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회색의 주인
언데드들의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았지만, 쏟아져 나오는 수가 만만찮았다.
안 그래도 통각이 존재하지 않는 몬스터라 바깥의 자경단원들이 맞선다면 피해는 막심할 것이었다.
"밖으로 나갑시다!"
그렇다고 여기서 얌전히 모두 뒈질 수는 없었으니,나는 세네카의 팔을 붙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예? 예!"
그녀는 화살 한 대를 더 쏴 메이의 뒤에서 접근하던 좀비의 눈구멍을 꿰뚫고는 내달렸다.
"두고 가지마!"
"안 두고 가, 병신아!"
메이가 따라잡힐까 비명을 질렀고, 나는 왼손에 든 화염석에 칼날을 긁었다.
까가각, 푸화악!
깡!
불꽃이 피어오르고, 긁은 자세 그대로 칼날을 아래에서 위로 휘두르니 스켈레톤 하나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세네카! 이 새끼들은 화염이 잘 먹힙니다! 화염석 다 가져오라고 하세요!"
좁은 복도라서 수가 그렇게 위협적이진 않지만, 물량이 너무 많으니 그것도 그렇게 여의치 않았다.
바깥에서 자경단원들이 방어 준비를 마치려면 누군가는 여기서 저 새끼들을 막아야했다. 도망치라고 외치긴 했지만, 결국 누군가는 도망을 못 친다는 얘기였다.
"짱깨!"
칼을 들고 우왕좌왕하는 자오메이의 갑주에 방패를 약하게 부딪혀 주의를 끌고는, 밖을 가리켰다.
"밖으로 꺼져! 방해되니까!"
물론 진짜로 방해되는 건 아니지만, 저 당황한 꼴을 보면 멀쩡한 명령으로는 알아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짱깨라고 하지 말라니까!"
메이는 그렇게 빽 외치고는 밖으로 뛰쳐나갔고, 세네카는 화살을 연거푸 쏘다가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뭐, 딱히 여기서 '내가 남을테니 먼저 가, 곧 뒤따라 가지.' 같은 걸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넘쳐서 주체가 안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냉정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PVP를 1:多로 해본 적이 없던 건 아니다.
으레 뉴비들은 자기를 보호해줄 유저를 데리고 다니기 마련이었고, 나 역시 그랬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데, 이렇게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가장 까다로운 적을 처리하기 보다는 가장 잡기 쉬운 놈들을 빠르게 하나씩 격파하는 게 중요했다.
거기에 1:1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하는 게 좋은데 그러기엔 복도가 지나치게 넓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그러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한정적이었다.
협공당하면 뒈지게 위험하겠지만… 그 협공을 견디면서 싸우는 게 그나마 가장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다.
다시 한 번, 화염석을 칼에다 긁어 불을 피어올리고, 칼을 휘둘렀다.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거친 손맛과 함께뼈를 갈라냈고, 갈라진 뼈는 후두둑 무너지며 제 파편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와중에 허공으로 떠오른 스켈레톤의 머리를 방패로 후려깠다.
"윽."
하지만 그렇게 착실하게 상대한다고 줄일 수 있는 수가 아니었다.
출근 시간의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가 대충 이런 느낌이었던 거 같다.
그 인파 전체가 날 죽이려고 든다면 더 비슷하겠지.
씨발 뭐 이렇게 많아?
내 옆구리로 파고든 좀비의 손목을 방패 모서리로 찍고, 칼을 세워 그 목에 찔렀다.
썩은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아, 씨발. 난 왜 맨날 고름 밖에 못 보냐."
뽑아낸 칼날에는 누렇게 고름이 묻어있어서, 나는 학을 떼면서 다시 화염석을 긁었다.
긁고, 패고, 긁고, 벤다.
일련의 과정에서 내 몸뚱이가마냥 멀쩡할 순 없었지만, 최대한 방패로 바쁘게 공격을 막고 가죽 갑옷으로 빗겨냈다.
상대가 언데드라 막 개쩌는 움직임 같은 게 없으니 좀 부담이 적었다.
할만한데?
그 순간, 무언가 빠르게 언데드 틈바구니를 파고 들었다.
"구울…!"
구울은 낮게 몸을 숙이고, 주먹을 제 몸에 단단히 붙인 채로 나를 향해 튀어올랐다.
아니, 튀어오른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강하게 몸을 폈다. 펴지면서 몸에 딱 붙였던 주먹이 쏘아졌다.
썩은 살점이 들러붙은 단단한 주먹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꽈앙!
이런 씹.
방패를 들어올려 막았지만, 여러번 막을 수 있는 공격같진 않았다.
한 번 막았을 뿐인데 방패가 격하게 떨려왔다.
