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마하임은 눈을 떴다. 그리고 보아 왔던 모든 것은 꿈처럼 환상과 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마하임은 차가운 현실로 돌아왔다.
“큭, 크크큭. 크하하하하!”
마하임은 미친 듯 웃었다. 너무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받아들여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지난 세월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이 그저 연극에 불과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레비아탄과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병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마하임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건….”
“다가오지 마!”
레비가 마하임에게 한 발짝 다가가자 마하임이 소리 질렀다.
그 이유야 어쨌건 마하임은 자신은 철저히 이용당한 것에 불과했다.
마하임이 알고 있었던 것은 모두 거짓이었고, 심지어 지금 이 상황조차 ‘진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제 어떡하죠? 레비 님.”
신시아 황제가 말했다. 레비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입을 뗐다.
“우린 항상 시간이 부족했죠. 안타깝지만, 이 배의 운명도 오늘까지인 듯싶습니다.”
레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 거대한 지하 동공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구그그릉 퍼어어엉!
그리고 뒤이어진 천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폭음. 그 폭음은 이 동공을 단숨에 휩쓸고 지나갔다.
“결국 따라잡혔나?”
시문은 바닥에 엎드려 입술 악물었다. 레비는 입술을 깨물며 외쳤다.
“모두 지상으로 전이시킬게요!”
“하지만 마하임 님, 아니 지구 연방 대통령께서 아직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신시아는 자신의 마법으로 오리지널 마하임이 잠들어 있는 캡슐을 보호하며 말했다.
레비는 캡슐에 잠든 마하임을 바라보았다.
지난 500년간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그는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이 방주까지 레비아탄에게 따라잡혔다.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레비는 바닥에 엎드린 채 꿈쩍도 않고 있던 마하임에게 손을 내밀었다.
“운명이 아무리 가혹하다 할지라도, 살아 주세요. 그것이 저의 유일한 소원입니다.”
마하임은 고개를 들었다. 레비는 마하임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 눈물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레비를 향해 입을 연 마하임. 그러자 레비는 마하임에게 다가와 그를 꼭 안아 주었다.
“살아남아 주세요. 모든 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만큼은 기억해 주세요.”
레비의 말이 마하임의 귀, 그리고 가슴 깊숙히 파고 들어갔다. 마하임은 순간 몸이 굳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하임과 레비는 순간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시오니아 성의 하늘 위였다.
쿠르르릉!
하늘은 검게 물들어 있었고, 토네이도를 능가하는 엄청난 돌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 거대한 방주, 시노쿠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기압이 급하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흡입하는 하늘 저 너머에, 500년 전 지구에서 인류를 멸종시킨 레비아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따라잡았다. 배신자.”
“별의 강으로 도망친다고 못 따라잡으리라 생각했나?”
“저항을 포기하라, 그럼 명예로운 소멸을 선사하리라.”
3마리의 레비아탄은 살의가 가득 담긴 울림으로 레비를 향해 외쳤다.
레비아탄들의 크기는 인간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 몸은 핏빛처럼 붉은 깃털로 온몸이 뒤덮여 있었다.
레비는 레비아탄들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결국 이 치킨 게임에서 레비는, 인류는 지고 말았다.
하지만 레비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 그녀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릴 쫓아온 건 너희가 전부냐?”
레비는 웃었다. 심연의 어둠이 직접 강림한 것도 아니었다. 고작 레비아탄 3마리가 전부라면 충분히 싸워 볼 만했던 것이다.
“왜. 우리만으로 부족할 것 같나?”
“네 생각 따위 뻔하다.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본데…. 어림도 없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필멸자나 하는 것. 여기서 모든 것을 끝낸다.”
붉은 오라를 폭발하듯 뿜어내는 레비아탄들. 오라에 노출된 모든 것은 불타오르며 소멸해 갔다.
그것은 레비아탄에게 주어진 파멸의 권능. 그 힘은 모든 물리적, 초자연적 현상을 무시하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쿠르르릉 콰콰쾅-!
500년을 이어 온 시노쿠가 소멸하고 있었다. 아직 이 방주에는 수많은 사람이 생존해 있었지만, 그들을 구할 방법은 없었다.
