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착짱죽짱
눈 앞이 깜깜했다.
좀 어렴풋이 깜깜해서, 뭔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바닥은 또 빌어먹게 차가웠다.
차라리 아예 안 보이면 내가 뒈져서 저승에 있겠거니 하겠는데 애매하게 앞이 보이니 답답했다.
그런데 사지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만 깔짝대는 게 전부였다.
"뭐여 씨발."
아, 아니다. 목도 좀 움직인다. 목소리도 나오고.
설마하니 목이랑 손만 남겨놓고 박살났다던가 그런 건 아닐테고, 눈 앞에 덮인 이게 천 같다는 걸 감안하면 난 살아있는 것 같다.
눈깔을 열심히 굴리고, 입을 열어 혀를 내밀어 이 천을 밀쳐낼까 고민하는 찰나였다.
"아, 일어나셨나요?"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감미롭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내 눈 위에 덮여있던 천이 거둬졌다. 그 천에서는 왠지 좋은 냄새가 났다.
마치 꽃냄새 같았는데, 겨울날 아침 같은 상쾌한 냄새 역시 내 콧전을 스쳤다.
"어둠은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죠. 대화를 할 수 있을만큼 마음이 가라앉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상황은 당황스러울테고, 이해가 안되실테지만. 저는 해칠 의사가 없습니다."
눈 앞의 여자는 감미로운 목소리만큼이나 얼굴이 예뻤다.
긴 은색 머리칼은 본 적 없는 빛깔로 찰랑거렸고, 가볍게 감은 두 눈꺼풀은 가녀리면서 묘한 맛이 있었다. 긴 속눈썹에 언뜻 창백한 피부까지.
몸에 딱 달라붙는 실크 같은 재질의 긴 드레스도 엄숙하면서 아름다웠다.
내가 좆도 모르는 뉴비새끼라면 가슴이 웅장해졌겠지만….
베일을 다시 두르는 그녀를 보면서 난 솔직히 좀 착잡해졌다. 그녀가 여기에 있다는 건 많은 걸 의미했으니까.
그녀는 NPC다.
내가 알기로는, 이 게임 내에서 가장 자주 보는 NPC다.
수용소에서 주인공이 구하는 유일한 NPC이자, 게임 끝까지 주인공과 함께하는 정체불명의 여자.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다만 저를 부르신다면, 겨울의 처녀라고 불러주세요."
베일을 뒤집어 쓴 그녀를 보면서 내가 생각한 건.
"…혼자 온, 아니. 왔어요?"
주인공은 어딨지?
"예, 정처 없이 떠돌다 당신을 발견하여 여기로 왔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고, 무장이라고는 갖추지 않은 여자.
그런 여자가 수용소에서 혼자 탈출하고 독의 하천을 건너 하수구까지 왔다?
미심쩍었다. 특히 수용소 때문에.
하지만 여기서 발견된, 웬 처음 보는 병신이 수용소를 언급해도 되는 걸까?
갑자기 눈깔이 확 돌아가서 내 목을 조르면 저항할 수도 없다.
그런 위험 부담을 감안해도 궁금한 건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탈출을 했느냐는 거다.
만약 주인공이 존재한다면 분명 그녀를 풀어주고 여기까지 왔을테고.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여기에 있는 건 납득이 안된다.
"…어딘가 아프신 곳이 있으신가요? 해독과 치료는 했지만, 그래도 혹여 불편하시다면 말해주세요."
내가 대답하지 않는 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녀는 손을 곱게 모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뇨. 좀 생각할 게 있어서."
합리적으로 추론한다면 주인공을 배신하고 여기까지 왔던가, 아니면 그녀가 사실 힘숨찐이라는 거다.
뭐,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맹인 검객 같은 거.
"그러시군요. 몸이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았다면 생각조차 여유롭지 않으셨을테죠. 마음이 놓이네요. 아마 몸도 곧 움직이실 수 있을 거예요."
씨발, 너무 자상하잖아.
베일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에서 속이려고 드는 기색은 없었다.
그 모습에서 더 망설였다.
질러? 말아?
"그… 저기, 궁금한 게 좀있는데요."
"예,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제가 대답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좋겠네요."
