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마하임은 몽롱한 정신으로 이벤트 호라이즌의 선장석에서 눈을 떴다.
지금 마하임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아니면 환상을 보고 있는 건지 모를 기묘한 상황을 경험했다. 말로만 듣던 유체 이탈을 해 뭔가 어처구니없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처음 본 것은 학렬과 궤도 엘리베이터를 같이 만들자고 약속했던 그 과거의 이야기였고, 두 번째 본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한 내용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인 학렬이 지구의 영혼, 즉 가이아에게 선택되어 다시 살아나 전설의 기사왕 ‘아서’가 되는 꿈, 아니 환상이었다.
“하, 하하하.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나 점점 미쳐 가는 게 아닐까?”
마하임은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만 했다. 가뜩이나 레비아탄, 아니 레비와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에서 인간 때 가졌던 모든 감정과 생리적 욕구가 하나둘 사라지고 있어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는데 급기야는 이런 환상까지 보다니….
“마하임 왜 그러나. 또 무언가를 본 것인가?”
“어? 네가 어떻게 그걸 알지?”
“마하임, 네가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한 적이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 때문에 마하임 넌 미래 예지, 혹은 반드시 알아야 할 감춰진 진실을 꿈이나 환상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하며 레비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얻으며 말했다.
“네가 본 환상을 시각화해 이벤트 호라이즌의 메인 모니터에 띄워 분석해 보겠다.”
“자, 잠깐!”
그가 말릴 사이도 없이 레비는 이벤트 호라이즌의 주조종실 안의 커다란 메인 모니터에 그가 본 그 환상을 띄웠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학렬과 자신이 했었던 맹세의 장면. 처음은 좀 부끄러웠지만, 다시 봐도 정말 아련한 추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문제의 두 번째 장면이 출력됐다. 이를 바라보는 레비는 저도 모르게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예전에 가상화폐 거래소를 해킹할 때 보여 준 전투 모드로 들어갔다. 무언가 엄청난 ‘연산’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환상은 끝이 났다. 레비는 그 뒤 5분 이상을 석상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전투 모드를 해제하고 본래의 보습으로 돌아왔다.
“마하임이 첫 번째 본 것은 그냥 과거의 기억이다. 하지만 그냥 기억이 아니다. 가이아가 숨긴 용사를 보기 위해 무의식 중 가이아에게 보여 준 일종의 증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으, 일단 그렇다 치고 계속 말해 봐.”
레비의 말은 그야말로 의문투성이였다. 그나마 레비와 공유하고 있는 기억을 토대로 겨우 이해는 했는데 여전히 무슨 말인지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레비는 계속 말을 이었다.
“가이아는 별이 가진 영혼 중에서도 상급 영혼. 함부로 자신이 선택한 최강의 전사를 보여 줄 이유가 없다. 그래서 마하임, 너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 기억을 가이아에게 보여 준 것 같다.”
“저기,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가는데, 한 줄 요약 좀 안 될까?”
“…불가능하다.”
“…….”
마하임과 레비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마하임은 그다음 환상이 궁금해 결국 먼저 입을 때고 말았다.
“그래, 그렇다 치고 내가 본 두 번째 환상은 뭐지?”
“그건 현실 그 자체다. 라이칸슬로프로 변해 죽은 ‘학렬’은 가이아에게 선택받아 완전 부활. ‘가이아’의 최강의 수호령이 된 것을 실시간으로 본 것이다.”
“가, 가이아 최강의 수호령?!”
“지구식으로는 ‘아서’라 불리는 모양이다.”
노아의 말을 듣고서야 마하임은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죽인 학렬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별의 수호자 중 최고의 수호자인 ‘별의 수호령’이 되었단 것을.
이것이야말로 운명의 장난일까? 아니다. 이건 분명 영악한 가이아가 치밀하게 계획하고 의도한 것일 터였다.
“하하, 하하하하!”
마하임은 시원하게 웃었다. 이제 영원히 못 볼 줄 알았던 자신의 친우를 다시 볼 수 있다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 수 있으랴!
게다가 가이아의 수호령이 되다니! 너무 기뻐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웃을 일이 아니다. 학렬은 너의 적이었다. 우리를 적대시할 수도 있다.”
“하하, 걱정 마. 그럴 리 없어. 학렬은 그저 미라에게 속았던 것뿐이야. 그놈에 대해서라면 엉덩이에 난 점까지 난 다 알고 있지."
레비의 걱정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학렬이라면 자신의 힘이 되어 줄 것이 분명했다.
언젠가 때와 기한이 되면 학렬은 가이아의 수호령 ‘아서’로 각성하여 자신의 앞에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가이아가 계획한 필연!
“좋아! 나도 질 수 없지! 참 그전에 먼저 확인할 게 하나 있거든. 잠시만 자리를 비켜 줄래? 민아랑 잠시 할 말이 있어.”
“알겠다. 난 암호화폐 거래소 해킹 상황을 다시 한번 체크해 보겠다. 남은 시간은 25일. 하루 정도의 오차가 있을 수도 있다.”
“그래, 알았으니까 수고 좀 해 줘.”
“그럼 심연의 어둠의 가호가 함께하길.”
“그런 가호는 좀….”
“그럼 인류를 창조한 시작의 빛의 가호가 함께하길. 이게 좋겠나? 뭐 상관없지만.”
레비는 이 말을 남기고 함교 밖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마하임은 민아와 통신을 위해 링크를 활성화시켰다.
“자는 척할래? 안 자는 거 다 알거든? 네 뇌 상태까지도 다 체크하고 있어. 렘수면 상태도 아니고 말짱한 상태잖아!”
민아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잠시 후 민아의 목소리가 링크를 타고 내 뇌로 파고들었다.
