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착짱죽짱
꿈에서 나는 햄버거를 먹었다.
어디 상표였는지, 뭔 버거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래도 꽤 맛있었다는 점 하나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게 뭐, 관성적으로 생각한 건지 아니면 미각을 병행한 꿈인지는 알 수 없었다.
깨어나니까 기분이 좆같았다는 점만은 확연했다.
"일어나셨나요?"
노래를 부르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나는 굳이 눈을 뜨지 않고도 말을 건 사람이 누군지 때려맞출 수 있었다.
근데 안 자는 건 어떻게 안 거래.
"예, 방금일어났습니다."
목 상태 개떡같네.
기분도 착잡한데 되는 일이 없었다. 몸을 일으키니 등에서부터 온몸이 쑤셔왔다.
그래도 건강 상태에 이상은 없는지 아침 발기는 굳건했다.
"으윽."
이상하게 침대는 되게 불편했다.
침대보라는 개념이 없는 건지, 아니면 병영의 숙소는 다 이런 건지.
집에 편안하고 푹신푹신한 침대가 있던 생활에서 다크 판타지 속으로 떨어졌으니 어쩔 수 없었다.
"많이 피곤하신가요?"
겨울의 처녀는 내 갑주를 고치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흉하게 찢어졌던 부분이나 갈라지거나 깨졌던 부분이 메꿔져 있었다.
어차피 게임에서도 수리 요청만 하면 됐었으니까,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좀 그렇네요."
하기야 내가 쉬었다고 할만한 때는 요람의 촉수에 얻어맞고 날아갔을 때를 제외하면 없었다.
그간 쉬지 않고 도망다니고, 싸우고 했었으니 지금의 근육통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왕이면 침대의 수준은 어쩔 수 있는 일이었으면 좋을텐데.
이제 오물 냄새가 빠지지 않는 티셔츠와 면바지 대신, 어제 세네카가 쥐어줬던 처음 보는 중세풍 옷을 입었다.
그냥 티셔츠보다는 촉감이 살짝 거칠긴 한데, 못 입어줄 수준은 아니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나요?"
안 보이는 사람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다는 건 생각보다 기묘한 일이었다.
속옷 역시 갈아입어야 했지만, 겨울의 처녀는 내가 뭘 갈아입는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지 잠잠했다.
애초에 내가 뭘 입고 있던 그녀의 눈에는 보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뭔가… 미묘한 수치심이 있었다.
"간단한 걸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세네카가 구해다준 검집에 적조를 밀어넣고, 겨울의 처녀가 수선해준방패를 허리춤에 매달았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내가 보이지도 않을텐데도 그녀는 고아하게 고개를 숙여보이더니 가죽 갑옷을 내려두고 밖으로 나갔다.
오물로 범벅이 되었을 갑옷은, 그녀의 향 밖에 나지 않았다.
*
세계의 중심에 가장 가깝다는 고대의 도시는, 고대인들이 멋대로지어놓은 수도였다.
어지간한 도시 몇 개를 합쳐놓은 듯한 크기의 내부와 그 내부로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강대한 벽.
마법으로 지어졌다던가, 권능으로 지어졌다던가, 신들이 살았다던가 하는 일설이 허풍이 아닐 정도로 장대한 모습의 도시.
그리고 나는 그 도시에서 가장 장엄한 건물에 서있었다.
"어서오십시오. 누추한 곳이지만 부디 양해주시길."
그런 도시의 지배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안대와 세네카와 비슷한 회색의 장발. 그런 장발을 굵게 땋아 등 뒤로 늘어뜨린 여자였다.
예쁘긴 했지만, 뭔가 묘한 카리스마가 있어서 왠지 주눅들게 만드는 그런 여자.
"제 이름은 세레나, 고대의 도시의 성주이자 그레이톰 일족의 가주입니다."
세레나 그레이톰. 고대의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NPC였다.
그녀의 뒤에 선 세네카가 뒷짐을 진 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늪지의 요람을 쓰러트린 전사가 당신이십니까?"
그녀의 질문은 확인이 아닌 화두였다.
그래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녀는 능란하게 말을 이어갔다.
