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마하임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것은 죄책감이랄까? 눈앞에서 동료 전부를 잃은 마하임에게 있어서 이런 호기심마저 사치처럼 느껴졌다.
마하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비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예정대로 경매장으로 간다.”
레비는 익숙한 걸음걸이로 이 생소한 건물 안을 가로질렀다.
아마도 레비는 이곳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마하임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레비가 굳이 지금 시점에 자신을 여기로 데려온 것에는 뭔가 이유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이것 역시 운명…이란 건가?’
마하임은 씁쓸히 웃으며 레비의 뒤를 따랐다.
레비는 마하임으로서는 짐작도 하기 힘든 기묘한 공간을 넘나들며 위로 또 위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마치 거대한 무대와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 무대 중간에는 밖에서 보았던 새하얀 위장복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그럼…. 다음 물건이다.”
그 사람은 한눈에 봐도 인간과는 동떨어진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새하얀 위장복이 그 기운을 어느 정도 감추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저자의 모든 것을 가릴 수는 없었다.
“뭐, 뭐야? 설마 저게 신?”
“아니다. 저건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지. 하지만 적어도 이 경매장에서만큼은 절대자다.”
레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위장복을 입은 사람 곁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검게 일렁이는 커다란 관이었다. 그 관은 마치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를 묻은 관같이 생겼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표면에 새겨진 기묘한 무늬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고 그 무늬를 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빨려 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래 보지 마라. 저건 음차원의 물건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이를 수 있다.”
레비의 말에 마하임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강렬한 기운에 이끌려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이를 본 레비는 마하임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제야 그 기운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고마워, 레비.”
“우리가 기다리는 물건도 곧 나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레비는 이렇게 말하고 마하임의 앞에 섰다.
웅성거리는 소리, 그리고 끔찍한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지옥에서 울려오는 것만 같았다.
마하임은 귀를 틀어막고 한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하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품목은…. 인간이다. 단, 노예는 아니다. 고용해야 한다. 당사자가 거부하면 계약은 거부된다.”
마하임은 양손으로 막고 있던 귀에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레비는 몸을 틀어 단상 위의 하얀 위장복을 입은 사람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소개하겠다. 닥터 하륜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닥터 하륜. 그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전설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국적은 아무도 몰랐다.
특이점EX가 일어난 7년 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최초의 상용 핵융합로를 개발한 당사자였다.
뿐만 아니라 연구실 수준에 머물러 있던 양자 컴퓨터의 실용화도 그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특이점EX 이후 고블린에게 열화우라늄탄이 통용된다는 것을 밝혀낸 과학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3년 전부터 행방불명 상태였다.
할 수만 있다면 마하임 역시 만나 보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흔적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닥터 하륜은 천천히 경매장의 단상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은회색으로 반짝이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륜은 자신의 본모습을 보이기를 극도로 꺼려했기에 그의 본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때문에 하륜은 철가면이란 별칭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 계열이므로 달러로 결제 바란다. 1억 달러에서부터 시작한다.”
새하얀 위장복을 입은 자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1억 달러라니,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 천문학적 금액은 순식간에 더욱 더 높아지기 시작했다.
“1억 2천.”
누군가의 외침. 누가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외침 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1억 5천.”
“2억.”
“3억.”
가격은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마하임은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이를 지켜 볼 뿐이었다.
“5억.”
마하임의 뒤에서 들려온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 5억 달러라…. 국가 예산급의 돈이었다. 주위는 한동안 조용해졌다.
“5억 달러. 더 없나? 더 없다면….”
바로 그때 마하임 옆에 앉아 있던 레비가 입을 열었다.
“7억 달러.”
레비의 말에 마하임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7억 달러면 한화로 약 8천억이 넘었다.
레비는 그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돈은 충분하다. 가상화폐 거래소 12곳을 해킹, 가상 계좌를 이용해 분산 재투자를 이용해 10억 달러 정도를 확보해 놨다.”
마하임은 그제야 레비에게 맞긴 가상화폐 거래소 해킹 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쨌거나 레비가 7억 달러를 부른 시점에서 경매는 사실상 끝나 있었다.
위장복을 입은 사람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7억 달러 나왔다. 더는 없는가?”
주위는 고요했다. 레비는 무뚝뚝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7억 달러에 낙찰됐다. 낙찰자는 경매 후 경매 진행실로 온다. 그럼 오늘 경매는 끝이다.”
경매가 끝났다.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압도적인 존재감 역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하임은 그제야 겨우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경매로군.”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따라와라.”
레비는 소리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문과 문, 공간과 공간이 교차했다. 이곳에서는 공간이라는 개념조차 옅어져서 방향 감각까지 마비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레비와 마하임은 텅 빈 창고 같은 곳에 도착했다.
