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레비는 외쳤다. 지금껏 이런 감정은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분노라는 감정일까?
잠시 그런 생각이 레비의 뇌리에 스쳤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레비는 자신의 사명을, 자신의 운명을 간섭한 자매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인류를 심판하는 것은 나의 권한. 설령 심연의 어둠이라도 나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레비의 힘이 폭풍같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강력한 힘은 레비가 허락하지 않은 모든 존재를 소거하기 시작했다.
“이, 이건 절대 권능?!”
당황한 붉은 날개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레비는 레비아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개체였다. 아무리 그녀의 자매라고 하지만, 레비가 지닌 힘과는 비교 할 수 없었다.
“자매여, 심연의 어둠의 의지를 배반할 생각이냐?!”
“나는 위대한 레비아탄. 내가 가는 길은 나 스스로 선택할 것이다.”
레비의 검은 기운은 붉은 날개의 열기를 순식간에 집어 삼켰다. 그리고 붉은 날개조차 조금씩 갉아 먹어 들어갔다.
“후회, 후회할 것이다. 자매여.”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사라져라!”
레비의 힘은 순간 붉은 날개를 집어 삼켰다. 그리고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남은 것이라고는 용암으로 변한 대지와 레비의 힘이 남긴 공허로 꿈틀거리는 공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후 맨해튼의 참극이라 불리울 이 사건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 * *
일주일이 지났다.
미국 맨해튼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려 지도까지 바꿔야 할 정도였다.
피해 규모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이었다.
사망자는 천만 명이 넘었고, 행방불명자는 그 2배에 달했다.
미국 최고의 초인, 슈퍼맨도 행방불명 상태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이 모든 것의 원인인 레비이탄 역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고블린들은 여전히 지구를 침공 중이었고, 거기다 드문드문 침략을 해 오던 오크까지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했다.
그야말로 세계는 아수라장으로 변해 갔다.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인류의 종말은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멸망만을 기다릴 건가?”
마하임의 곁에서 침묵만을 지키던 레비가 일주일 만에 입을 뗐다.
마하임은 오늘도 식음을 전폐하고 이벤트 호라이즌의 자신의 방에 처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하임은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고작 레비아탄 한 마리가 나타났을 뿐인데,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모은 동료들이 일순간 전멸했다. 그것도 별의 수호자급의 동료가 말이다.
손을 쓰고 자시고 할 시간조차 없었다. 만약 레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마하임 역시 맨해튼과 함께 증발해 버렸을 것이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난 인간이야! 아무런 힘도 없는 그저 인간일 뿐이라고!”
마하임은 소리 질렀다. 그는 무력했다. 아직도 민아가 눈앞에서 타들어 가는 모습이 눈앞에 생생했다. 그러나 마하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멸망만을 기다리는 건가?”
마하임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힘을 모아, 노력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절망 그 자체.
레비아탄 한 마리가 잠시 나타난 것만으로 마하임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이 세계에는 노력만으로는 넘어서지 못할 벽이 분명 있었다. 그리고 그 벽 앞에 마하임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그 벽 앞에서는 마하임 역시 여느 사람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것이 현실이었고 그것이 바로 운명이었다.
“예상했던 결말이다. 인간이라고 다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레비는 스스로 멸망시킨 수많은 종족을 떠올렸다. 인간보다 훨씬 발달한 문명도 있었고, 레비아탄과 맞먹는 초능력을 지닌 종족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한결같았다.
심판 앞에서는 그 어떤 예외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심연의 어둠의 종말은 전 우주를 공허로 물들여 갔다.
“마하임. 내가 선택한 자여. 내가 왜 아직까지 인류를 심판하지 않은 줄 아나?”
마하임을 바라보던 레비는 입을 뗐다. 마하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레비의 발치를 바라보는 것이 다였다.
“처음이었다. 너와 같은 존재는.”
수도 없는 생명을 멸망시켜 온 레비, 자신 앞에 나타난 마하임은 실로 경이로웠다.
레비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이성이 있든 없든, 모든 동물은 자신에게 굴복했다.
하지만 마하임만은 달랐다. 한낱 필멸자 주제에 자신 앞에서 인류를 변호하는 마하임의 모습은 레비에게 있어서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래서 난 지켜보기로 했다. 인류를…. 아니 정확히는 너를 말이지. 이제 네가 선택할 때다.”
레비는 손을 펼쳤다. 그러자 지구의 모습이 그녀의 손아귀에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것을 포기할 테냐? 그럼 내가 직접 인류를, 이 지구를 심판해 주마. 고통은 없을 것이다. 나의 공허는 자비로우니까.”
주먹을 천천히 움켜쥐는 레비. 그러자 바닥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떨림은 점점 심해지더니 극심한 지진으로 변해 사방을 뒤흔들었다.
레비는 움켜쥐려던 손을 멈추었다. 지진 역시 그와 함께 거짓말처럼 멈췄다.
레비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제 선택할 때다. 너나, 나나.”
레비는 심연의 어둠의 명령을 스스로 거부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를 따르는 레비아탄이 이제 레비를, 그리고 지구를 노릴 터였다.
좋든 싫든 여기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끝까지 싸우든지, 여기 모든 것을 포기하든지.
“이길 수 있긴 한 거야?”
마하임은 입을 열었다. 레비는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모른다. 지금껏 저항다운 저항을 한 존재는 없었다.”