"늪지의 요람은 저희 고대의 도시를 아주 오랜 세월 괴롭혀온 괴물이었습니다. 토벌하고 싶었으나 약점을 찾지 못했고, 독으로 토벌대가 괴멸하거나 그 촉수에 압살당하기 일쑤였죠. 그래서 하수구로 이어지는 문은 열지 않고 방치를 했던 것인데… 어떻게 토벌하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운이 좋았습니다. 녀석의 새끼가 인간의 형태로 존재하는 이상 어떤 수단으로든 간에 인간을 살려서 데려가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승부를 걸어봤고, 제 예상은 맞았더군요."
세레나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 이야기에 진짜로 흥미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저를 낚아채 데려가게끔 두고, 가장 치명적인 순간을 노려서 기습했습니다. 그 후에는 개싸움이었죠."
"보통은 생각하지 못할 방식입니다. 기책에 능하신가 보군요."
세레나는 그제서야 제 뒤에 직립한 세네카에게 손을 뻗었다.
"저희 언니는 만나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로는 올라왔을 당시에 피폐해있긴 하나, 큰 부상은 없었다고 하던데요.맞습니까?"
세레나가 했던 모든 말은 이걸 위한 이야기였다. 그녀가 던질 부탁을 벌써부터 짐작할 수 있었지만 나는 얌전히 이야기를 따라가기로 했다.
예로부터 눈알 하나 없는 사람은 조심하라고들 했으니까.
"그렇습니다. 좋은 갑옷을 우연치 않게 건진 덕에 다치지 않고 이길 수 있었습니다."
"좋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희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당신처럼 기책에 능하고, 강한 전사의 도움이 말이죠. 물론 이야기를 전부 듣고 얘기해주시는 편이 좋습니다."
얼추 게임 내 대화랑은 맞는 것 같았다.
겨울의 해방자한테는 당신처럼 강대한 전설 속 용사가 필요합니다. 라고 했던 것 같긴 한데, 내가 딱 보기에는 세보이진 않으니까 별 수 없지.
"물론입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좀 긴 이야기가 될테니까요."
웃는 표정이 별로 안 어울리는 여자였다.
세네카나 세레나나 둘 다 진지하게 똥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딱 어울렸다. 물론 그런 감상을 내놨다간 스토리가 꼬여버릴테니까 아가리를 닥쳤다.
"이 도시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거의 모릅니다."
"흐음, 예상대로군요."
이 세계관에서 동양인은 말타고 활 쏘고 사람 머릿가죽 벗기는 야만민족 밖에 없다.
그래서내가 이 인류의 마지막 보루를 모른다고 해도 이상할 건 좆도 없었다.
"신이 인간을 버린 부분부터 하겠습니다. 위대한 4신은 자기들의 의무를 져버리고, 각기 자신의 왕국에 틀어박혔습니다. 접근하는 모든 생명체를 쳐죽여가면서요."
그녀는 제 안대를 쓸고는 말했다.
"그리고 신이 자리를 비우자, 자리를 찾아야하는 영혼이나 마력, 권능은 멋대로 빠져나와 죽은 육신이나 살아있는 육신을 점거해 더럽혔습니다. 그 결과 수없이 많은 괴물이 나타났고, 그 괴물들 만큼이나 다양하게 사람들이 죽었죠."
게임 켜자마자 들을 수 있는 도입부와 얼추 맞는 이야기였다.
"그 괴물들은 다양합니다. 지성이 있는 것, 지성이 없는 것, 아주 강력한 것, 아주 나약한 것. 그 가짓수는 너무 많아 기록조차 힘들죠. 헌데 그 괴물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는 걸 아십니까?"
"인간을 죽인다는 겁니까?"
내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희 도시를 아주 좋아한다는 거죠. 그래서 외부로 나가는 길은 봉쇄되어 있습니다."
보통의 게임 클리셰라면 방어전을 돕는다던가, 이런저런 걸 구해달라던가 하면서 경험치 파밍을 유도해서 레벨을 올리게끔 해주겠지만, 이 게임에는 레벨이란 게 없었다. 그래서 전개도 조금 달랐다.
"물론 그로 인해 불편한 점은 거의 없습니다. 저희 도시는 웬만한 나라의 수도보다도 거대하고, 내부에서는 식량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으면서도 방어 역시 무척이나 견고하니까요."