전신이 근육으로 덮인 좀비.
가죽이나 피부는 없이, 오롯이 근육으로 이뤄진 활달한 언데드.
좀 뒈졌으면 부패할 것이지, 멀쩡해서 사람 좆같게 만드는 몬스터였다.
그리고 내가 아는데, 저건 이 유적의후반부에서나 나오기 시작한다.
"씨발… 좆같은 2회차!"
구울은 내가 휘두른 검날을 가볍게 피하고, 발을 내민다.
이건 도저히 피할 수 없다. 반사적으로 방패를 몸 가까이 붙였다.
까아아앙!
묵직한발차기가 방패째로 내 몸을 튕겨냈고, 나는 불타고 부숴져 바닥에 누워있는 문짝과 함께 복도 밖으로 빠져나왔다.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세네카의 새된 목소리에 나는 몸을 눕혔다.
"사격!"
나를 따라오던 언데드들이 화살에 꿰여 쓰러졌다.
"괜찮으십니까?!"
"예, 예. 좀 괜찮습니다. 전황이 괜찮지 않지만요."
세네카는 내게 다가오던 구울을 보고는, 활에 재빠르게 화살을 매겼다.
투웅!
시위 소리와 함께 쏘아진 화살을 구울이 겨우 피했으나 그 옆에 몰래 접근한 여자의 돌진은 피하지 못했다.
"우와악!"
방패를 내세운, 간단한 몸통박치기. 부딪힌다고 하더라도 잠깐의 경직 밖에는주지 못할 공격.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원래 PVP는 그 찰나의 경직으로 승부가 갈리고는 했다.
방패에 부딪혀서 그걸 떨쳐내느라 움직임이 멈춘 구울.
튕겨져나가는 메이.
그런 구울의 바로 앞에 뻗어있는 나.
그리고 나는 망설임 없이 적조를 휘둘렀다.
서걱!
절단은 생각보다 더 어려워서, 그림은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만큼은 충분했다.
언데드보다는 살아있는 몬스터에 가까운 구울은 목이 찢어진 상처에 비척댔다.
"세네카!"
"예!"
찢어진 목을 반사적으로 움켜쥐는 구울의 머리에 화살이 돋아났다.
고위 언데드 중 하나인 구울은 그렇게 죽었고, 나는 이렇게 살았다.
하지만 한 마리 죽였다고 늑장 부릴 여유는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는 제 엉덩이를 문지르며 눈물 짓고 있는 메이의 팔을 잡았다.
"잘했어, 짱깨."
"짱깨라고 하지 말라고…."
"그래, 핵쟁이."
"이익…."
일어난 핵쟁이가 금방 다시 쉬려고 하길래, 나는 메이의 갑주를 방패로 다시 두드렸다.
"무기 뽑아. 더 온다."
"뭐? 더?"
얼굴이 투구에 가려져서 보이진 않았지만, 파랗게 질려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울이 죽은 이상, 버틸만한 전투일 거다.
나는 적조를 고쳐쥐고 불을 피어올렸다.
*
"원래 여기… 이래?"
"나도 몰라 씨발."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자경단원이 건네준 물을 들이켰다.
"나도 줘… 근데 모른다니? 너 고수 아냐?"
"여기. 내가 고인물인 건 맞는데, 난 씨발 PVP 전문이지 PVE 전문이 아냐. 2회차는 해본 적도 없다고."
"그럼 1회차 때는 안 이랬어? 근데 왜 1회차만 했어?"
메이는 투구를 벗고서, 길게 늘어진 웨이브 진 곱슬머리를 쓸어넘겼다. 물통을 양손으로 쥐고는 망설임 없이 입을 댔다.
…그러게?
이 꼬라지가 될 줄 알았으면 2회차 해봤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1회차 땐 당연히 안 이랬지. 이 빌어먹을 게임은 회차가 지날 수록 적이 강해지고 많아지고, 패턴도 늘어난다고."
"아…."
보통이라면 갓겜이라고 칭송할만한 점이지만, 그게 현실이 된 지금은 개좆망겜이나 다름 없다.
"그럼 우리 망한 거 아냐?"
"우리가 아니라 네가 좆된 거지. 난 아직 할만한데?"
"왜 허세 부려."
"허세 아닌데?"
"씨이."
물통을 비운 메이가 가슴이 답답하다며 갑옷을 벗으려고 하길래, 나는 그 손을 잡아 막았다.
"곧 다시 들어갈 거니까 벗지 마라."
"힝."
상황만 아니라면 흉갑을 풀게 두고 땀에 젖은 음탕한 G컵 빨통을 구경하면서 눈요기 좀 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짓거리를 하기엔 너무 급박했다.
