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착짱죽짱
"그랬었다고요?"
나는 세네카의 말에 얼빠진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예, 그랬었습니다."
"그럼 지금 그 사람은 어떻게 됐습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추방당한 사람은 보통 돌아오진 않더군요."
추방이라. 괴물에게 둘러싸여 봉쇄 중인 도시에서의 추방이라. 차라리 사형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인도적이겠네.
"그래서 성주님은 오해하셨던 모양입니다."
"거기서 긍정했으면 저도 추방이라는 이야기군요."
그 말에 세네카는 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동생인성주세레나와는 다른 단발이 찰랑거렸다.
"아마 응했을 겁니다."
"예?"
그녀의 회색을 띄는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
"늪지의 요람을 쓰러트릴 정도의 전사한테, 언니를 시집 보내는 정도로 해결할 수 있다면 오히려 싸게 먹히는 거겠죠."
대놓고 금칠을 해주긴 했지만… 그건 좀 불편한 이야기인데.
정치니 뭐니 하는 거엔 좆도 관심 없고, 워낙 내가 인간적인 새끼라 저런 선택지는 영 끌리지가 않았다.
"아무튼, 이런 얘기는 그만합시다."
그래서 내가 대화를 끊으니, 세네카는 조용해졌다.
나 이전에도 한 가락 하는 전사들은 꽤 있었고, 그 전사들을 죄다 불러 의뢰를 해봤으나 반절 정도는 저런 무리한 요구 끝에 도시에서의 축객령을 당했다고 했다.
나머지 반절은 뒈졌고.
숨어있는 마법사와 그 마법사가 부리는 무수한 괴물들을 상대로 전사 하나가 이겨낼 방법은 없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무슨 물건이 필요하다고 하셨었죠?"
세네카가 묻자, 나는 뇌내 메모장을 켜서 몇 가지 물건을 떠올렸다.
"우선 횃불, 랜턴이랑 뭐더라 그, 천갑옷인데."
"갬비슨입니다."
"아, 그거요. 그리고 화염석이요."
화염석이라는 말에 그녀가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화염석은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그녀의 저런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화염석은 엄연히… 우리 말로는 공업용이라고 해야할 물건이었으니까.
광산의 발파라던가, 대장간의 화로를 덥힐 때 쓴다던가, 부싯돌 대신 쓰는 경우도 있는데 워낙 위험해야 말이지.
"대충 짐작이 가는 게있어서요."
"뭔지 얘기는 안 해주시는 겁니까."
조금 냉랭해진 목소리에 아차 싶었다.
내가 짐작이 가는 장소가 있다니까, 혼자보다는 두 명이 낫지 않겠냐며 제안해왔다.
나는 내가 개좆밥인 걸 알기 때문에, 싸울 줄 아는 자경대 대장을 데리고 가는 게꽤 괜찮은 계획이라고 생각해서 동의했었다.
그렇다면 동료인데, 동료한테 응~ 비밀이야~ 해버리는 건 좀 너무한 처사긴 했다.
"음, 검에 화염을 두를 생각입니다."
그 말에 그녀의 시선이 잠시 내 허리춤에 메어진 외날 장검을 향했다.
"화염을… 말입니까?괴물 상대로는 나쁘진 않긴 합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여분의 검도 수배해둘까요?"
일리가 있는 걱정이었다. 화염석으로 긁으면 내구도가 소모되고, 보통의 무기는 유지 시간에 비례해서 내구도 감소가 추가되니까.
그래, 보통의 무기라면.
내 적조를 비롯한, '해방자 인정 무구들', 소위 '아이템'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화염석으로화염을 생성할 때에는 내구도가 소모되긴 하겠지만 아이템들에게는 심각한 타격은 아니었다.
심지어 적조는 적을 맞추면 내구도 소모가 없는 무기다. 설령 화염석으로 긁어 불을 피우더라도 적을 맞추면 자동 수복될 가능성이 높았다.
게임에서 그런 식으로 작용하지 않긴 하지만 성능보다는 설정이 우선되는 이 세계를 기준으로 하자면.
진짜 피를 먹고 수복되겠지.
그런만큼 피가없는 새끼들이면 좀 귀찮을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이 검은 특별한 놈이라, 피를 먹으면 스스로 수리하거든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납득이 됩니다."
그렇게 말하던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는지 문득 의문을 표했다.
"그러면 횃불과 랜턴은 어째서 필요한 겁니까?"
아, 질문 좋네.
"화염석으로 피워낸 불은 확실히 조명 대신 쓸 수도 있지만, 적한테 맞추면 반드시 꺼집니다.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요."