“꺄악, 변태! 역시 다 알고 있었어! 그 괴상한 치료. 그거 그냥 치료가 아니었죠? 내 몸속에 이상한 것을 넣은 게 틀림없어. 아마도 시각 정보뿐 아니라 청각, 후각 정보도 다 훔쳐볼 수 있을 게 뻔해! 이건 심각한 사생활 침해야! 보스, 변태!”
“…….”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민아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실제로 링크는 민아가 말한 기능보다 더 디테일한 감시 체계로 운영 제어되고 있었지만, 그것까지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적이 있는 탓에, 더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 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미안. 사과할게. 긴급 상황 아니면 사생활까지 침해하지는 않을 거니 걱정 마. 그보다 나한테 할 말이 있을 텐데?”
“어라? 무슨 말씀이신지?”
딴청을 피우는 민아. 그녀의 뇌파를 살피던 마하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민아. 아니면 넷상에서 썼던 전설의 닉네임 ‘여제’라고 불러 줄까? 그런 어설픈 거짓말이 나한테 통하리라 생각하진 않겠지?”
“호호호, 역시 사장님은 못 속이겠네. 완벽하게 속였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다 알고 계셨구나. 지금 주조종실에 계신 거 맞죠? 샤워만 하고 바로 그리로 가죠.”
민아는 이렇게 말하고 통신을 일방적으로 끊었다.
그리고 얼마 후 민아는 자신의 알몸이 보일 듯 말 듯한 새하얀 티셔츠와 핫팬츠 하나만을 걸치고 마하임 앞에 나타났다.
“민아, 그 꼴이 뭐냐. 나도 일단은 남자거든.”
“거짓말. 저는 다 알고 있어요. 보스가 저를 여성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거.”
“…….”
민아의 말에 마하임은 다시 한번 놀라고 있었다. 레비와 하나가 되면서 성욕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을 보아도 마하임은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냥 아름답구나. 귀엽네. 딱 이 정도의 감정뿐. 성적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저는 다 알 수 있죠. 그냥 보이거든요. 괜히 ‘여제’겠어요?”
민아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여제. 그녀의 중국 팬들이 지어 준 민아의 별칭. 그 이름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일반적으로 통하는 것은 ‘여자 제갈공명’을 줄여서 ‘여제’였다.
제갈공명은 중국을 대표하는 소설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삼국지에 나오는 전설적인 책사로서, 위촉오로 나누어지는 천하삼분의 계책의 주인공이었다.
물론 그의 능력이 소설 삼국지에서 과장된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삼국지에 나오는 모든 책사 중 최상급 책사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중국에서는 아예 그의 사당을 지어 놓고 신으로 모시는 사람도 있는 수준이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 그러셔. 그래서 쓰랄과 싸울 때도 대충대충 싸웠구나?”
“어머 그것도 아셨어요? 제 연기를 모두 간파하다니, 정말 처음이에요. 사장님 정말 대단해요!”
민아는 정말 놀라고 있었다. 분명 완벽하게 속였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의심을 살까 봐 일부러 양팔이 부러지는 위험도 감수했었다.
표정 연기 및 감정 연기도 완벽했다고 민아는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신비하기까지 한 남자는 이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가관이더군. 싸우다가 일부러 스쳐서 맞고 못 일어나는 척하고 꿀잠을 자지 않나, 철저히 동료들을 서포트하면서 너무 튀지도, 너무 떨어지지도 않게 쓰랄에게 두들겨 맞는 척을 하더군.”
“헤헤, 뭐 나 혼자 튀면 다들 안 좋아할 거 뻔한데 힘 조절해야죠.”
“뭐? 힘 조절?”
마하임은 민아의 말에 깜짝 놀랐다. 힘 조절이라니, 아무리 봐도 지금의 민아로서는 쓰랄을 이길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자신이 힘 조절을 해 가며 쓰랄과 싸웠다 말하고 있었다.
“솔직히 이야기할게요. 제가 프로 게임단에 있었을 때의 일이었죠. FPS 게임이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이젠 기억도 안 나네.”
민아는 별로 떠올리기 싶지 않은 기억을 다시 떠올려 천천히 썰을 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워x레x트3 인기가 저물자 민아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다른 장르의 게임으로 옮겨 타야만 했다.
그 게임은 당시 한국 최고의 FPS 게임이라 불리는 스페셜x스였다. 민아는 이 새로운 게임에도 놀라울 만큼 빨리 적응해 최연소 FPS 프로게이머가 되어 국내 최고의 팀에 입단했다.
“뭐 그 이후의 스토리는 뻔하죠. 내 적수 따위는 아무도 없었죠. 적도 아군도. 전부 멍청이들밖에 없었거든요. 나는 폭주한 기관차처럼 팀플레이 때도 적에게 돌진해 혼자서 상대 팀을 몰살시켜 버리는 짓도 심심하면 저질렀어요. 아, 그땐 정말 재밌었는데….”
쓴웃음을 짓는 민아. 물론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민아의 신기에 가까운 실력에 전율했다.
하지만 이것이 반복되자 게임은 한없이 루즈해질 수밖에 없었다.
민아가 속한 게임단은 무조건 승리만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민아가 속한 게임단의 분위기가 좋았냐? 그것도 아니었다.
민아가 입단한 지 5달 만에 게임단의 분위기는 완전히 초상집처럼 변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다른 팀원들은 그저 손을 놓고만 있어도 민아 혼자 적을 학살하고 다녔으니 말이다.
감독이 민아에게 제발 협력 플레이를 하라고 부탁까지 했지만 민아의 귀에 그런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철부지였던 민아는 그저 즐거웠다. 압도적으로 많은 적을 단신으로 쓸어버리는 것이 그 어떤 게임을 했을 때보다 통쾌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났죠. 공식 대회 결승전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