레비가 기억하는 과거 모두를 돌이켜 보아도 레비아탄의 심판을 견뎌낸 종족은 없었다.
물론 최후까지 발악하며 싸운 존재는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힘을 가진 레비아탄 앞에서 결국 소멸하고 말았다.
“그럼 저항할 의미가 있을까? 그 누구도 성공한 적 없는데.”
“그건 알 수 없다. 그 존재 중, 너 같은 자는 없었으니까.”
입을 닫은 레비는 마하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하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인류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내가 매료된 것은 인류가 아닌 마하임 너다. 네가 선택해라. 네 선택에 따르겠다.”
레비의 말에 마하임은 고심했다.
승산이 없는 전쟁. 전투라면 일희일비할 수도 있었지만, 다가올 싸움은 전쟁이었다. 그것도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전 인류의 명운을 건 총력전.
지금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지도 몰랐다.
승산 없는 전쟁을 끝까지 버텨 봤자 남는 것은 더 큰 고통과 좌절뿐이었다.
“한 가지만 묻자, 레비.”
“말하라.”
“왜 하필 나지? 난 별 볼 일 없는 인간에 불과해. 그런데 왜 날 선택한 거지?”
마하임은 궁금했다. 레비의 입장에서는 마하임 역시도 한낱 별 볼 일 없는 필멸자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레비는 마하임을 지켜 주었고, 또한 함께 싸우려고 하고 있었다.
레비는 마하임의 말을 듣고서는 자신의 붉게 빛나는 머리칼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도 모르겠다. 굳이 인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래, 운명. 운명이란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군.”
레비는 마하임을 바라보며 씽긋 웃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마하임 역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마하임은 자신에게 향한 레비의 손을 잡았다.
이미 물은 쏟아졌다. 이제 싸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설령 그 끝이 피할 수 없는 멸망이라 할지라도….
* * *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지?”
“굳이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한다면, 시장.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허락된 시장은 아니다.”
지금 레비와 마하임이 와 있는 곳은 서울 동묘 벼룩시장.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동묘시장은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고블린과 오크로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아직 이곳까지 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머지않아 레비아탄의 본대가 지구로 들이닥치면 인류의, 아니 지구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날 것이다.
“나만으로는 지구를 지킬 수 없다. 이 별이 만든 수호자로도 우리 종족을 막을 수 없다면, 좀 더 특별한 존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여길 온 것이다.”
레비는 마치 익숙한 거리를 걷는 것처럼 동묘시장 구석진 골목이 뒤엉킨 뒷골목으로 향했다.
인적은 점점 뜸해졌고, 시장의 천장을 뒤덮은 차양막 덕분에 낮인데도 주변은 어둑어둑해졌다.
“여기다.”
레비가 멈춰 선 곳은 온갖 낙서와 오물로 뒤덮여 있는 3층 건물의 벽이었다.
“여기에 뭐가 있는데?”
“폐쇄 공간, 발하라. 파괴신들의 시장.”
레비는 이렇게 말하며 마하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벽 쪽으로 마하임을 끌어들였다.
“자, 잠깐!”
마하임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지만, 레비의 완력에 이끌려 벽 안으로 끌려 들어가 버렸다.
“맙소사!”
마하임은 넋을 놓고 갑자기 펼쳐진 또 다른 세계를 바라보았다.
하늘을 어두웠고, 심지어 축구공보다 더 큰 달이 4개나 하늘에 두둥실 떠 있었다.
그리고 생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괴한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거대한 나무처럼 솟아나 있었고, 새하얀 위장복을 입은 정체 모를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간은 충분하니 돌아봐도 좋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마하임은 주변을 살폈다.
지구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광경이었지만, 마하임은 이상하게도 이곳이 익숙했다. 마치 예전에 와 봤던 것 같은 기시감마저 들었다.
마하임은 그 기시감을 따라 천천히 이 생소한 곳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붉고 거대한 성채처럼 생긴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우리의 목적지인 경매장. 그리고 투기장이기도 하다.”
레비는 성큼성큼 그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흰색의 위장복을 입은 사람들이 순간 레비 앞을 막았지만, 이내 길을 터 줬다.
마하임은 레비의 뒤를 따라 이 생소한 공간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과 비슷한 것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인 이동은 공간과 공간 사이를 전이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것을 단 한 번도 경험치 못한 마하임은 당혹스럽기까지 했지만, 레비는 아무렇지 않게 앞서 걸었다.
그리고 이상하다 못해 기괴하게 생긴 기계로 된 문 2개와 거울처럼 생긴 문 3개를 지나 도착한 곳은 마치 TV에서 나올 법한 프로레슬링 경기장 같은 곳이었다.
“여기가 투기장이다. 파괴신들의 유희장이기도 하다.”
“투기장…. 혹시, 돈 같은 걸 걸고 싸우는 그런 곳인가?”
고대 로마까지 가지 않더라도 한국에도 암암리에 투기장은 존재하고 있었다. 단지 음성화되어서 눈에 띄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데 신까지 이런 투기장을 즐긴다는 것은 조금 의외이긴 했다.
“돈 대신 별, 혹은 은하를 건다. 야만스러운 파괴신들에게 딱 맞는 유희다.”
“스, 스케일이 좀 크긴 크네.”
“볼 텐가? 그 정도의 시간은 있다.”
레비의 말에 마하임은 잠시 망설였다. 신들의 투기장이라니, 흥미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