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화 〉회색의 주인 (12/274)



〈 12화 〉회색의 주인

고대의 도시는 일단은 안전지역으로 구분된다.
퀘스트 수행 여부에 따라 멸망하거나 몬스터가 출몰하거나 하기는 하지만, 시작하는 순간에는 안전하고 사람 살만한 땅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대의 도시에는 비밀 지역이 하나 있는데, 그 지역은 고대의 도시와 동등한 크기를 가진 아주 거대한….


"유적이군요."
"맞습니다."

세네카는 그제서야 납득이 간다며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알려준 입구는 몇명의 자경단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우리의 계획은
1. 포위를 유지한  입구를 열어 뛰쳐나오는 놈들이 정리되길 기다린다.
2. 그 후 진입해서 원흉인 마법사를 죽인다

이런 간단한 두 단계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저 단촐해보이는 건축물이 딱 붙어있는 산에 뭐가 있는지 그녀를 비롯한자경단들에게 설명했다.
이름은 칼날의 유적.
칼날 같이 생긴 칼날 산맥에 자리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정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겉보기엔 그냥 산에 나있는 동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테지만, 저 안에는 광대한 유적이 펼쳐져 있다.
안에 있는 적들의 수도 그만큼 많을테고, 그만큼 진입 이전의  '청소 과정'이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설명에 최대한 공을 들여 내부 진입 전 청소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다행히 세네카는 진중한 표정으로 내 말을 주워섬겼다.
설명이 끝나고 세네카는 부하들에게 이것저것 명령하더니, 몸을 가로지르게 메고 있던 활을 끌어내렸다.


상당한 크기인데?
그야말로 롱보우였다.

"두 분은 전력의 온존을. 저와 제 부하들이 길을 열겠습니다."
"세네카씨도 들어갈텐데 쉬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진 못하겠습니다. 개인적인 고집입니다."

그렇다면 말릴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그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고작 용병 나부랑이에 전사존만이들, 약간의 괴물 정도가 전부일테니 그녀도 그다지 소모되진 않을 거다.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별 탈 없이 초입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진입할 수 있겠지.
심지어 자경단은 무장 상태가 좋고 딱 보기에도 각 잡힌 게 빡세보였다.
걱정할 건 전혀 없다는 얘기였다.


몇 명의 자경단원들이 준비를 하고, 문 앞에 무언가를 설치하는 사이 나는그나마 대화할만한 상대인 메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궁금한 게 있는데."
"으, 응?"

내가 손을 내밀자, 짱깨는 노골적으로 움츠러 들었다.

"meimeiG는 무슨 뜻이냐?"


이 게임에서 볼만한 닉네임이라고는 중2병 작명이나 대충 지은 것 정도 밖에 없었으니까, 굳이 실명을 넣은 닉네임에는  호기심이 동했다.

"…꼭 말해야 해?"

궁금하긴 한데, 꺼린다면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싫음  말해도 되는데."


대충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지만,뭔가 고민하는 모습이 잘못 전달된 것 같았디.
이걸 정정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자니 짱깨가 갑자기 불현듯 입을 열었다.

"…."
"뭐? 잘 안 들리는데?"

심지어 자경단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여서 쇳소리가 울리니 더 들리지 않았다.

"좀 크게 말해봐."
"…가슴이 G컵이라서."
"…너 병신이냐?"


씨발 이런 이유였으면  물어보는 거였는데.
그런데 갑주에 가려졌는데도 저 크기의 젖통이라면, 진짜로 G컵이 맞는  같긴 했다.
짱깨는 내 말에 반응하지 않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투구로 가렸다.


"그게 자랑거리…긴 하네."

그래, 커서 나쁠 건 없지. 막연하게 말하니 투구 속에서 울리는 이이익 소리가 들렸다.
그때, 세네카가 불현듯 외쳤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전원, 전투 준비!"


강철 무기들이 일제히 입구를 향했고,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들이 신음했다.

"발파!"


그 신호와 동시에, 세네카의 옆에 서있던 궁수가 화살을 쏘아냈다.
화염석을 매단 화살촉이, 문 앞에 놓여있는 자루를 꿰뚫었다.


콰아앙!


불이 넘실대고, 허약한 나무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우와아…."

짱깨는 순수하게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감상이나 하고 앉았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온다."


