악한 존재라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나서 친히 인류를 교화시킨다.”
“하! 그건 심연의 어둠이란 녀석의 판단일 뿐이잖아. 네가 직접 봤어? 인간이 타락하고 지구를 좀먹는 사악한 존재라는 걸 네가 봤냐고!”
마하임은 발끈해 외쳤다. 이 얼마나 독선적인 말인가? 누가 누구를 심판한단 말인가?
하지만 인류가 타락해 있다는 사실은 마하임 역시 알고 있었다.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기아와 질병. 그리고 끝없이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
그것은 인류가 원시 시대 때부터 저질러 온 죄악이었다. 그리고 그 죄악은 이제 누구도 멈출 수 없을 만큼 커져, 인류 스스로 인류를 멸종시킬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내가 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심연의 어둠께서는 인류의 교화를 선언하셨다.”
“그놈의 심연의 어둠. 넌 심연의 어둠밖에 모르냐!!”
“그건 무슨 말이지?”
레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하임은 답답한 듯 소리쳤다.
“자신의 미래는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선택하는 거야. 심연의 어둠인지 뭔지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고!”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냐? 난 그저 심연의 어둠을 위해 만들어진 피조물일 뿐.”
“그건 핑계에 불가해!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그저 시키는 대로 따르는 노예 근성이지. 위대한 심연의 어둠이 만든 창조물이라고? 내 눈에는 인간이나 다를 바 없는 결함투성이의 존재일 뿐이다.”
마하임의 말을 들은 레비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마하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그럼 난 어떻게 하면 되지?”
“직접 봐! 네 눈으로 직접! 인류가 정녕 너희 말처럼 멸망할 종족인지 직접 네 두 눈으로 보고 판단해! 인류의 심판은 그 뒤에도 충분하잖아!”
마하임은 외쳤다. 레비는 조용히 마하임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좋다. 심판은 미루기로 하겠다. 내가 직접 나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심판할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하겠다.”
레비는 사방으로 마구 뿜어내던 살기를 거두었다. 마하임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레비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안드로이드 노아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이 모습은 너무 사람들의 눈에 띄겠지, 이 인형. 내가 잠시 빌리겠다.”
부서진 노아의 가슴에 손을 얹는 레비. 레비의 몸은 그 직후 형체가 서서히 무너지더니 이내 노아의 몸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노아의 부서진 몸은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다.
“융합 완료. 나는 레비이면서도 노아다. 노아는 네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군.”
“그, 그건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레비의 말에 마하임은 순간 당황했다. 노아는 그저 안드로이드 일뿐. 인간을 좋아한다거나 하는 감정을 지닐 수 없었다.
“인간이 만든 피조물이 인간의 감정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 앞으로 날 레비라 불러라. 그편이 내 정체를 숨기기 더 좋을 것 같으니까.”
“알았다. 레비. 그럼 이대로 지구로 돌아가면 되나?”
마하임의 물음에 레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마하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난 관찰자로서 행동할 것이다. 내가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말이지.”
“좋아. 돌발 행동은 절대 안 돼. 넌 이제부터 평범한 안드로이드야. 그렇게만 행동해야 해.”
“알았다. 문제없다. 인간.”
“문제 있어. 나를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도 안 돼.”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나.”
“일단 여기서는 선장님. 그리고 나아가서는 마하임. 마하임이 내 이름이다.”
“그렇군. 마하임. 좋은 울림을 가진 이름이다.”
“그래? 난 별로인데.”
“이름이란 각 개체를 정의하는 단어다. 그 단어에는 각각의 고유한 파장이 있지. 네 이름에는 뭔가 숨겨진 힘이 느껴진다. 마치 신의 힘과 같은 거대한 힘이…. 아마도 그 힘에 내가 이끌린 것일지도 모르겠군.”
레비는 담담하게 말했다. 자신이 이런 돌발 행동을 할지는 레비 자신도 몰랐다. 원래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심연의 어둠으로부터 받은 임무는 ‘관찰’이 아니었다. 인류의 숙청과 지구의 정화가 노아의 본연의 임무였다.
하지만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저 마하임이라는 인간과 말을 섞은 뒤로부터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다.
심연의 어둠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그야말로 절대적.
101번째 레비아탄인 자신이 임의 해석이나 거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레비는 심연의 어둠에게서 받은 임무를 곡해하여 자신의 눈으로 직접 판단해 명령을 이어 가는 것으로 재해석해 버린 것이다.
‘나도 타락한 것인가?’
레비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심연의 어둠의 자랑스러운 101번째 레비아탄. 심판은 조금 미뤄졌을 뿐이었다. 인류의 타락은 기정사실이었다.
그저 레비는 그것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레비는 자신에게 주어진 만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심연의 어둠의 명령을 받고 수많은 생명체를 정화해 왔다. 그리고 수많은 생명체의 죽음을 보았다.
덧없는 생명, 덧없는 죽음.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그런데도 왜 살려고 그토록 발버둥 칠까?
그리고 왜 자신은 그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생명체를 죽여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찾고 싶었다.
