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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화 〉착짱죽짱 (7/274)



〈 7화 〉착짱죽짱

마치 맞춤 제작을 한 것처럼 갑주, 특히 장화는 내 몸에 딱 맞았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의심을 하겠지만, 그에 얽힌 설정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나에게는 신경 쓰이는 정도는 아니었다.
제작사가 풀었던 정보 하나가 머릿 속에 떠올랐다.
겨울의 해방자가 사용하는 모든 아이템들은 특별한 기원과 비화를 갖고 있는 강력한 물건이라  크기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기능이 있다고 했던가.


 말인 즉슨  가죽 갑옷조차 단순한 기성품이 아닌 '아이템'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쟤는 이런 걸 잘도 찾아냈네. 눈도 안 보이면서.


"왜 그러시나요?"

이걸 눈치채네.
내 시선을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는데, 그녀는 그렇게 물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드리워진 베일이 가볍게 흔들렸다.

"무겁진 않나 해서요."
"괜찮습니다. 당신께서 열심히 해주시는데 우는 소리를 할 순 없지요."

난 그녀의 등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드러난 폭군의 검을 보고는 아가리를 다물었다.
게임 내의 인벤토리처럼 들고 다니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진짜로 들고 다니는 거였다. 저 존나 무거운 걸.
깝치지 말아야지.

"그래도 당신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았으면 저는 여기에 계속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녀는 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좋은 거겠지? 그녀가 내 손을 바스라뜨리지 않아서 다행이기도 했고.
나는 겨울의 처녀를 손을 잡아 이끌다가, 육로의 끄트러미가 보이기 시작해 놓았다.

"앗."

겨울의 처녀는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는 소리를 내더니, 손을 모아 가지런히 두었다.

"여기부터는 길이 끊깁니다. 제가 먼저 가서… 이 지역의 지배자를 죽일테니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물론 그녀의 개쩌는 인지능력과 근력이 있으면 싸움이 쉬워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한 번의 트롤링으로 내가 반갈죽 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적조와 방패를 그녀에게 들려주고 내가 폭군의 검을 쓰기엔 저건 지나치게 무겁다.


게다가 이벤트 컷씬이 혼자를 기준으로 가는 걸 감안하자면, 둘이서 갔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요람이 끌고가는 걸 포기하고 둘 다 압사시키려고 한다면 좆되는 거고.

"알겠습니다. 당신께서 승리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손을 모으며 기도를 하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마음은  편해졌지만, 여전히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 똥통에 다시 발을 담궈야한다는 거랑.
똥독 오르면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거.

강제로 타임어택이 될 수도 있겠는데.

그때 사락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겨울의 처녀가 내 옷깃을 잡았다.
머리카락끼리 마찰하는 걸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도 되는 건가? 심지어 이런 똥통 속에서?


"이걸 가져가주세요."


그녀는  손을 더듬어 찾더니,  손을 잡아 끌어올렸다. 차가운 손가락에 쥐어진 물건이 금세 내 손아귀로 넘어왔다.
내 손을 말아쥐게끔 부드럽게손가락을 밀고는, 그녀는 베일 속에서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건…?

"이런 것 밖에 해드릴 수 없지만, 그래도 당신께서 안전하시길 빌겠습니다."

그 차가운  손이 내 손을 꼭 쥐었다.
와 씨발, 차가운데 존나 부드럽네.
그 기묘한 촉감에 내가 놀라워하고 있으려니까, 문득 이게 뭔지 궁금해졌다.
손을 펴서 확인해봤다.

"해독제네요? 그리고 이건…?"


 봐도 그런 색이었다.
녹색의 액체라면 해독제인 게 국룰이지.
근데 하나 더 있는 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색은 좀 노란데.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이 그 노란색 물약 위를 스쳤다.

"지구력의 물약입니다. 마침 하나 남아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런 배려를?
나는 가슴이 웅장해지는 걸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겨울님도 안전하시길."

마지막인 것처럼 인사했지만 내가 요람을 쓰러트린다면 곧 다시 보게 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녀를 뒤로 하고 똥통에 장화를 푹푹 담궈눌렀다.



*

이 늪지는 생각보다 더 큰 모양이었다. 한참을 걸어서야 겨우 고름쟁이들이 사는 판자촌이 나왔으니.

게임에서는 뛰어가면 금방이었는데, 난 그런 초인이 아니라서 1분만 달려도 지치기 시작한다.
허리춤에 칼을 달고 뛴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구나.


그래서 나는 성실하게 한 걸음씩 내딛기로 했다.

삐걱

익숙한 소리였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데도 그리움을 느낄 정도였다.


"이제 코는 아프지도 않네."


아주 오랜 시간 고이고 고인 끝에 썩어버린 똥통에서 나는 냄새는 상상을 초월했다.
내가  세계에 오고 나서 배고플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위에  것을 모두 게워냄'이 있을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영양이란 게 없는 건 고달픈 일이었지만 이런 똥통 속에서 뭔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았다.

