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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170화 (170/194)

170화

소녀는 그렇게 말한 뒤 학렬의 앞에 오른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잠시 무례했군. 역대 ‘아서’로 선택받은 인간치고는 넌 그래도 상당히 괜찮은 놈으로 보이니까 정식으로 인사할게. 내 이름은 ‘멀린’. 아서를 도와 지구를 수호하는 마법사야.”

“다, 당신이 멀린이라고요?"

“왜 뭐가 잘못됐어?”

“저기, 멀린은…. 전설에서도, 고증에서도 남자라고….”

아서왕 전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마법사 멀린이라면 학렬 역시 무척 잘 알고 있었다. 그 전설에 따르면 멀린은 분명 남자였다.

멀린은 악마인 인큐버스와 아름다운 인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마(半人半魔)였다. 그 덕분에 멀린은 태어날 때부터 초자연적인 힘과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멀린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가장 오래된 브뤼트 산문에는 아드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으로 나와 있다.

멀린의 태생이 어쨌든 그는 훌륭한 현자로서 마법과 책략을 통해 아서왕의 출생을 도왔을 뿐 아니라 아서왕을 곁에서 보좌하는 조언자로서 활동했다.

그리고 아서왕이 아발론으로 사라진 이후 호수의 부인의 계략에 의해 마법에 걸려 유폐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전해진다.

“누가 어떤 새끼가 남자래?! 나는 처음부터 여자였다고! 빌어먹을 호수의 부인! 그년 때문에 고생한 거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려.”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멀린. 하지만 이내 그녀는 원래의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난 지금 아주 바쁜 몸이거든. 지금 지구에 난리 난 거 알지? 고블린인지 나발인지 하는 외계인 놈들이 영국, 아니 전 세계에 나타나 개판 치고 있는 거. 난 그거 정리하러 가 봐야 하니까 넌 전대 아서랑 마찬가지로 엑스칼리버(Excalibur) 뽑기 놀이나 하고 있어.”

“그, 그 검이 정말 실존하는 겁니까?!”

아서왕이 아서왕일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전설상의 명검, 엑스칼리버가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성검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인 이 검은 아서왕 이야기 속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엑스칼리버는 중세 영웅 전설에 있어서 아이콘과 같은 존재로서, 수많은 판타지 소설에서는 물론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에서 심심하면 등장하는, 어떻게 생각하면 조금은 흔해져 버린 아이템이 되고 말았다.

“당연히 실존하지. 아서왕이 아서왕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엑스칼리버가 있기 때문이야. 엑스칼리버야말로 가이아가 만든 최강의 결전 병기지. 자세한 것은 엑스칼리버에게 직접 물어봐.”

학렬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전설과 현실이 뒤죽박죽된 정보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학렬을 향해 멀린은 히죽거리며 웃었다.

“하긴 정신이 하나도 없겠지. 그럼 팩트만 딱 말해 주고 갈게.”

그녀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난 뒤 말했다.

“첫째. 이곳은 아발론. 이곳의 하루는 시간은 실제 지구 시간의 1 분밖에 안 돼. 즉 시간 대역이 다르다는 거지. 시간의 흐름은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인해 이미 증명된 거니까 모를 리 없을 거고.

둘째. 넌 지구의 영혼 ‘가이아’가 직접 선택한 최고의 전사 ‘아서’가 되었어. 그리고 가이아의 최종 병기라 할 수 있는 ‘엑스칼리버’의 사용 권한 또한 획득했지. 왜 널 가이아가 선택했는지 묻는다면, 노코멘트야. 나도 모르니까.

셋째. 넌 여기서 엑스칼리버와 함께 수련한다. 엑스칼리버는 스스로 자아가 있는 검인 에고소드. 네가 엑스칼리버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100%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모든 지식과 기술, 그리고 가이아가 선택한 초인으로서의 능력을 각성시켜 줄 거다. 바로 그 능력을 각성했을 때 비로소 넌 엑스칼리버를 뽑아 진정한 아서가 될 수 있을 거야.

넷째. 시간은 넉넉하니까 조바심 가지지 마. 첫 번째와 이어지는 내용인데 이곳은 현실과는 시간의 흐름이 달라. 차분히 아서의 힘과 엑스칼리버를 다룰 수 있게 훈련해.

다섯 번째. 이게 핵심이야. 넌 지금 이 시간부로 ‘아서’야. 네가 진짜 아서라면 가이아를 수호하는 최강의 전사가 되어야만 해! 지금 지구에서 멋대로 설쳐 대는 네 친구, 마하임이라는 놈을 넘어설 정도로 말이지! 그럼 안녕, 나중에 또 보자.”

멀린은 폭풍과 같이 이렇게 말하고선 고블린의 포탈과 비슷한 차원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허….”

황당한 나머지 학렬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뺨을 꼬집어 보았지만 분명 고통은 있었다. 하지만 몸의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하늘을 날려면 날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온몸에 감도는 알 수 없는 이 고양감.

마치 거대한 힘을 지닌 무언가가 자신을 수호해 주는 느낌이었다.

이런 경험은 학렬에게 있어서 정말 난생처음인, 기묘하고도 신비한 그리고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만약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학렬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정말 이런 공기는 처음이야.”

학렬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서울의 미세먼지 가득한 공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청량하고도 깨끗한 공기가 그의 폐를 가득 채웠다.