안은 상당히 넓었고, 조명은 중앙에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조명 아래 새하얀 양복 상하의에 은색 금속 마스크를 쓴 훤칠한 키의 남자 한 명이 의자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기다렸습니다. 미천한 이 몸의 낙찰자이신 모양이죠?”
하륜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하임과 레비를 위아래로 슥 훑어보더니 주변을 천천히 돌며 입을 열었다.
“두 분의 소문은 이미 들었습니다. 그 악명 높은 심연의 어둠에게 반기를 드셨다죠?”
레비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하임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도 알겠군.”
“네. 저를 포섭해서 심연의 어둠과 싸워 보자는 거겠죠. 하지만 사양합니다. 전 승산 없는 싸움은 안 하거든요.”
하륜은 뚜벅뚜벅 걸어서 자신이 처음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거기 레비아탄님이 무슨 생각으로 심연의 어둠에게 반기를 들었는지 몰라도, 애초에 이건 말도 안 되는 싸움입니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다랄까요? 아니 그것보다 더 낮죠. 순수하게 확률만 따진다면 말이죠.”
어깨를 으쓱이며 하륜은 말했다. 마하임은 그의 말을 듣고 저도 이를 악물었다.
“네놈도 인간이잖아! 지구에 심연의 어둠이 강림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는 있는 거냐?!”
마하임의 말에 하륜은 잠시 입을 닫았다. 그리고 천천히 하륜은 입을 열었다.
“인류는 멸종하겠죠. 하지만 이 세계에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 종족이 사라질 뿐이죠.”
“그 한 종족에 네놈도 포함되어 있다.”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운명이랄까?”
“닥쳐!”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하륜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그딴 운명 개나 주라고 해! 난 인정할 수 없어! 심연의 어둠? 절대자의 심판?! 누가 누구를 심판한단 말인가?! 인류를 심판할 자는 인류뿐이다!”
마하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하륜은 잠자코 마하임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하륜은 마하임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마하임 님의 희망 사항이겠죠. 인류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발버둥은 아무런 의미가 없죠. 그것이 필멸자의 운명입니다.”
이 말을 들은 마하임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마하임 역시 어느 정도 깨닫고는 있었다.
맨해튼이 레비아탄 한 마리에 의해 눈 깜짝할 사이에 소멸되어 버렸다.
만약 레비가 없었다면, 그것으로 인류의 운명은 끝났을 터였다.
“운명….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는가? 전생자여.”
잠자코 서 있던 레비가 입을 열었다. 하륜은 레비의 말을 듣고선 난처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전 그런 거창한 능력은 없습니다. 그냥 죽지 못해 살고 있을 뿐이죠.”
“결과적으로는 똑같다. 넌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으니까.”
“…역시 알고 오신 거군요. 하아.”
하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인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냥 아주 오래전, 저주인지 축복일지 모르는 이것이 그를 죽음에서 떼어 놓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100년 주기로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윤회 속에서 그는 영겁의 세월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도와는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
“절 두 번 다시 ‘전생’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하륜은 몸을 일으켜 레비를 향해 말했다.
레비는 하륜의 말을 듣고선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뗐다.
“나로선 불가능하다.”
“역시나…. 하하. 괜한 기대였나 보네요.”
“하지만 심연의 어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레비의 말을 들은 하륜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지금껏 하륜은 이 지겨운 생의 고리를 끊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해 보았다. 하지만 결국 모두 실패하고 지금껏 살아남아 버렸다.
하지만 그 역시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우주의 절대적인 파괴자, 심연의 어둠에게 직접 소거당해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이거 꽤나 매력적인 방법이군요. 심연의 어둠에게 직접 죽임을 당한다라….”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적어도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한 방법이었으니까.
심연의 어둠이 직접 심판에 나서는 일은 수억 년 이상 살아온 하륜 역시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심연의 어둠은 항상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레비아탄 무리를 이용해 심판을 내렸고, 하륜 역시 그 심판에 휘말려 전생한 기억이 수도 없이 많이 있었다.
“하하하! 좋습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까짓거 한번 해보죠. 그 조건을 맞추려면 우선 레비아탄 무리부터 없애야 한다. 그거 맞죠?”
하륜의 말에 레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륜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먼저 심연의 어둠의 수족인 레비아탄 무리를 없애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일단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하륜은 기뻤다.
게다가 그에게 있어서 꼭 이번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죽으면 또다시 시작하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하륜의 가슴 깊숙이 잠자고 있던 말할 수 없는 직감이 그의 영혼에 속삭이고 있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이 기회를 놓치면 두 번은 없다고.
“좋습니다. 그럼 주사위를 굴려 볼까요? 영원을 걸고서 말이죠.”
하륜은 시원스럽게 웃었다. 그렇게 그의 전쟁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