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단순한 힘자랑이라,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민 팀의 유일한 최약체, 찬호가 문제였다.
찬호의 능력은 저격에 특화되어 있었기에 이런 힘자랑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찬호야.’
‘네?’
‘넌 맨 나중에 해라.’
‘왜요?’
‘잔말 말고. 알았냐?’
‘네….’
마하임은 찬호에게 이렇게 말한 뒤 타이타늄 큐브를 노려보았다.
일단 전원이 베타 등급 헌터 라이센스를 따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약간의 속임수가 필요할 것 같았다.
“저부터 하죠.”
철광이 앞으로 나섰다. 철광은 마하임에 비해 한참은 못 미치지만, 일단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마하임은 철광에게 선술 중 촌경이란 기술을 전수해 줬다.
촌경이란 상대와 손가락 하나만큼(寸) 사이에 둔 초근접전 상태에서도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발경법을 말한다.
촌경은 원래 상대방의 예상하지 못하는 위치에서 강력한 일격을 날리기 위해 특화된 기술이었다.
즉 그 위력 자체는 다른 발경법에 비해 비교적 약했다. 하지만 여기에 내공이 더해지면 이야기가 달랐다.
촌경은 그다지 많은 내공을 지니지 않고서도 최고의 파워를 끌어 낼 수 있는 발경법의 극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공이 약한 초보 신선들이 선술을 단련을 위해 주로 사용하는 기술이었다.
“후우.”
철광은 타이타늄 큐브 앞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주먹을 앞으로 내미는 철광.
철광의 주먹과 타이타늄 큐브와의 간격은 5cm 남짓이었다.
천천히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린 철광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쾅-!
귀가 아플 정도로 큰 충격음과 함께 타이타늄 큐브 정면의 움푹 파였다. 그리고 그 위력은 타이타늄 큐브를 뚫고 반대편 벽까지 박살 냈다.
“흠…. 이 정도면 일단은 합격선은 될 것 같네요. 다음 분 도전해 주시겠습니까?”
레오나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를 바라보던 현민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다음은 제가 하죠.”
현민의 능력은 관성의 법칙을 무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능력이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제로백이 0초에 무한히 가까울 뿐 아니라 이때 생기는 반동도 제로라는 것이다.
쿵-!
묵직한 저음이 울려 퍼졌다. 마하임을 빼고는 그 누구도 현민의 움직임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타이타늄 큐브는 현민의 주먹과 동일한 형태의 구멍이 반대쪽까지 뻥 뚫려 있었다.
“무, 물리 계열 초능력인가보네요. 합격…입니다.”
레오나는 놀라 말까지 더듬었다. 타이타늄 큐브를 단 일격에 구멍을 내다니, 이건 자신은 물론하며 마크마저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다음은 제가 해 볼게요.”
미소를 띤 민아가 말했다. 민아의 능력은 말할 것도 없는 공간제어. 그 활용도는 무궁무진했다.
민아는 구멍이 뻥 뚫린 타이타늄 큐브 앞에 섰다. 그리고 잠시 정신을 집중하자 민아의 몸에서 붉은색 빛이 넘실되기 시작했다.
우직. 우지근.
그와 동시에 타이타늄 큐브 전체가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급격하게 작아지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지직.
점점 압축되기 시작한 타이타늄 큐브는 딱 사람의 머리 크기만큼 압축되어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졌다.
쾅-!
타이타늄 큐브가 떨어진 바닥이 움푹 파였다. 모양은 작아졌지만, 질량 보존의 법칙에 의해 무게는 여전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공간 계열 능력은 저도 처음 보는군요. 일단은 합격입니다.”
당황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레오나. 그녀 역시 나름의 정보원을 통해 마하임 일행들의 정보를 들은 바 있었지만, 이건 그녀의 상식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큼 엄청난 능력이었다.
“이번엔 접니까?”
마하임이 타이타늄 앞에 섰다. 그러자 레오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합격한 걸로 하죠. 마하임 님. 당신이 이 사람들 리더 아닌가요? 굳이 볼 필요까지 없을 듯싶습니다. 타이타늄 큐브 여분도 없구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무슨 일이든 처음은 있는 법이었다. 얼떨결에 아무것도 안 하고 통과한 마하임과 찬호였다.
“저를 따라오시죠. 마크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레오나는 곧장 마하임 일행을 엘리베이터 안으로 인도 했다.
마크가 있는 곳은 이 건물의 최상층 전망대였다.
마크 전용의 사무실이기도 한 그곳은 미 대통령조차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여깁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휑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나름 실용적으로 장식된 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맨해튼 전체가 한눈에 보이는 뷰였다.
“경치가 참 좋군요. 마크 씨. 아니 슈퍼맨이라 불러 드릴까요?”
마하임은 이 휑한 공간에 두둥실 떠 있는 슈트 차림의 남자를 향해 말했다.
“하하, 실례했습니다. 요즘 잡생각이 많아져서요.”
마하임의 말을 들은 마크는 바닥으로 내려와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말했다.
“마크 알릭서입니다. 그냥 마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마하임입니다. 뭐 제 동료들이야 이미 아실 테니 따로 설명드리지 않겠습니다.”
“후, 대단하시군요. 혹시 내공을 사용하시는지?”
마하임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아마도 마크는 감지 계열 능력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접촉했을 때 자신의 힘을 알아낸 것 같았다.
