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착짱죽짱
단촐한 보스룸에서 나오니 익숙한 거대한 문짝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부잣집대문 같은 모습은 중후한 간지와 함께 엄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 너머에 있는 도시를 감안하자면 이것도 꽤 얌전한 편이었다. 하수구에 좆간지나는 문짝을 달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걸까.
기진맥진한 내가 생각할 거리는 아니다. 그냥 침대에 누워서 푹 자고 싶었다.
"아, 오셨군요."
그런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의 얼굴, 정확히는 베일을 보고 나는 멈칫했다.
까맣게 잊어버려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도 있지만.
"…겨울님?"
"예, 당신의 겨울의 처녀입니다."
어떻게?
물론 겨울의 처녀가 가진 인지 능력이 어마무시하고, 근력은 그 인지 능력에 어울리게 강력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보스를 잡고 있던 나보다 먼저 도착한다는 건 이상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길은 끊겨있을텐데요."
"아… 제가 당신에게 방해가 되었나요? 죄송해요."
피로 때문에 짜증이 묻어났던 걸까. 그녀는 우물쭈물 거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이걸로 어물쩍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저러는 거라면 나는 겨울의 처녀와 동행하는것을 고민해보게 될 것이었다.
내가 반응이 없으니 그녀는 잠시 더말을 고르는지 조용했다.
"그…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당신의 향을 쫓아오니 여기로 이어졌습니다."
굳이 에둘러서 '당신의 향'이라고는 했지만 그게 곧이 곧대로 내 몸에서 나는 향기로운 무언가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말하자면….
씨발.
"저, 그렇게 냄새 납니까?"
끄덕이는 고개를 따라 베일이 가볍게 흔들렸다.
"사실 조금 비릿한 냄새가 납니다. 무슨 냄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탓에당신께서 다가오시는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다가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강간미수범의 애액을 잔뜩 뒤집어 썼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고름쟁이들을 잡을 때 다소 존엄을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주변에 사람이 있을 때랑 그렇지 않을 때는 존나 큰 차이가 나니까.
나는 늦게나마 내 몸을 내려다봤다.
고름에다 아까 촉수가 던지는 바람에 오물로 된 벽을 부수면서 묻은 대소변, 그리고 늪지의 요람이 쏟아낸 진상을 알고 싶지 않은 액체까지.
겨울의 처녀가 나한테 냄새난다고 욕을 쏟아부어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그랬다면 차라리 더 대하기 편했겠지만 그녀는 한결 같은 친절함을 유지했다.
"…죄송합니다. 싸움이 힘들었던 탓에짜증이 좀 났나 봅니다. 지치기도 하니, 빠르게 도시로 갑시다."
겨울의 처녀는 오히려 다가와 내 오물로 젖은 뺨을 매만졌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열심히 하셨으니까요."
그녀는 오물이 묻는 건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이 피딱지나 비릿한 액체가 묻어있는 내 뺨을 제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았다.
…근데 얘는 어떻게 하나도 안 묻히고 여기까지 왔지?
설마 서전트 점프로 아까 헤어졌던 육로에서 여기까지 한 번에 왔다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럼 좀 많이 무서울 거 같았다.
"당신께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내 목을 차서 떨구는 우락부락한 겨울의 처녀, 그런 걸 망상하고 있던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뺨을 지나서 눈꺼풀을 어루어만질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예? 아, 예. 물어보세요."
"이 앞에 도시가 있다면… 동행해도 괜찮을까요?"
게임에서도 이렇게 동행한 건가?
어쩌면 내가 주인공으로 치환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는 내 뺨을 한참간이나 어루어만졌다.
"방해는 되지 않겠습니다. 혹여 싫으시더라도… 저는 탓하지 않겠습니다."
베일 너머로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대놓고 풀죽은 목소리를 내면 거부하기 힘들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함께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게는 겨울님이 필요합니다."
그녀의 등에서 삐죽 튀어나온 폭군의 검을 보았다. 지금 내가 절대 운반 못할 물건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내 종자를 자처한다면 오히려 좋았다. 절대로 내 물건을 뺏기지 않을 것 같은 초인이 내 시중을 들어준다는데 싫을리가 있을까.