크, 이거지. 원래 이 상황에서 이 대사치는 놈이 제일 세보인다니까?
내 흡족함과는 별개로, 매연을 뚫고 무언가 뛰쳐나왔다.


"공격!"
"빌어먹을 자경단놈들을 죽여라!"
"움직여!"

 무리의 허접한무장의 전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세네카는 침착하게 당긴 시위를 놓았다.


슈욱
퍽!

그러자 시위를 당기고 기다리고 있던 자경단의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컥!"
"그르륽…."


기하급수적으로 수가 줄어드는 용병들에게, 세네카는 화살  발을 더 쏘더니 왼손을 치켜올렸다.

"진형 유지, 놈들에게 도시의 분노를 보여줘라!"


일제히 함성을 내지른 자경단의 창수들이 앞으로 나섰다.

*

자경단  피해는 경미했다.
죽은 사람은 없었고, 한 명이 눈먼 돌에 머리를 맞은  전부였다.
뚝배기가 깨질  했다는데, 강철 뚝배기라 괜찮았던 모양이었다.


"나도 투구 살걸."


용병이 쓰던 투석구를 보고 든 생각은 그거였다.
자칫하다간 머리가 박살날 수도 있어보였다.

하지만 없는 걸 어쩔 수는 없으니까.
나는 미련을 버리고, 죽어 나자빠진 시체를 넘어갔다.
허리춤에서 뽑은 적조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세네카는 선두로 나서는 내 등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뭐,  괜찮다고 해서 물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의례상 물어봤다고 생각하는  편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앞으로도 쭉 괜찮길 바라신다면 착실히 엄호해주세요."

세네카가 짧게웃었고, 분위기는 꽤 괜찮았다.
사기 유지를 그다지 신경 쓰는 편은 아니지만, 긴 탐색이 될테니 분위기만큼은 좋은 편으로 유지하는 게 좋았다.

"알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죠."


그녀는 활을 도로 등에 메고는 허리춤에 달려있는 소검을 뽑아들었다.
나 역시 방패를 손에 쥐었고, 그  뒤에 있던 자오 메이는 잠시 갈등하는가 싶더니 장검을 뽑고 방패를 들었다.

"내 등짝만 안 맞추면 된다."
"안 그럴 거거든!"


소리를 빼액 지르고는 자세를 잡는데, 솔직히 키가 155라고 했던지라 그다지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다.
끽해야 고기방패처럼 갑옷 믿고 몸으로 탱킹해주는  전부일 거다.

내가 맨 앞에서 적이랑 맞서고 싸운다면 세네카는 나를 지원하는 서브딜러였고, 자오 메이는 일종의 탱커 엇비슷한 무언가였다.
서폿 탱이라고 하던가?
그녀의 주역할은 생각해봐도 뻔했다.
이게 다크 판타지가 아니라면 몸으로 몬스터를 유혹하라고 시켰을 건데, 다크 판타지라 그딴 수작이 먹힐 거 같지도 않고.
바스락대는 소리와 절그럭 거리는 소리가 한참을 울리고, 우리가 준비를 전부 끝냈다고 생각할 쯔음이 되어서 나는 앞장섰다.


"좋아, 가자."

준비는 이미 충분했다.
나는 방패를 왼팔에 감고, 왼손에 든 화염석을 최대한 간지나게 칼에 긁었다.


푸화악

화염이 피어올라 검신을 감쌌고, 몇 병사가 놀라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배경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폭파되어 뜯겨나간 대문을 건너가자, 좁은 복도가 앞으로 이어져 있었다.
얼추 기억에 있는 통로인 걸로 보건데, 게임에서랑 같은 복도인 것 같았다.

"길이로 추측하자면 저 앞에 있는 문을 지났을 때부터가 유적지일 겁니다."

물론 추측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PVE를 그다지 하지 않은 나지만, 적어도 핵심적인 부분은 기억하고 있으니까.


칼날의 유적은 특이하게도, 흔히들 다른 게임에서 언데드라고 부르는 종류의 잡몹들이 나온다.
좀비, 스켈레톤, 레이스 같은 것들.
그들 모두 인간의 시체거나 인간의 시체에서 빠져나온 무언가로 이뤄져있기 때문에 깡 물리 공격은 거의 통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만한 건, 좀비와 언데드의 경우에는 화염이, 레이스의 경우에는 속성 공격이나 마법이 유효했다는 거겠지.
여기 마법사가 없는 이상 유이하게 유효한 공격 수단은 화염석으로 인챈트한 적조나 창백한 겨울 뿐이었다.
그마저도 세네카가 속성 공격수단이 드문만큼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 귀찮아지겠지만 아직까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스켈레톤은  유적의 중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하니까.

