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회색의 주인
"…오트밀의 밀은 밀가루의 밀일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내 말에 메이는 그렇게 답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식사를 입에 떠넣었다.
본래라면 바로 출발하려고 했었으나, 저녁으로 미뤄진 탓에 우리는 예기치 못한 휴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짱깨는 흉갑을 풀어 제 옆에 내려놓았다.
짱깨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두 개의 거대한 젖탱이는 중력이라던가 이런저런 영향으로 움직였다.
와, 존나 커.
땀에 젖어있으니 비쥬얼적으로도 굉장했지만, 너무 빤히 보면 눈치챌지 모른다는 생각에다시 내 식사로 고개를 돌렸다.
"오트밀의 밀은 무슨 밀일까."
이번이 두번째 먹는 거였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하는 식감과 맛이었다.
편의점 식사로 거의 반년 넘게 떼우던 내게 있어서는 너무 마일드했다.
그래도 안 먹으면 싸울 수 없다.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이번 보스는 늪지의 요람과는 격을 달리하는 보스다.
본격적으로 빡세지기 시작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적어도 배라도 든든하게 채워놔야지.
"식사는 하실만 하신가요?"
그런 우리의 자리에서 불을 쬐면서 청초하게 앉아있는여성은, 본래라면 여기에 없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예, 맛있습니다. 겨울님도 드시죠."
"신경 써주시는 건가요?"
겨울의 처녀. 그녀는 성주의 허가 하에 성주의 저택 손님용 방으로 옮겨져 있었고,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분위기가 이상해 따라나섰다고 했다.
성주의 병사들이 막아세우려고 했지만….
나는 그녀가 가져온 폭군의 검을 흘깃 보았다.
솔직히 저런 걸 들어 나르는 사람을 어떻게 막냐?
차라리 로드롤러를 막는 게 승산이 높겠다.
"당신께 봉사할 수 있는 게 제 기쁨입니다. 저는 개의치 마시길."
그렇게 말은 하지만, 내가 신경 써주는 게 기쁜지 평소보다 더노랫소리 같은 목소리였다.
묘하게 들떠보이기도 했고.
"언니 저도 조금만 더 주세여."
입 안 가득히 오트밀을 밀어넣고 우물거리더니 그릇을 내미는 메이와 그걸 받아들어 성실하게 오트밀을 퍼담는 겨울의 처녀.
나는 두 여성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아마 이 도시를 떠나는 시점에서도 이 파티 멤버는 그대로일 가능성이 높다고.
사실, 메이를 데려가는 게 좋은 생각인지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었다.
키는 작고, 가슴은 어마무시하게 크다.
싸우기엔 밸런스가 좋은 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그녀는 플레이어고, 내가 가르치는 걸 쉽게 흡수할 가능성이 높은데다 만약 게임을 클리어할 경우에는 두고 가야하는NPC들에 비해서는 다소 정이 들더라도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겨울의 처녀는 두고 갈 수 없다.
아이템의 수리는 그녀만 가능한데다, 그녀가 주는사소한 도움은 게임 내에서도 필수였지만 지금은 의식주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영역까지 뻗어있었다.
당장 이 식사만 하더라도 그랬다.
나눠준 귀리를 그냥 씹어먹고 있거나 조잡한 오트밀을 만들어 먹는 병사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불까지 얹어놓고 뭔 알 수 없는 건더기까지 넣어서 오트밀 죽을 만들어 먹고 있었으니.
그래도 중세 판타지의 음식이니 내 입맛에는 지나치게 밍밍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잘 먹었습니다."
그래도 착실하게 잘 쳐먹었다.
겨울의 처녀는 만족했는지 기분 좋아보였고, 메이는 단순한 성격인 건지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아보였다.
물론, 이내 일어날 일을 직감하고는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그럼저는 성주님을 뵙고 오겠습니다. 짱… 아니, 메이를 돌봐주세요."
"알겠습니다."
성주의 천막은 야영지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바로 앞에는 경비를 위해 그녀 휘하의 병사 두 명이 장병기를 들고 있었고, 미리 언질을 받은 건지 나를 보고는 고개를 까딱이고는 천막의 입구를 걷어주었다.
"오셨군요."
성주인 세레나 본인과 그녀의 언니이자 자경단장 세네카가 나란히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일전에 받았던 인장에 그려진 책과 같은 모양의 책이 한 권 있었다.
"예, 준비는 다 됐습니다."
물론 메이는 준비는 커녕 흉갑을 벗고 뻗어있을테니 준비는 나만 되어있는 셈이지만, 그녀를 준비시키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입히는 게 아니고 겨울의 처녀가 입히는 거니까.
"잘됐군요. 슬슬 출발하려던 참이었는데… 그 전에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
게임에서 이런 전개가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애초에 이런 독대 자체가 없었다는 게 떠올랐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레이톰 일족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존나 뜬금 없네?
근데 저렇게 시작하는 거면 무슨 얘기가 나올지는 대략 짐작은 됐다.
"전혀 모릅니다."