"전에도 써보신 적이 있는 거군요."
화염석은 게임 내에서도 쏠쏠하게 쓰이는 물건이었다.
마법이나 권능으로 피운 화염 인챈트는 오래 가는 대신 배우기 까다로워 순수 전사가 쓰기엔 애매했다.
하지만 가끔 적 중에서는 물리 저항이 높은 경우가 있었고, 그럴 때에 전사들이 의존할만한 도구는 화염석이었다.
약간의 데미지 추가와 함께 간지나는 모션으로 화염석을 무기에 긁어 불을 피우고, 그건 적에게 한 번 적중할 때까지는 유지된다.
PVP에서도 화염 데미지를 추가하면 괜찮겠다 싶을 때 종종 쓰기도 했고, 무엇보다 모션이 존나 멋있었다.
중요하니까 한 번 더 말하는 거지만, 진짜 모션이 뒈지게 멋있다.
"그렇죠. 랜턴은 횃불을 소진했을 때, 혹은 놓아둘 수 있는 광원이 필요할 때 쓸 겁니다. 정 여의치 않으면 적한테 던질 수도 있고요. 횃불은 말 안 해도 아시겠죠?"
한 번만 적한테 맞추면 꺼져버리는 화염석의 불꽃은 어둑한 지형에서 쓰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게 유일한 광원일 경우엔 좆된다는 거.
그래서서브 광원인 횃불이 필요했다.
"…짐작 가시는 곳이 혹시 지저의 늪지입니까?"
얘네는 저지명을 직접 정한 걸까, 아니면 누가 정한 걸까.
새삼 독특한 지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그건 아닌데… 직접 가보시면 알 겁니다. 말로 설명하기엔 뭣해서요."
이후의 쇼핑은 꽤 순탄했다. 대부분의 상인은 인장이 새겨진 목걸이를 보여주니 바로 물건을 내놓았고, 그렇지 않은 상인의 물건은 세네카가 값을 치뤄주었다.
"이게 전부입니까?"
짐을 성주의 저택으로 보내놓도록 지시하던 세네카가 문득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준비할 물건 말입니다."
"그렇지 말입니다."
"…따라하지 마십시오."
내 장난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고, 나는 머리를 긁고서 생각해봤다.
어디보자, 챙겨야 할게.
물약 챙겼고.
화염석 가져다준댔고.
횃불, 랜턴도 샀고.
갬비슨도 보내준댔고.
뭔가 빠졌는데?
내가 대답하지 않자 세네카가 대답을 재촉했지만, 뭔가 존나 중요한 걸 까먹은 탓에 좀 더 생각해봐야 했다.
기억을 더듬어 겨우 떠올린 물건 하나. 그게 제일 핵심이었는데 까먹을 뻔 했다.
그 물건을 세네카에게 말하니, 세네카의 표정이 한 순간에 차가워졌다.
"…그게 왜 필요한 겁니까?"
화염석의 얘기를 할 때보다 더 진중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팔고 있진 않을 겁니다. 아마 장인한테 수배해놔야 할텐데, 지금부터 제작한대도 한참이 걸릴 겁니다."
"아, 아예 통짜일 필요는 없어요. 적당히 발라만 놔도 됩니다."
불편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세네카는 이내 내 고집에 포기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배해두겠습니다.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
어느덧 태양은 기울어 성벽 너머로 사라졌다.
단순히 준비물을 사는 정도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시간이 더 걸렸다.
게임에서 돌아다닐 때는 그렇게 큰 거 같진 않았는데, 내 다리로 걸으니까 존나 컸다.
아아, 해방자 그는 초인인가.
"그럼 그게 전부입니까?"
세네카의 준비물을 사는데도 시간을 좀 썼으니, 내 다리는 이제 죽여달라며 아우성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물론 필요하겠다 싶으신 게 있으면 가져오셔도 됩니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는 듯 했다.
"조금 쉴 필요는 있어보입니다."
확실히 그랬다. 특히 내 다리가 그랬다.
그녀의 고마운 배려에 따라 어디서 쉬어야할지 돌아보고 있자니, 그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저긴 어떻습니까?"
선술집 같았다.
대놓고 간판에서부터 맥주잔 같은 게 그려져 있으니 저게 선술집이 아니면 안됐다.
"좋죠. 마침 술이 좀 땡겼어요."
분명 끊었었는데,이 좆같은 놈의 세계는 나를너무 몰아붙였다.