레비는 원하건 원치 않건 선택을 해야만 했다.
“레비아탄은 자신의 힘에 중독되어 발전이란 게 없지. 하지만 우린 다르다. 지난 500년간 우리가 그냥 놀고 있었던 것 같나?”
레비는 차갑게 웃었다. 인류는 레비아탄과 이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시행착오를 겪었던가?
심지어 이 거대한 방주, 시노쿠조차도 오직 단 하나의 목적, 레비아탄과 싸워 이기기 위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조율되어 있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상관없다.”
레비의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몸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 주변에 뭔가 그림자 같은 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잘 봐 둬. 마하임. 언젠가 당신의 힘이 될 기술이니까.”
그림자와 같은 일렁임은 곧이어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어 갔다. 그 모습은 마하임도 익숙한 것이었다.
“마, 마장기?”
그것은 마하임의 마장기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마하임의 마장기보다 수백 배 큰 모습이었다.
“인류의 무한한 상상력을 베이스로 만든, 궁극의 기술. 이름하야 ‘상상 구현화’.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자만에 빠진 레비아탄 3마리 정도는 간단히 지워 버릴 수 있겠지.”
레비는 웃었다. 레비아탄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것에 본능적인 위험을 느꼈다.
어째선지 그들이 사용한 힘은 저 거대한 마장기에 조금도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헛수고다. 상상 구현화는 인류가 레비아탄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궁극의 기술. 레비아탄의 힘으로는 절대 부술 수 없지.”
희미한 잔상으로 이루어진 거대 마장기는 더욱더 생생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이 차원에 고착시켰다.
“큭! 배신자?! 이건 있을 수 없다.”
“심연의 어둠님이 두렵지도 않은가?!”
“당장 이 사술을 풀어라! 네놈도 레비아탄이지 않는가?”
레비아탄들은 발악을 하며 외쳤다. 레비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마음껏 발버둥 쳐라. 그리고 인류의 무한한 상상력 앞에서 좌절하라.”
레비는 자신의 모든 힘을 개방하여 인류의 최종 병기 ‘상상 구현화’를 완성시켰다.
“믿을 수 없어! 우, 우리가 사라진다!!!”
깜짝 놀란 레비아탄은 소리 질렀다.
이 기술을 레비아탄을 박멸하기 위해 만든 광역 소멸 기술.
그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이 힘은 아직 제어가 불안정했다. 이것은 곧 레비 역시 이 기술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레비의 몸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레비는 희미하게 사라지기 시작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얼마 가지 않아 레비 역시 다른 레비아탄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레비를 주 동력원으로 움직이던 이 방주 역시도 정지할 것이다.
레비는 마하임의 앞으로 다가왔다.
마하임은 여전히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마하임을 바라보며 레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다행히 다른 방주가 근처에 있으니, 살아남을 수 있을 거예요. 구조 신호는 이미 보내 놨답니다. 부디 살아 주시길. 나의 친구, 나의 아들. 안녕.”
그리고 레비는 사라졌다.
시노쿠의 메인 엔진 역시 멈추었다. 그렇게 인류의 6번째 방주는 그 수명을 다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이 우주에는 아직 수십 척 이상의 지구 연합이 만든 방주가 살아남아 있었고, 그중 하나인 방주 ‘가리온’이 시노쿠의 구조 신호를 듣고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는 가리온, 시노쿠 들리는가?
“시노쿠 완전 침묵! 즉시 구조팀을 보내야 합니다.”
“승낙한다. 가용할 인원 전부를 저 방주에 투입한다.
가리온에서 발진한 수십 대의 구조선이 움직임을 멈춘 시노쿠로 다가왔다.
마하임의 의식은 그것을 끝으로 깊은 어둠속으로 빠져들었다.
* * *
그로부터 10년 뒤.
대항주력(大航宙曆) 521년, 프록시마 섹터 인근.
그그그그그구.
수백 아니 수천 년 이상 적막만이 감돌던 이 공간이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한다.
진공 상태에서 소리가 전해지지 않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 하지만 전장 10km가 넘는 우주 모함이 전속력으로 돌진 중이라면 또 이야기가 달랐다.
“4번 추진기 다운! 6번 추진기 추력 감소 중!”