운이 없군.
"좀 쉬셨습니까?"
세네카는 한술 더 떠 제 부하들에게 명령하랴, 튀어나오는 거한테 화살 쏴대랴 어마어마하게 바빠보였지만 생각보다 멀쩡해보였다.
체력이 좆밥인 우리 현대인들과는 달리 이 판타지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체력이 좋은 것 같았다.
"예, 좀 쉬었습니다. 다소의 피로가 있긴 하지만… 물약이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겼다.
언데드의 파상공세는 1시간 정도 이어졌고, 자경단원들에서도 부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지만 성주인 세레나 본인과 그녀의 호위대 역시 전투에 참여하면서 빠르게 매듭지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감탄할만한 성과를 올린 건 성주 본인이었다.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주현성님."
세레나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고, 나는 얼핏 웃었다.
"덕분에 좀 쉴 수 있었습니다."
세레나의 강함은 세네카보다 한술 더 떴다.
얼핏 평범한 한손검보다 살짝 더 긴 장검을 쓰고 있었는데, 그 장검이 번뜩일 때마다 베인 언데들이 가볍게 침묵했다.
검술이라고는 좆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상당한 솜씨였다.
심지어 무기가 '아이템'이니 오죽할까.
난 그녀의 허리춤에 메어진 양손검을 흘깃 보았다.
"헌데 상당한 검 솜씨더군요. 놀랐습니다. 검도 상당한 물건이지만 성주님의 솜씨가 더 놀라웠습니다."
"소싯 적에 그럴 이유가 있어 검술을 익혀두었습니다. 검은… 저희 일족에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입니다."
그레이톰의 심판.
마법을 무효화한다는 장검이었다.
게임에서 얻는 방법은 도시가 멸망하게 뒀다가 다시 돌아와 건져가는 거라 번거로웠지만, 간지나는 외양과 준수한 성능 탓에 PVE 고인물들은 2회차나 3회차에서 한 번 정도는건진다고 하는 아이템이었다.
물론 나는 사용해본 적도 없다.
아무튼, 성주가 그걸 쓰는 건 신기한 일은 아니다.
신기한 부분은 그게 아닌 다른데 있었지.
바로 세레나가 우리와 합류해, 같이 유적에 진입하겠다고 말한 게 가장 신기한 부분이었다.
이 새끼는 위기 의식이 없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넘치는 건지.
"헌데 그런 가보를 들고 같이 진입하셔도 되겠습니까? 성주님께 문제가 생긴다면 도시에 있어서는 막대한 피해일텐데요."
"예상을 넘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쩔 수 없죠."
뭐, 틀린 말은 아니다. 2회차의 유적은 내 생각보다 더 빡센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래서 성주 측에서 같이 돌입할 것을 요청했고,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오히려 세레나가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제안했을 거다.
"추정되는 크기도 상당하니, 제 휘하의 병사들 몇 명을 대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반가운 소리다.
내가 아니라 해방자였다면, '그런 건 필요없다.'라고 족간지나게 말하고 폭군의 검어깨에 걸치고 가서 마법사 뚝배기까지 초스피드로 때려부쉈겠지만 나는 해방자가 아니었다.
내 무력함에 몸을 떨진 않았지만 약간 현자 타임이 올 무렵, 세레나는 나를 달래줬다.
"헌데 귀공의 무력도 상당하더군요. 구울은 본디 많은 피해를 내면서 잡을 수 밖에 없는 괴물입니다."
아, 그렇고 말고.
내가 아이템을 갖고 있지 않고, 소싯적에 싸움질 하고 다니는 새끼가 아니었으면힘들었을 거다.
당장에 내 옆에서 가슴이 눌려서 답답하다고 찡찡대는 짱깨가 없었으면 머리가 수박처럼 깨졌을 수도 있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또 그렇게 말하시는군요."
세레나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렇게 겸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분명 검술이나 전투법은 서투르시긴 하지만, 죽이는 방법을 안다면 구태여 꾸밀 필요는 없죠. 귀공은 제가 그리던 가장 이상적인 야만인 전사입니다."
이걸 칭찬으로 받아야 하나, 아니면 '너 존나 추하게 싸우더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내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자, 세레나는 마주 웃고는 내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와, 씨발 악력 좆되네.
"오늘 저녁이 되면 출발할테니, 저기에서 식사 받아가십시오. 그리고 가능하시다면… 그 후에 제 천막으로 와주십시오."
입구를 봉쇄하고, 근처에 야영을 위한 천막이나 간이 침대등을 설치하는 자경단원들과 시민군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적인 야만인이라.
졸지에 생긴 내 판타지 속 정체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