"마음이 통했군요. 저 선술집이 이 근처에서 가장 좋은 에일을 갖고 있습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선술집으로 향했고, 나 역시 그랬다.
들어서니 보통 중세 게임이라면 으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선술집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막 떠들거나 웃거나 그런 건 없어서 좀 삭막했지만 이 도시의 현재를 생각하면 당연했다.
그녀는 자리를 쓱 훑어보더니 가장 깨끗해보이는 중앙 탁자에 다가가 앉았다.
나는 그 맞은 편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어우, 다리야. 장담하건데 조금만 더 걸었으면 다음날 내 다리는 근육통으로 씹창났을 거다.
"뭐로 하시겠습니까?"
"세네카씨랑 똑같은 걸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녀에게 한가하게 앉아있던 종업원을 불러 주문 사항을 전달했다.
소세지라. 판타지인데 그대로 소세지라고 하는구나.
아님 번역일까?
딱 봐도 서양인인 사람들이 한국어를 하고 있는 건 되게 기묘하면서 국뽕이 잔잔하게 차오르는 광경이었다.
물론 소세지는 한국어가 아니다.
"헌데 세네카씨가 활을 쓰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 봤을 때에도 칼 한 자루만 차고계셔서."
허공을 물끄러미 보던 세네카는 내 질문에 귀밑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는 산뜻하게 웃었다.
"도시 안에서 들고 다니기엔 너무 거추장스럽습니다. 잘못 쏘면 애꿎은 사람이 다칠 수도 있고요."
"그건 칼도 같지 않습니까?"
"칼은 적어도 가까이 붙지 않으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확실히, 그녀의 칼은 좀 짧은 게 주무기라기엔 이상했다.
"주현송씨와 그 여성분은 무슨 관계입니까?"
이름 틀렸다는 건 차치하더라도, 나에게 돌아온 질문은 좀 당혹스러운 종류였다.
"여성이라면…?"
"도시에 들어오실 때 동행하셨던 여성분 말입니다. 얼굴에 베일을 쓰신 분."
아, 겨울의 처녀를 말하는 거였나. 나는 대답을 좀 골랐다.
"제 종자이십니다."
"…서로 존댓말을 하는 종자군요."
음, 이상한 건가?
난 그런 문화는 잘 모른다. 이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치트키를 꺼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제가 야만인이라 그런 쪽으로는 잘 모릅니다. 그분께서 부탁하기에 그렇게 했고, 재주가 많아 신용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간단하게 납득했다. 야만인이면 어쩔 수 없지. 그런 표정이었다.
"헌데 주현송씨는 야만인인 것치고는 무척… 예의가 있으십니다."
겨울의 처녀 건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는지, 그녀는 종업원이 가져온 에일을 한 모금 들이키며화제를 돌렸다.
"뭐… 예의가 없으면 위험하기 좋은 시대니까요."
추방당했다는 야만인 하나를 떠올렸다. 얼굴도 본 적 없지만, 그건 확실히 존나 좋은 반면교사다.
"…아마 주현송씨가 추방당할 일은 없을 겁니다. 성주님을 죽이는 정도가 아니고서야."
이 새끼 왜 플래그 세워.
반응해주면 내가 진짜 죽이게 되는 좆같은 미래가 나올 거 같길래, 검연쩍게 웃으며 넘겼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제 생존전략이 잘 맞아들어가고 있다는 의―"
"차오니마…."
나는 내 뒤에서 들려온 그 말을 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무릇 모든 게이머라면 저 단어를 모를 수가 없었다.
느금마 쩔더라, 이른바 느금쩔이라고 할 수 있는저 말은 중국 욕설의 표준이자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마법의 단어였으니까.
짱깨를 죽이던가, 짱깨한테 죽던가, 아니면 짱깨를 보기만 해도 나오는 저 마법의 주문은 짱깨를 판가름하는 기준이었다.
그리고 저건 짱깨 욕설의 마지막을 반드시 장식하는 마법의 단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meimeiG가 여기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주현송씨?"
말을 하다말고 멈춰서 세네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그딴 걸 신경 쓸 겨를이 있을리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핵쟁이 짱깨 씹새끼가 떨어지고 이 지랄이 난 거라면, 당연히 그 핵쟁이도 같이 이 세계에 떨어졌을 게 아닌가.
이를 부득 갈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
"주현송씨?!"
허리춤에 메어진 칼을 뽑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탁자에 뻗어 잔을 들이키고 있던 짱깨새끼는 나를 보더니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 애미 뒤진짱깨새끼야!!!"
"끼에에에엑!"
짱깨가 선술집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