"여기까진 어떻게 오셨나요?"
그녀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베일 너머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게 존나게 불안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그저 걷다보니 당신을 찾아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다른 질문으로… 해방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해방자. 그녀가 주인공을 부르던 이름.
그녀가 여기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내 반응 역시 갈릴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아니요. 유명하신 분인가요?"
발뺌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저 베일을 걷어내고 싶었으나 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다면 겨울의 해방자에 대해서는 아십니까?"
씨발, 무슨 사이비가 열심히 전도하는 기분이네.
나는 착잡해지는 기분을 뒤로 하고 그녀의 베일을 뚫어져라 봤다.
겨울의 해방자. 이건 더 직접적인 정보였다.
제작사에서 갑작스럽게 풀어낸 주인공의 공식 명칭. 분명 이 제작사 새끼들은
'주인공의 이름은 여러분이 지정하신대로 입니다. 하지만 굳이 공식 명칭을 말씀해드리자면, 겨울의 처녀는 주인공을 겨울의 해방자라고 부릅니다. 멋있죠?'
라고 했었다.
그리고 게임사에서 이렇게 갑작스러운 정보를 푸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라는 게임 스토리 진행은 안 하고 인물 중 몇명이 동성애자라느니, 모든 등장인물이 파인애플 피자를 좋아한다던가 하는 개헛소리를 하는 새끼들도 있었으니까.
병신새끼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저와 비슷한 명칭이군요. 오해하실만도 합니다. 지금 겨울을 칭하는 이들은 흔하지 않지요."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시 뒷머리를 단단한 흙 위로 쳐박으니,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왔다.
"헌데 괜찮으신가요? 숨이 조금… 거치십니다. 어딘가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녀의 손가락은 딱 기분 좋을 정도로만 차가웠다. 아님 내가 몸에 열이 많은 건가?
아무튼 내가 어떤 좆망겜 때문에 짜증이 난 것도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시군요… 그래도 감정을 추스려주세요. 분노는 몸에 좋지 않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계속 문질렀다.
솔직히 간질간질했다.
*
"이걸 다 들고 오셨다고요?"
내 눈 앞에 놓여진 물건들은 대부분 무척이나 익숙했다.
두 개는 방금 전까지 썼기 때문이었고, 또 한 개는 내가 이 지랄이 나기 전에는 항상 써왔던 물건이었으니까.
하지만 한 개는 내가 모르는 아이템이었다.
"예, 당신의 근처에 널려있어 모아놨습니다."
나의 근력으로는 드는 것조차 고역인 폭군의 검.
그리고 외날의 장검인 적조.
이름도 모르는 웬 금속 방패 하나.
심지어 방패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었지만, 사자 모양으로 되어있었다.
왠지 턱 후릴 때 손맛 개쩔더라.
"안 무거우셨어요?"
경악하는 내 목소리에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별로 무겁진 않았습니다. 무언가 문제라도…?"
"그건 아닌데…. 아무튼 감사합니다. 겨울의 처녀님."
나의 말에 그녀는 베일 너머로 고개를 끄덕인 듯 보였다.
게임 속 인물들은 다 근력이 초인인가?
적조와 방패 정도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폭군의 검은 그 크기부터가 인간보다 크다.
근데 거기에 나를 짊어지고, 적조에다가 방패까지 들고, 심지어 이것까지?
"많이 힘드셨겠군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법이죠."
나는 폭군의 검 옆에 놓여있는 가죽 갑옷을 흘깃 보았다.
그녀가 갖고 왔다는 이 가죽 갑옷은 나와 아무 연고도 없는 갑옷이었다.
"이 갑옷도 제 근처에 있었습니까?"
"예, 이유가 있어 거기에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가져왔습니다. 과한 참견이었나요?"
물론 그건 아니었다.
이 갑옷만 입는다면 늪지의 요람 보스룸까지 버틸 수 있을테니까.
고작 가죽 갑옷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상한 몬스터가 넘치는 세계관 속 가죽 갑옷은 평범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금속보다 튼튼한 경우도 있고.
생각에 잠겨있자니, 겨울의처녀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으니까 내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뭐 이리 호구같은지.