게다가 메인 스토리를 감안하자면 그녀를 데리고 다니는 건 필요했다.
그런데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내 뺨에 얹은 손도 멎어있었다.
그런 그녀를 가까이서 빤히 보고 있자니, 베일을 들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그나마 덜 더러운 오른손으로 베일을 잡아 들췄다.
"앗."
겨울의처녀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더니 얼굴을 도로 베일로 가렸다.
"짖궂은 행동은 하지 말아주세요… 이런 추한 얼굴을 당신께 보여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베일을 양손으로 잡고는, 노골적으로 부끄러워 하면서 그녀는 몸을 낮췄다. 또 들출까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근데 추하다니?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겨울의 처녀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다가갈 때마다 몇 보씩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그런 걸로 실랑이를 하기에는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다리가 너무 아프고, 해독제가있는 덕에 죽진 않았지만 팔에 두드러기도 덜 가라앉았다.
나는 허리춤에 매달린 요람의 머리를 흘깃 보았다.
고대의 도시는 지금껏 지나왔던 지역과는 다르다.
그 도시를 총괄하는 성주와 무수한 주민들, 그리고 인간의 세력이 존재하는 이른바 안전지역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던 지저의 늪지, 하수구 지역의 지배자를 죽였으니 그 목을 증거로 가져가면 두둑히 보상받을 수 있다.
동시에 다른 메인 스토리로 이어지는 지역도 해금되겠지만, 생활력과 수단이 없는 나에게는 동앗줄이었다.
…좀 썩은내가 나는 걸 보면 썩은 동앗줄일 수도 있긴 한데.
겨울의 처녀는 내가 문에 다가가자 내 팔을 붙잡았다. 가까이 붙으니 실크로 감싸진 살덩이가 꾹 눌렸다.
다행히 피곤해서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텅 터덩 텅 텅
리듬감 있게 문을 두드렸다.
"열어주십시오."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게임에서는 그냥 겨울의 해방자가 두드리니까 열어주던데, 이거 플레이어 차별 아니냐?
"…전 사람입니다. 멀쩡하게 말도 하잖습니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고대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문을 부술 방법도 열 방법도 없었으니 뭘 할 수는 없었지만, 한 편으로는 불안했다.
혹시 2회차에서는 고대의 도시가 붕괴했다던가.
아니면 내가 넘어온 이 세계관 기준으로는 붕괴했거나 버려진 도시라던가.
그런 안 좋은 상상이 무럭무럭 자라날 무렵, 가슴을 내 팔뚝에 누르고 있던 겨울의 처녀가 내게 속삭였다.
이 여자는 숨결도 차갑네. 닉값을 잘해 아주.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납니다. 잘 들리지는 않지만… 아주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게 들려요? 내 어이 없어하는 얼굴은 역시나 그녀에게 보이지 않았다.
"대화 같은 건 안 들립니까?"
"예… 하지만 아주 숨이 거칩니다."
숨이 거칠다니 그건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보통 개떡같이 일이 흘러가면 이랬다.
나는 허리춤에 메어진 적조나 방패를 풀어헤치고 싶었지만, 겨울의 처녀가 딱 붙어있는 통에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저 폭군의 검도 어떻게 해야하는데.
게임에 있던 인벤토리가 그리워지려는 순간에 거대한 문은 거짓말처럼 부드럽게, 별 다른 소음을 내지 않고 열렸다.
드르르르륵
덜컹
위로 올라간 문이 돌로 된 벽 속으로 몸을 감추자, 그 너머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단단히 무장한 채 창을 내게 겨눴다.
"보시다시피 사람입니다."
나는 검에서 최대한 손을 떨어트렸고, 겨울의 처녀는 오히려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 병사들 틈바구니에서, 한 명의 잘 차려입은 여성이 걸어나왔다.
단정한 모자를 쓰고, 짧은 머리칼을 어깨 너머로 흩날리는 여자였다.
허리춤에는 칼을 메고 있으니 얼추 이 병사들의 지휘관 쯤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에 나는 얼굴은 아니었다.