즉, 초입조차 되지 않는 이 복도는 물론이고 저 앞의 유적 초입까지는 무조건 할만했다.
나는 긴장을 좀 덜어내고, 적조를 어깨에 걸친 채로 복도 문으로 다가갔다.


"여긴 아무래도 괜찮은 모양입니다."


내 말에 메이가 잔뜩 쫄은 채로 다가왔고, 세네카가 소검을 곳곳에 겨누면서 다가왔다.


"망설임이 없으시군요. 마법사를 많이 겪어보셨습니까?"


아, 물론 존나게 겪어봤지.
내가 결투 매칭을 돌리면 반절 이상은 마법 쓰는 씹새끼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얼추 마법에 대응하기 위한 전술 같은  갖춰놓고 있었다.


 세계에서 얼마나 먹힐지 알  없는 것 뿐이지.


만약 게임에서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PvP 전략과 이 다크 판타지 속 마법사들의 전투 양식이 비슷하다면 더할 나위 없을 건데… 그게 그리 될지는 미지수다.
최악을 가정하며 세네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좀 겪어봤습니다. 죽이기도 좀 죽여봤고요."
"믿음직하군요."


세네카가 소검을 검집에 밀어넣고는 등에 짊어졌던 활을 다시 꺼냈다.
매기는 화살은 화살촉에무언가 묶여있었다.
세네카를 잠시 겪어본 바로는 쓸데없는 짓은  거 같은 사람인데, 저건 또 뭐래?

"그건?"
"아, 이거 말이시군요."

그녀는 화살을 시위에서 내려 화살을 짧게 잡았다.
허, 생긴 건 종이 같은데.

"화염석으로 대비하신다기에, 저도 엇비슷한 걸 준비해봤습니다.저희 일족의 비전 기술입니다."


뭔 기술인지는  수 없지만, 조만간 알게 되겠거니 싶었다.
그리고  화살을 본 메이가 세네카의 등 뒤에서 말했다.

"나, 나도 이 칼로 대비할  있어!"
"그래, 이번 전투만 지나면 팔고 새로  자루 구해야지."
"이이익!"

분해하는 메이를 무시하고, 나는 문에 손을 얹었다.


"이 앞에서부터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부디 염두해두시고, 침착하게 각개격파로."


끼이익


엥?
나무로 된 문을 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나는 세네카의 얼굴이 굳어가는 걸 봤고, 메이가 칼을 들어올린 자세 그대로 경직한 것도 보았다.

왠지 기시감이 드는데.
뭔가 얼마 전에 봤던 것 같은 상황이지만, 나는 착실하게 고개를 돌렸다.

덜그럭

상아색으로 이뤄진 어여쁜 두개골과 눈동자는 커녕 엇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 심후한 눈구멍.
그리고 양손에 든 조잡한, 뼈로 이뤄진 무기에 몸에 걸쳐진 로브.

와! 스켈레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나는 감탄사를 참지 못했고 세네카는 화살을 참지 못했다.
쏘아진 화살이 멋진 회색빛깔로 폭발하더니스켈레톤의 몸뚱이를 쓰러트렸고, 다른 스켈레톤 하나가 그 빈 자리를 메우며 밀려들었다.

"이런 썅!"

생각할 틈조차 없었지만, 다행히 선공은 내가 더 빨랐다.
휘두른 적조에 스켈레톤의 팔이 박살났고, 내 방패 후려치기가 그 두개골에 내리꽂혔다.
내 조잡한 기술에도 박살날만큼 스켈레톤은 약했지만, 녀석은 박살난 정도로는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쪼개지는 두개골의 뒤로,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막대한 언데드가 몰려들었다.
좀비, 스켈레톤, 레이스, 고위 언데드인 구울까지.

그리고 그 중 구울이 나를 보고 미소를 짓는 걸 보고,  반사적으로 외쳤다.


"도망쳐어어어어!"

메이와 세네카, 나는 바람처럼 빠르게 뛰쳐나갔다.
 뒤로 무수한 뼈소리가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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