사다리를 완전히 오르니, 반파된 판자촌이 눈에 들어왔다.
고름쟁이 한 마리 보이지 않았으나, 일전에 요람이 휩쓸어버렸던  감안하면 뭔가 남아있는 게 이상하다.


"…안은 생각보다 깨끗한데."


언젠가 공포게임에서  적이 있는, 무조건 무언가 튀어나오는 말을 중얼거렸으나 그 어떤 새끼도 나타나지 않았다.

"씁, 이게 아닌가?"

그럼 소리라도 치고, 칼을 방패에 존나 두드리고,  대충 봉산탈춤이라도 춰야하는 걸까.
하지만 그런 추태를 부리기엔 솔직히  지쳐있었다.

지금 써야겠네.
지쳐있으면 싸우긴 커녕 좆도 못할 게 뻔했다.
나는 노란색의 액체가 넘실대는 길쭉하고 폭이 좁은 병을 꺼냈다.

뚜껑을 바로 열고는, 노란색 액체를  너머로 넘겼다.

무슨 재배 실패한 과일 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떫으면서도  맛이었다.
 역시 대충 바닥에 내던지는데, 뭔가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마치 뭔가가 꼬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에이, 설마. 삼류 공포영화도 아니고 뒤를  돌았는데―


"있네."

뒤를 돌자 보이는 건, 촉수였다.
그냥 촉수 한 개면 말을 안 한다.
대충 보기에도 눈 앞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양의 촉수가,  뒤에서 큼직한 눈깔을 단 채로 나를 꼬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눈깔에는 핏줄이 서있었다.
하기야, 나도 누가 내 손가락 잘라가면 빡치겠다.

후우우웅

거대한 촉수가 들어올려지고, 바람이 불었다. 명백하게 맞으면 뒈지는 일격이었다.


"이런 씹."

나는 몸을 내던졌다.

콰앙!

심플한 소리였지만, 그 성과는 막대했다.
무너지는 사다리를 보며 내가 생각한  단 한 가지였다.

겨울의 처녀는 어떻게 오냐?
나야 하이패스지만 겨울의 처녀는 직접 걸어와야 했다.
하지만   걱정을 여유 따위는 없다는 듯이 촉수  개가 동시에 쇄도했다.


이건 피할 수도 없다. 적조를 꺼내려던 나는 그대로 내 몸을 감싸는 촉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륵…."


숨이 잘 안 쉬어진다. 진짜 갑옷 없었으면 뒈졌겠다 싶을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그래도 압박감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곧장 나는 위에서 올라오는 물약을 간신히 억눌러야 했다.

쿠와아아아아아아!

놀이기구를 탈 때나 느꼈던 거센속도감이  몸을 지배했다. 팔다리는 어지럽게 흔들리고 싶어했고, 내 머리는 이미 그렇게 흔들리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끝났으면 하는 괴로움은  괴로운 상황과 함께 끝이 났다.

투콰아앙!


 촉수가 씨발 날 벽에다 집어던졌으니까.
나는 오물로 이뤄진 벽이 내 가죽 갑옷 위에서 산산히 부숴지는 걸 느꼈고, 동시에  목숨이 가죽 갑옷 덕에 부지했음을 느꼈다.
보스룸 바닥 위에서 한참을 굴러다니던나는 겨우 몸을 일으키며 숨을 가다듬으려고 했다.
시도만 하지 실제로는 못했지만.


"콜록! 콜록… 씨발…."


세상이 빙빙돌았다. 혹시 촉수스냅을 이용해서 던진 걸까? 균형감각조차 좆되어 있는 게 느껴졌다.
문득 내가 요람이라면 지금을 노릴 거라는 게 떠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방금 먹은 물약을 되새김질 하는 것처럼 토해냈다가 다시 삼키면서 효과가 두 번 돌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고개를 들어올리며 허리춤에 메어져있던 검을 뽑아 휘둘렀다.

카앙!


뭔 씨발 쇳소리가 들리냐.
부딪힌 길쭉한 촉수 같은 게 불똥이 튀며 밀려났다.
그 틈을 타서 사자 모양 방패를 꺼내들어 쥐었다.
곧장 내게 퍼부어지는 공격을 막으려면 검 한 자루로는 무리였다.

카가각, 텅!

쇄도하는 작은 촉수를 칼로 빗겨내고, 방패로 튕겨냈다. 손목이나 손아귀가 저려왔지만 저 촉수로 내 목이 꿰뚫리는 것보단 나았다.


까앙!
퍼억!


최대한 피하거나 튕겨내거나 어쩔 수 없이 맞거나 하면서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지만 상대는 한 번에 몇번씩 공격할 수 있는 괴물딱지고 난 팔 두  다리  개의 인간이었다.
어떻게든 요람의 심장 겸 자궁을 조지지 못하면 곧 조져지는 건 내가 될 수도 있었다.