메인 NPC는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잘도 살아나오셨군요."
아, 다행이다.
NPC한테도 지저의 늪지는 지옥인 모양이었다.
*
그녀의 이름은 세네카이며 그녀는 이 고대의 도시에서 자경단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말이 자경단이지, 사실상 성주에게 녹봉을 받아먹는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그녀는 이 도시의 치안 담당자다.
"그걸 쓰러트렸다니… 믿기지 않는군요."
그녀는 내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수급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기야, 누가 그 심장이자 강간마인 새끼한테 직접 달려들어서 죽여버릴 생각을 할까.
"하지만 증거가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군요."
그렇게 고개를 숙이는 그녀는, 착잡해보이기도 후련해보이기도 했다.
"늪지의 요람은 아주 오랜 시간 저희 도시를 괴롭혀 왔습니다. 으레 어린아이들에게 해주는 무서운 이야기에서도 꺼내지 못할 정도로 피해는 막심했습니다."
대충 짐작은 갔다. 세네카는 부하들을 종종 요람에게 잃어버리기도 했을테고, 소중한 사람도 잃어버렸을 공산이 높았다.
딱 봐도 청렴해보이는데 보통 그런 사람들은 자기 부하의 죽음조차 자기 잘못이라고 받아들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수많은 탈주, 불량 알바생을 겪어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마냥 그렇지도 않았다.
"이름을 들어두고 싶습니다."
딴 생각하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다행히 별 달리 기억할 내용이나 질문하는 건 없었나 보다.
"주현성입니다."
"주… 음."
멋들어지게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는지 그녀가 버벅이더니 미묘하게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전 도시를 대표해 감사를 표합니다. 비록 지금은 오물에 젖어 계시기 때문에 성주님을 뵐 수는 없습니다만, 목욕과 숙소를 제공해드리겠습니다. 다음날 성주님을 뵐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나도 이런 꼴로 고대의 도시를 관리하는 사람을 뵙고 싶은 기분은 없었다.
수치플레이도아니고, 그건 좀 선 넘었지.
그녀는 몇 마디 더 말을 건네다가 나를 내보내줬고,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겨울의 처녀를 찾아냈다.
겨울의 처녀는 내 발소리만 듣고도 나인 걸 알아차렸는지 베일을 쓴 고개를 홱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오셨군요. 이야기는 잘 나누셨나요? 상처가 깊으신 분으로 보였습니다."
뭐야, 마음의 눈 같은 거라도 있나?
얘는 되게 내가 못 보는 걸 봐서 기묘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드러낼 수는 없고, 무섭기도 했으므로 어물쩍 넘겼다.
"잘 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나는 그 말에 내 차림을 한 번 흘긋 보았다가 그녀의 차림을 보았다.
실크로 잘 만들어진 상복 같은 드레스에는 손상이나 오염은 없었고, 그녀의 오른손은 분명 내 뺨을 문지르거나 했었지만 깨끗했다.
물론 그걸 감안하더라도, 그녀도 목욕하고 좀 쉬어야하지 않을까?
존나 초인적이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휴식이나 식사가 필요 없는 것 같진 않았다.
"자경단 쪽에서 숙소를 내어준다고 합니다. 힘들었으니 거기서 푹 쉬고, 목욕도하도록 합시다."
"제가 시중을 들어드려도 될까요?"
대답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다시 들어오는 질문에, 나는 솔직히 당황했다.
그 '시중'이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혹하긴 했는데….
솔직히 아직 좀 무서운 것도 있었고 존나게 피곤해서 뭘 할 기분이 아니었다는 것도 있었다.
눈꺼풀도 간신히 뜨고 있었고, 방금 세네카에게 사정청취 하면서도 두 어번 졸았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빠르게 씻고, 잘 생각이었다.
이 오물의 양을 생각하면 좀 걸리겠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도 그녀한테 맡길 일은 아니었다. 눈도 안 보이니 한참 걸릴 수도 있고.
단호한 내 태도에 겨울의 처녀는 베일 너머에서도 선명히 느껴질 정도로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