마치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랄까? 이런 공기는 그 어디서도 체험하지 못한 정말 신선한 것이었다.

“나의 마스터여! 들리는가.”

바로 그때 들려온 근엄한 목소리. 학렬은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없이 펼쳐진 원시림이 전부였다.

바로 그때였다. 또다시 그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려워 마라. 나의 마스터여. 이곳은 그대가 마땅히 와야 할 고향과 같은 곳.”

그 근엄한 목소리는 더없이 자애롭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다시금 학렬의 귀에 들려왔다.

“두려워 말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어오도록. 내가 길을 인도하마.”

다시 들려온 목소리. 학렬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에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방은 숲이었고 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렬이 한 걸음씩 발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이 거대한 원시림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학렬의 앞에서 물러났다.

스스스슥 스스스슥-

이 숲은 문자 그대로 살아 있었다. 학렬을 스치듯 나뭇가지는 사방으로 펼쳐졌고 마치 구약 성경의 모세가 홍해 바다를 가른 것처럼 학렬을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학렬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자그마한 옹달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수정처럼 투명한 검신을 지닌 투핸드 소드급 이상의 거대한 장검 한 자루가 박혀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다름 아닌 저 장검에서 흘러나왔던 것이었다.

“환영한다. 그대가 이번 대 나의 마스터 ‘아서’인가?”

“너, 넌 설마!”

“나의 이름은 엑스칼리버, 가이아가 신께 부탁받아 만든 지구의 모든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최종 수호 병기다.”

엑스칼리버의 말은 옹달샘을 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마치 신의 목소리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목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비로운 목소리였다.

“네가 배워야 할 건 너무나 많다. 멀린은 항상 대충대충이라 제대로 설명 안 해 줬겠지만.”

엑스칼리버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자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숲의 새소리, 산들바람이 불어 나뭇가지를 흔들며 나는 사각거림, 아발론의 천국과 같은 경관이 학렬의 눈에 녹아 들어왔다.

이름도 본 적도 없는 꽃들이 저마다 아름다움과 코끝을 자극하는 달콤한 향기로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학렬은 생각했다. 태초에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그들에게 선물해 준 땅 ‘에덴’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고.

“시간은 많다. 아서, 나의 마스터여. 그 어떤 바보라도 나는 지구 최강의 전사로 만들 수 있다고 자부하는 바이다.”

“…저기 뭔가 좀 자존심이 상하는 발언 같은데 말이지.”

“후후. 마음에 든다, 마스터 아서. 역시 너도 역대 ‘아서’처럼 자존심 하나는 센가 보군. 좋다. 나의 마스터, 나의 아서여. 지금부터 과거의 네가 속세에서 사용하던 이름은 버려라! 너는 가이아가 선택한 가이아의 수호자 ‘아서’다!”

엑스칼리버의 선언이 끝나는 순간 학렬의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검은 흑발에서 금발로 변했다. 눈동자 역시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그것이 바로 학렬이 지구의 수호자 ‘아서’가 되었다는 증표였다.

“나의 마스터여. 나의 손잡이를 잡아라. 지금 마스터의 힘으로는 그것조차 어렵겠지만, 천천히 강해지는 거다. 이곳의 하루는 지구의 1분에 불과하니까.”

“자, 잠깐. 그럼 난 급속도로 늙는다는 것과 마찬가지 아냐?!”

시간은 상대적이지만 학렬은 상대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학렬은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닌 한낮 인간에 불과했다.

이곳에서 하루를 살면 지구에는 1분이 흘러간다. 좋을 것 같지만 역으로 말하면 엄청나게 빨리 늙어 가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만약 100년을 수련했다 치자. 지구로 돌아오면 고작 몇 년밖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럼 학렬은 노인이 되는 것이었고, 지구에서는 고작 몇 년밖에 시간이 흘러가지 않았으니…. 결과론적으로 학렬만 엄청난 속도로 늙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것 바로 상대성 원리의 시간차가 만들어 내는 비극이었다.

“그건 걱정 마라. 넌 인간 ‘학렬’이 아니라 가이아의 전사 ‘아서’다! 넌 가이아가 원하지 않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불로불사의 몸을 이미 지니고 있다! 가이아가 소멸하지 않는 한 너를 능가할 자 없으리라!”

엑스칼리버의 말을 직접 듣고서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고 지금 자신은 죽어서 소위 말하는 저승에 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하게 지금 학렬, 아니 아서가 되어 버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저 엑스칼리버의 말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후우. 좋아,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해보자.”

이미 학렬은 한 번 죽었던 몸.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살아도 좋았고 죽었다고 해도 미련은 없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이 살아 있다면, 학렬은 다시 한번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하임과 했던 그 맹세! 그 약속! 그 약속을 다시 지킬 수 있게 된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다시 마하임과 함께 이 개 같은 세상과 싸워 승리해 ‘혁신’해 나갈 수만 있다면, 학렬은 그 어떤 짓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학렬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엑스칼리버를 양손으로 덥석 움켜쥐었다.

“으아아아아-!”

그 직후 학렬의 양손을 통해 전해지는 엄청난 기운. 그것은 곧 지식이자 무량대수급의 엄청난 영력이었다.

가이아가 태초로부터 생성된 그때부터 시작된 광대한 기억의 바다. 그 속에 가득한 진리의 물결 속에 학렬은 단숨에 내던져졌다.

그렇게 이 어두운 시대에 새로운 아서왕의 전설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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