그래도 꼴에 자기 도시랍시고 금칠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저흰 병력이 소모되고, 사기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바로 도시 내에서 지속적으로 괴물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벽의 요새는 내부에 적이 발생하는 순간 감옥으로 바뀐다. 그나마 거대한 크기 덕에 피해는 크지 않지만, 한 편으로는 진압 역시 쉽지 않다.그래서 이 도시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이 세계처럼.
그게 내가 알고 있는 도시의 배경이었다.
"하지만 봉쇄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클리셰적이고 상투적인 대사.
내가 쳤지만 약간 지루했다.
"그래서 문제인 겁니다. 저희는 이 일의 배후에 마법사들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다크 판타지인데 마법사가 안 나오면 이상한 거지. 나는 예상하던 일이었지만, 세네카나 세레나의 반응으로 보자하니 지금이 놀랄 때였다.
나는 엄숙한 표정을 짓고,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럴 수가…."
오케이, 정답이었다.
세레나는 여전히 똥씹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경단이 도시를샅샅이 수색했으나 그들이 잘라낸 꼬리 밖에는 잡지 못했고, 본진은 커녕 괴물이 어디서발생하는지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저희 도시는 공포에 잡아먹힐 겁니다."
안 그래도 성주의 저택까지 오면서 그렇게 생각하긴 했다.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죽을상을 하고 다녔고, 때로 우는상을 하고 다니는 과부도 있었다.
"본진을 찾고, 놈들을 몰아내는데 협력해주십시오. 성과에 따라 사례는 두둑하게 하겠습니다. 자경단과 제 사병들, 이 도시의 대부분은 당신을 도와줄 겁니다."
그리고 나오는 본론.
사실 이 의뢰는 받으나마나긴 하다.
안 받으면 도시가 멸망하고, 받으면 도시가 유지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실상 메인 스토리라고 할 건 아니었다.
이걸 무시하고 튀어서 메인 스토리 보스들만 쏙쏙 빼먹어도 되긴 했다.
심지어 난 원흉이 누구고, 누가 흑막인지, 본진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도망가지 않고, 이 의뢰를 받아서, 정직하게 깰 생각이다.
만약 이게 게임이었고, 내가 해방자의 육체를 갖고 있었다면 이 의뢰는 거절했을 거다.
근데 난 일반인이다. 저기 세네카든, 세레나든 팔씨름하면 2초만에 팔이 꺾여버릴 좆밥 일반인.
나 혼자서는 엔딩까지 못 갈 거라고 확신했다.
늪지의 요람과 싸우면서 나는 그걸 절실히 실감했다.
이 게임은 심지어 단기간에 강해질 방법 역시 없었다.
레벨 업도 없고, 장비에 강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스킬이랄 것도 없었다.
그나마 마법을비롯한 잡술수는 좀 있었지만, 내가 그걸 배울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아군이 필요했다.
보스를 잡으러 갈 군대 같은 게 있으면 더할 나위 없었다.
"하겠습니다."
"흔쾌하시군요."
"사례가 두둑하다는데 거절하는 사람이 이상한 거 아니겠습니까."
돈을 믿는 사람은 신뢰의 대상이 되진 못하지만, 적어도 받는 값에 따라서는 써먹을만 하다.
편의점 알바가 그렇지.
"대신."
"예."
당황하지 않고, 세레나는 제 옷 매무새를 다듬고는 나를 마주봤다. 뭔데 씨발. 왜 날 보면서 눈을 빛내.
"세네카씨를 잠시 빌려주십시오."
"아."
딱 봐도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길래, 빠르게 정정했다.
"몸을 요구하는 건 아닙니다. 마침 짚이는 게 있어서, 세네카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그 짚이는 곳이 맞다면 준비할 것도 있고요."
"아…."
왠지 안도하는 듯 보이는 세네카와 세레나의 표정을 보고는 나는 와락 표정을 구겼다.
"물론 그렇게 하겠습니다. 필요하신 물건이 있다면 구매할 상점에서 이걸 보여주십시오. 제 인장입니다."
그녀가 건넨 메달 같은 물건에는 회색조의 강철에 책이 그려져 있었다.
받아들어 주머니에 넣자, 세레나가 빙그레 웃었다. 역시 웃는 게 안 어울리는 여자였다.
"그럼 좋은 결과와 함께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섰고, 내 뒤를 세네카가 뒤따랐다.
우선 상점부터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