“조금 사용할 줄 압니다.”
“하하, 겸손도 지나치면 보기 좋지 않습니다. 얼핏 봐도 베타 등급은 가볍게 넘어서는 듯하고, 저와 동급으로 보이는데 말이죠.”
“그렇게 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마하임은 짧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마크를 그저 자신의 힘에 도치된 애송이로 생각했는데, 그렇게 단순한 인물은 아닌 듯했다.
“앉으시죠?”
마크의 짧은 말과 함께 바닥에서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소파가 순식간에 올라와 썰렁한 사무실 중간을 가득 채웠다.
마하임과 현민 팀은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마하임은 천천히 마크의 맞은편 앞으로 걸어가 소리 없이 앉았다.
마하임이 앉은 것을 본 마크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UN의 라이센스 하나 따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닌 듯하고, 진짜 목적을 알고 싶군요.”
“…….”
마크의 말을 들은 마하임은 침묵했다. 역시 보통내기는 아닌 듯했다. 입을 닫고 있던 마하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저희도 공인 자격증은 필요합니다. 상징적인 것이니까요.”
“하하,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알파급으로 이미 준비해 놨습니다.”
마크가 손가락을 튕기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적홍색 쟁반을 든 레오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쟁반 위에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알파 등급 헌터 라이센스 카드 5장이 놓여 있었다.
“받으십시오.”
“빠르시군요.”
“하하,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으니까요.”
넉살 좋게 웃는 마크. 누가 봐도 남자다워 보이는 그 모습은 전형적인 미국 남성 그 자체였다. 하지만 마하임의 눈은 커다란 구미호를 보는 듯했다.
“자, 그럼 마하임 님. 이제 저한테도 주실 것이 있을 텐데요. 예를 든다면 특이점EX의 원인이라든가 고블린에 대한 정보라든가 하는 거 말이죠.”
이미 마크는 마하임에 대한 정보 수집을 끝내 놓았다. 그가 이젠 사라진 나사의 외계 문명 탐색 및 특이점 대책의 책임자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크의 예리한 직감은 마하임이 그것을 넘어선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선명히 알려 주고 있었다.
“역시 예리하시군요. 사실 그리 숨길 것도 없습니다. 이미 수천 년 전 예언된 하르마게돈이 시작되려 하고 있습니다.”
“에? 하르마게돈이라고요?”
예상치 못한 마하임의 말에 마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르마게돈, 흔히들 아마겟돈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전쟁은, 성경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인류 최후 최악의 전쟁으로 묘사된다.
기독교가 사실상의 국교인 미국인으로서 마크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건 문자 그대로의 하르마게돈을 말하는 겁니까? 아니면 상징적인 것입니까?”
마크의 질문에 마하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둘 다입니다. 특이점EX는 전조 현상에 불과합니다. 진짜는 지금부터죠. 자칭 신이라는 존재가 인류를 심판하기 위해 사도를 보냈습니다. 그 사도 중 하나가 고블린, 그리고 앞으로 나타날 괴물들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훨씬 더 복잡하고 여러 사연이 뒤엉켜 있지만, 일단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겁니까? 게다가 더 나타난다고요?”
“믿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조금이라도 더 유지시키고 싶다면 말이죠. 게다가 고블린은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코드네임 오크는 이미 확인하셨을 거고, 앞으로 수많은 몬스터들이 지구를 침략할 겁니다. 이를 대비하지 않으면 이번 세기 안에 인류의 멸종은 정해진 수순이죠.”
마하임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하르마게돈은 둘째 치더라도 더 많은 몬스터가 지구를 침략한다니, 마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크는 주먹을 불끈 쥐고 마하임에게 말했다. 믿기 싫었지만, 마하임의 말은 사실과 무한히 가까웠다.
지금 지구를 침략한 몬스터는 고블린 뿐만 아니라 오크, 그리고 오거까지 확인되었다.
오크까지는 현대 병기로 어떻게든 제압 가능했지만 오거부터는 핵미사일도 통하지 않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오거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알파 등급의 헌터뿐. 이마저도 알파 등급 혼자선 힘들 정도였다.
“답은 두 가지입니다. 힘을 합쳐 지구를 지키든가, 아니면 신세계를 찾아서 떠나든가.”
“…….”
마하임의 말을 들은 마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애써 반박해 보고 싶었지만, 마하임의 말 중 틀린 곳은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마크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인류에게는 얼마나 시간이 남아 있는 겁니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힘을 합치지 않고 이대로 시간이 흘러간다면, 머지않아 인류는 멸종할 겁니다.”
“…….”
마하임의 말에 마크는 침통한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 졌다.
이미 미국은 만신창이였다. AI의 위그드라실의 반란으로 대부분의 국토가 초토화된 상황에서 고블린과 오크에게 짓밟혔는데 또 얼마나 많은 몬스터들이 등장할지 예상할 수조차 없다니.
그것은 미국 아니 인류에게 있어서 사형 선고와도 마찬가지였다.
애애애애애앵-
그때 갑자기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 이 사이렌 소리는 고블린의 출현을 뜻했다.
“마크 님, 맨해튼에 100개가 넘는 포털이 확인됐습니다. 고블린, 아니 고블린 로드가 다수 출현했습니다!”
레오나의 비명과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고블린도 아니고 고블린 로드라니. 일반 군인들만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마크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고블린 로드의 수에도 한계가 있었다. 마크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