“동력 체계 이상 발생. 사격 통제 장치 침식 확인. 침식률 47% 위험합니다!”
인류가 17번째 만든 아크급 우주 모함 가리온의 브리지(함교)에서 승무원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지금 그들 앞에 펼쳐진 ‘공간 투영식 다중 입체 영상’ 통칭 ‘윈도우’는 점점 붉게 물들어 가는 가리온과 그리고 그 뒤를 바짝 뒤쫓고 있는 붉고 거대한 무언가를 실시간으로 비추고 있다.
“젠장! 뿌리칠 수 없는 건가?”
저것이 무엇인지는 함장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축함급 전함과의 전투에서도 끄덕없던 가리온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할지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미 함의 기능 중 30%가 정지된 상황. 녀석과의 첫 조우가 있은 지 겨우 10분 만에 주포인 ‘양전자포’마저 먹통이 되어 버렸다.
남은 무기라고 해 봤자 잡다한 미사일 터렛과 고출력 레이저포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런 무기로는 놈의 두터운 외피에 조그마한 상처조차 줄 수 없다.
“역시 독은 독으로 막을 수밖에. 마하임!”
함장의 외침과 동시에 브릿지의 ‘윈도우’보다는 훨씬 작은 윈도우가 함장의 정면에 펼쳐졌다.
그리고 윈도우의 푸르스름한 영상에 등장한 것은 30살 언저리의 금발 청년이었다.
“더 침식당하면 뒤는 없다. 당장 불러와, 어서!”
“할 수 있음 벌써 했죠! 그러게 왜 레비를 화나게 하셨나요? 나도 이제 몰라요!”
금발의 마하임은 함장을 매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함장의 얼굴에 잠시 당황의 표정이 스쳤지만, 그것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그대로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마하임을 밀치고 윈도우에 ‘그것’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참 가관이군. 인간들은 수백 년이 지나도 발전이 없네.”
“…….”
‘그것’의 말에 둘은 순간 입을 닫는다. 하지만 여전히 이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그것’은 그런 함장과 마하임을 바라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말한다.
“좋아, 상관없겠지. 내 목적은 나의 분신, 나의 자매가 왜 이 미천한 인간을 따랐는지 알아내는 것뿐이니까.”
윈도우의 화면은 천천히 아래로 움직이며 ‘그것’의 모습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팔짱을 낀 채 도도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것은 일단은 여성, 더 정확히는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은 무슨 네온사인처럼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눈동자 역시 붉은 안광을 희미하게 흩뿌리고 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소녀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보다시피 상황이 나쁘다.”
함장의 안색은 전보다 더 좋지 못하다. 이런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지만, 이미 선택의 여지 같은 것은 없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나는 마하임의 생존 외에는 관심 없다.”
“지금 쓸데없는 말장난 할 때가 아니야! 이 배가 끝장나면 레비 너는 몰라도 마하임 역시 죽은 목숨이라고!”
핏대까지 세우며 함장은 소리쳤다. 우연이라면 우연, 필연이라면 필연, 악연이라면 악연이었지만 ‘그것’ 아니 ‘레비’는 현재 가리온의 마지막 남은 카드였다.
“부탁해, 레비. 지금은 시간이 없어.”
레비의 곁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금발의 청년이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레비는 난처한 듯 자신의 붉게 빛나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쿠르르- 쿠쿵.
함교가 또다시 상하로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도 가리온은 맹공을 받고 있다.
영상을 전송하던 윈도우 역시 이에 따른 노이즈로 정상적인 화면을 출력하지 못했다.
일렁이는 윈도우에서 레비의 목소리는 잡음까지 섞여 희미하게 들려왔다.
“뭐, 할 수 없나? 인간 따위 아무래도 좋지만, 아직 마하임 널 잃을 수 없으니까, 할 수 없지.”
레비는 휙 돌아서서 윈도우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허겁지겁 그 뒤를 따르는 마하임의 모습이 보였다. 허공에 펼쳐진 윈도우 역시 잠시 후 사라졌다.
함장은 쓰러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10년은 감수한 기분.
일단 레비가 움직였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뭔가는 될 것이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운을 비는 것이 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