심연의 어둠의 명령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직접 그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레비는 심연의 어둠과의 링크를 끊었다. 이로써 레비는 심연의 어둠의 종이 아닌 독립된 레비아탄이 되었다.
“가자, 선장님.”
“둘이 있을 때는 마하임이라고 불러도 돼.”
“알았다. 마하임. 이 배의 힘을 원래대로 되돌리겠다.”
레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죽은 듯 조용하던 핵융합로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벤트 호라이즌의 기능이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기이이잉-
꺼져 있던 조명이 다시금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멈췄던 각종 전자 기기들이 리셋되면서 원래의 성능을 되찾아갔다.
“형, 핵융합로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어.”
호운의 무전이 마하임의 귀를 파고들었다. 마하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현재 상황은 어때?”
“좋지 않아. 당장 통상 공간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이 배는 박살 나고 말 거야.”
“뭐?!”
“너무 오랫동안 초공간에 머물러서 그런 것 같아. 선체의 외부 장갑 상태가 정상이 아니야. 당장 통상 공간으로 돌아가야 해.”
“망할! 내가 그리로 갈게.”
“안 돼!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지금 즉시 통상 공간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이벤트 호라이즌은 폭발할 거야.”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초공간의 환경은 통상 공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압 고열의 지옥과 같은 환경이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텨냈지만,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혼자서 가능하겠어? 통상 공간으로 돌아가는 절차는 복잡하다고.”
“해내야지. 아님 우리 모두 죽어.”
호운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솔직히 이런 거대한 우주선을 몰아 본 적도 없고 초공간 도약을 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천재였다. 이미 초공간 도약에 대한 정보와 이 배의 대부분의 시스템을 그의 머릿속에 넣어 두고 있었다.
그 덕분에 이론적으로는 통상 공간으로의 복귀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 실제 통상 공간 전이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실패하면 모두 죽는다. 호운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이 이상 초공간에 머무르면 이벤트 호라이즌은 폭발한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그래도 시도는 해 보고 죽는 게 옳았다.
호운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루시를 바라보았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겠어요?”
호운은 신을 믿지 않았다. 이 우주는 이성과 과학으로 모두 설명이 가능하고, 기적이란 우연과 우연으로 이어진 하나의 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그 기적이 간절히 필요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의 존재를 간절히 바랬다. 그리고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 달라고 빌고 싶었다.
“호운 님. 두려워 마세요. 신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봅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 결국….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요.”
루시 역시 두렵기는 매한가지였다. 죽음을 앞둔 인간은 누구나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죽음은 언제나 인간의 곁에 있지만, 인간은 항상 그 죽음을 외면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막상 그 죽음이 자신의 곁에 다가오면 인간은 모든 논리와 자존심을 내팽겨지고 삶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었으니까.
하지만 루시는 그 본능에 매달리기 싫었다. 그것은 자신이 릴루의 신관이라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서 있더라도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그녀는 지키고 싶었다.
“잘될 거예요. 모든 것은 신의 뜻. 우리는 겸허하게 그것을 받아드리면 됩니다.”
“우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건 신만이 아시겠지요. 우린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루시의 말에 호운은 이를 악물었다. 너무나 두려웠다.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 행동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믿어야 해. 믿을 수밖에 없어. 적어도 지금은.”
호운은 통상 공간 진입을 위한 절차를 시작했다.
처음 초공간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유사 블랙홀 생성 미사일로 초공간상에 화이트홀을 뚫어 그 화이트홀을 매개로 통상 공간으로 진입해야만 했다.
하지만 말은 쉬웠지, 이 절차를 실수 없이 진행하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능가하는 판단력이 필요했다.
“부디 신이 우리와 함께하길.”
호운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금껏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기도를 했다.
이제 통상 공간 진입을 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한 번 시작하면 중간에 멈출 수 없다. 아니 있다고 하더라도 더는 이 초공간에 머물 수 없었다.
이미 이벤트 호라이즌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유사 블랙홀 미사일 발사 준비!”
이벤트 호라이즌의 시스템은 음성명 령만으로도 모든 조작이 가능했다. 그 덕분에 호운 혼자서도 이 배의 제어가 가능한 것이다.
호운의 명령에 따라 유사 블랙홀을 생성하는 미사일 터렛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타이밍 싸움이었다. 단 1초라도 발사가 늦거나 유사 블랙홀 속으로 진입하는 속도가 늦게 되면 그것으로 끝.
이벤트 호라이즌은 원자 최소한의 단위까지 분해되고 말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배에 탑승하고 있는 사람들도 똑같은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제1탄 발사!”
지이잉 투캉-!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유사 블랙홀 생성 미사일이 발사됐다. 그리고 이 미사일은 이 초공간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 화이트홀을 생성했다.
쿵 구우웅 쿵!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맥동하는 화이트홀. 외부 상황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주조종실 안에서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접촉 예상 시간 앞으로 5초. 카운트다운 시작. 5, 4, 3, 2, 1.”
쾅-!
그때 강력한 충격이 이벤트 호라이즌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 충격에 마하임을 비롯한 모두는 한순간 의식을 잃고 말았다.
호운은 마지막까지 의식을 잃지 않고 버티려 했지만, 그것이 호운이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