"참견은요. 오히려 잘 하셨습니다. 마침 필요하던 차였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그녀가 안도하며 제 가슴을 쓸어내리고, 그에 맞춰 실크로 감싸진 살덩이가 움직이는 모습을 곁눈질로 살피고는 갑옷으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이거 어떻게 입는 거지? 게임에서는 그냥 장비만 누르면 자동으로 입는데, 이건 뭐 어떻게 풀고 뭘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입는 법을 모르시나요?"
씨발.
눈은 안 보일텐데 용케도 알았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알겠다는 듯 소리 죽여 웃었다.
"괜찮아요. 종종 못 입으시는 경우가 있더군요. 종자랑 떨어지신 거죠?"
그녀의 오해는 딱 좋았다.
물론 못 입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는 없었지만.
"하, 하하. 예, 그렇습니다."
결국 요람과 싸우고 도시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 갑주를 입어야 하는데, 입을 방법이 없으니 곤란하게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갑옷 입는 거 같은 거라도 U튜브에 검색해보는 건데.
"그러면… 제가 입혀드릴까요?"
눈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할만한 말이 아니었다.
사실 보이는 거 아냐?
"아, 보이는 건 아니예요. 그저 많이 해봐서 그래요."
갑옷 입혀주는 걸 많이 해봤다고?
점점 더 의구심이 커지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겨울의 처녀가 위험하다고 하기에는 난 그녀의 행적을 잘 알고 있다.
주인공의 창고 노릇을 잘 하던 걸 보면, 아마 눈이 조져지기 전이나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누군가의 종자였던 게 아닐까?
그런 거치고는 더럽게 예쁘긴 한데.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겨울의 처녀님."
하, 왠지 입에 안 붙는 호칭이다.
그간 대사 하나 없는 주인공으로만 말을 걸어오다가 직접 말을 하자니 호칭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겨울의 처녀는 다가와 능숙하게 갑옷을 입혀주기 시작했다.
어딜 조이고, 어딜 풀고, 어딜 감고.
난 봐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손가락이 가끔 티셔츠에 닿을 때면 손가락을 움찔거리는 게 솔직히 꽤….
귀엽다.
"겨울의 처녀님."
"네, 왜 그러시나요? 혹시 어딘가 불편하신가요?"
"그건 아니고… 겨울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처녀님이라고 부르는 건 좀 그렇다. 어감도 병신같고.
그녀는 그 질문을 곱씹는지, 한동안 베일을 드리운 얼굴을 내 복부를 향해 둔 채로 완갑의 벨트를 풀었다가 조였다가 했다.
"그렇게 불러주는 사람은 처음이네요. 그렇게 하셔도 좋아요."
숨죽여 웃는 걸 보자니, 오히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대신 저도 당신의 이름을 들을 수 있을까요?"
마지막 완갑을 조이고, 허리춤의 벨트를 조인 그녀는 갑주의 단단한 가죽 위에 손을 얹은 채말했다.
"예? 아, 저는 주현성이라고 합니다."
"주… 음, 어려운 이름이네요."
"천천히 불러주셔도 됩니다."
"배려해주시는군요. 자상하시네요."
그녀는 웃더니, 내 갑주 위를 검지로 문질렀다.
"잘 입혀졌는지 확인해봐도 될까요?"
"예?"
설마 씨발 그 초인적인 근력으로 배빵 같은 거 하는 건 아니겠지?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꿀꺽.
침을 삼키자, 그녀의 손가락이 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
다행이긴 한데, 다행이 아니었다.
존나 예쁜 여자가 내 허리를 더듬고 있었다. 얼굴도 허리춤을 향해있었고.
그래서 경직해있자니, 그녀의 손가락은 씨발 망설임 없이 갑주 안을 파고들었다.
"ㅊ, 충분합니다! 이제 그만!"
차가운 손가락이 티셔츠 안을 파고드는 감촉에 내가 반사적으로 외쳤고, 그녀가 웃으며 갑옷을 쓸었다.
웃는 소리마저도 흥얼거리는 것 같았다.
"잘 입혀졌네요. 다행이예요."
분명히 장담할 수 있었다.
베일 안에서, 겨울의 처녀가 요망하게 웃고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