게임이었으면 좆까라고 공격 씹고 달려가서 줘패면 되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금 이 싸움을 하고 있는 몸뚱이는 내 몸뚱이였다.
그 지랄하다가 머리라도 꿰뚫리면 난 수많은 고름쟁이들의 아버지가 된다. 상상하니 좆같았다.
그래서 난 더 격하게 적조를 휘둘렀다.
그에 달려들던 촉수 하나가 잘려나갔다.

즈컥

문득 촉수들의 움직임이 좀 더뎌진 게 느껴졌다. 촉수 중 하나가 적조에 베여 떨어져나간 게 그 원인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튼튼한 촉수라고 해도 결국은 생체. 피를 먹고 수복한다는 개 정신나간 무기에 저항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따금씩 촉수들이 헛방까지 놓기 시작했다. 겁이라도 먹은 건가?

근데 그렇게 헛방치고, 칼날에 겁이라도 먹은 모양새를  보니까.
되겠는데? 하는 생각이 불쑥튀어나왔다.

  지랄난 세계에 떨어지기 전 광경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적의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거리에서, 공격이 끝나자마자 반격해서 피해를 입히는 전법을.
왠지 이것도 같아보였다. 거리만 좀 잘 재면 팰 수 있을 거 같았다.

나는 저만치에서 나를 꼬라보고 있는 형상을 보았다.
인간의 여성 형상을 한 무언가는, 하반신이 있을 자리에 큼직한 아가리인지 보지인지 애매한 걸 매달고 있었다.
아니, 거기에 매달려 있는 건가?


어찌됐든 나는 저게 본체라는 걸 적당히알고 있다.
사실, 게임을 안 해봤더라도 명확히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해보자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봐야했다.
나는 휘둘러지는 촉수를 눈에 새기다가, 직각으로 내리찍어지는 놈을 몸을 젖혀 피했다.


촤악!

그리고 그 촉수를 베어내고.


티잉!

내 머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걸 방패로 막아냈다. 손목은 좀 저렸지만 아직 견딜만 했다.
좋아, 이대로 접근만 하면―


퍼억!


"크헉!"

뒤에서 전해진 격한 고통이 가죽 갑옷을 꿰뚫고 내 몸에 전달되었다.
씨발, 보스몹이 백어택 하는  어딨어.
그리고 내 몸뚱이는 볼품 없이 날아가 망할 놈의 본체 앞에 도착했다.

그  르 륵

늪지의 요람이 소름끼치게 웃었다. 나를 따먹으려고 하는 의지가 여실히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자칫하면 좆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 침착했다.
이게 내가 노리던 한 수였으니까.
나는 침착하게 팔에 힘을 주고, 적조를 단단히 쥔 채로 기회를 기다렸다.

쩌어억


무언가 열리는 소리. 그리고 난  소리로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새끼가  따먹으려고 한다고.
이건 분명 저 새끼의 보지가 활짝 열리는 소리였다.
그래서 나는 좆같음을 꾸역꾸역 참고 숨을 죽여 기다렸다.

그리고.
축축한 촉수가 내 뺨에 닿는 순간, 내 몸이 튕겨져 나가듯 움직였다.
자세가 좋지 않았지만, 상관 없다. 적조는 좋은 검이다. 내가 아무리 병신 같은 자세로 돼지처럼 휘두른들, 칼날은 제 일을 톡톡히 해낼 거다.


촤아아악!

눈을 부릅 뜬 채 올려벤 장검에 걸린 살점이 뜯어졌다. 요람의 보지에서 나온 살점이었다.
예로부터, 남의 좆과 봊을 치는  비매너라고 했지만 지금의 내가 신경  매너는 아니었다.
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괴물 새끼의 애액이 내 몸에 튀었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있으면 공격조차 여의치 않을테니까.
이 좆같은 마조히스트를 끝낼때가 왔다.

키 야 아 아 아 아 아   !!!


고통스러워 하는 요람의 본체가 소리를 높이자, 밖에 있을 촉수들이 이 공간을 뒤흔드는지 정신 없이 땅이 울리고 벽이 흔들렸다. 개중에는 직접 벽을 뚫고 쳐들어오려는 촉수조차 있었다.
그럼에도 난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베고, 베고, 베고, 찢고, 잘라내고, 썰었다.
나중에는검날로 때리는 수준에 가까웠다.

입이 메말라 숨을삼키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지금 외에 기회는 없었다.


"흐으아아아아아아아아!!!"

정신 없이 칼을 휘두르다가, 요람의 창백한 손이  손목을 붙잡았다. 나는 억지로 그 손목을 빼내려고 용을 쓰다가, 이를 바득 물고는 고개를 젖혔다.


"좆까아아아아아!!"


빠악!


요람의 대가리에 내리꽂히는 박치기.
나는 손목을 붙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채로 정신 없이 내 머리를 요람의 머리에 부딪혔다.
피가 튀고,  이마가 찢어져 눈 앞이 시뻘개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크 르 르…

요람은 힘 없는 소리를 내더니 침묵했다.
쓰러진 시체에서는 섬뜩하게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주저앉아 소리 없이 외쳤다.
내가 이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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