"저희 일족은 꽤 저명하다고 생각했는데, 주현성님의 부족까지는 닿지 않았던모양이군요. 그러면 불필요한 설명은 빼고…."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회색 책을 두드렸다.
"저희 일족은 본디 마법사에서 출발한 가계입니다. 물론 선조 이외에는 마법의 적성이 거의 없었고, 위대한 마법사인 선조가 남긴 마법서적에 빌붙어서 힘을 끌어내는 정도에 그쳤지만 충분히 가세를 유지할 수 있었죠. 저희 일족이 시작된 건 이 고대의 도시에 선조가 들어선 이후였습니다."
상황은 잘 알지만, 나는 잠자코 들었다.
"저희 일족은 마법사인 선조의 힘 아래에 결집했고, 고대의 도시를 차지하고 본격적인 도시로 가꾸었습니다. 저희의 치세 아래 고대의도시는 법과 도덕이 존재하는 훌륭한 도시로 재탄생했죠."
셀프 금칠이었지만, 사실이긴 할 거다.
내가 경청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니, 그녀는 안대로 가려지지 않은 눈을 빛냈다.
"하지만 선조는 사라졌습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허나 확실한 건."
그녀가 회색의 마법서적을 펼치자, 글자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사실은 이 도시에 암약하고 있었고, 죽은 자를 부려 도시를 멸망시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 서적이 유적에 가까워질 수록 반응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만들어낸 선조의 마력에 감응해서 말이죠."
알고 있던 전개는 아니었지만, 얼추 비슷한 양상이라서 나는 생각해놓은대로 반응했다.
"…그얘기를 제게 해주시는 이유는 뭡니까?"
"이 싸움은 저희 일족의 일입니다. 부외자인 주현성님에게는 이 싸움에 가담할 이유가 없습니다. 싸움은 아주 힘들 것이며,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확실하게 죽을 겁니다. 유적에서 저희를 기다리고 있는 마법사는 신대를 살아왔던 사람이니까요."
무슨 얘기인지는 뻔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빠질 거면 빠져도 된다, 이런 말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세레나와 쓴웃음을 짓는 세네카.
이 두 자매가 뭘 생각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도시의 위기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빡센 일인 줄은 몰랐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근데 씨발, 나는 빠질 생각은 좆도 없었다. 애초에 이런 것도 못하면 신은 못 죽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두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이 싸움에 함께할 것이며, 결말이 어떻든 끝까지 함께합니다. 대신 보상이나 두둑히 챙겨주십시오."
그리고 미소!
내가 생각하기에도 존나 듬직할 거 같았다.
세네카와 세레나의 표정이 삽시간에 밝아졌다.
세레나는 노골적으로 놀리는 듯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두둑한 보상이라면, 언니나 저와 결혼하는 건 어떻습니까?"
"…예?"
이런 선택지는 게임에서도 없었던 거 같은데.
"아마 제가 드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값진 보상일 겁니다. 저로서도잃을 게 없으니 상호이득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늪지의 요람을 죽일 정도의 강력한 전사를 제 편으로 둘 수 있고, 주현성님은 거대 도시의 수장이 되시는 겁니다."
그렇게 나쁘지 않은 제안이긴 한데, 한 편으로는 존나 정신나간 제안이었다.
"상대는 취향에 따라 고르셔도 상관 없습니다만핸디캡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미리 말하자면, 저는 밤일을 굉장히 잘한다고 자신합…."
뭔 미친 소리를 하는 거래.
농담치고는 너무 멀리 나갔길래, 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그런 농담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따로 사명이 있기도 해서, 모든 게 끝나면 도시를 떠나서 잠시 방랑을 하게 될 겁니다."
"아, 그러시군요."
도시의 스토리를 전부 진행하면 신 잡으러 가야하는데 결혼은 좀 아니지.
하지만 내 말을 어떻게 들은 건지, 세레나가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턱을 괴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요. 그렇다면 대신보수로 드릴만한 건…."
세레나가 손짓하자, 세네카가 약간 불퉁한 표정으로 천막한 켠에 놓여있던 양손검을 가지고 왔다.
검집에 들어가있는, 한손검보다 살짝 큰 검. 양손 사용을 전제로 하지만 밸런스도 좋은 장검이었다.
"이걸 드리겠습니다."
그레이톰(Gray-Tome) 가문의 가보이자 아이템 중 하나인 명검.
마법사 살해자라는 이명 역시 갖고 있는 독특한 장검인, 그레이톰의 심판이었다.
솔직히 존나 혹할 수 밖에 없었다.
못 쓰는 폭군의 검과 위력이나 부가 기능이 그리 특별하진 않은 적조.
그 두 가지 외에도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나쁠 게 없었다.
내 시선이 가보에 꽂혀있는 걸 아는지, 세레나는 요염하게 웃었다.
"솔직하시니 좋군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습니다. 가지고 계신 무기가 그다지 맞지 않는다는 느낌도 있었는데다, 도시의 구원을 위한 싸움을 함께 해주신다는데 빈손으로 보내드릴 순 없죠."
세레나는 그 가보를 도로 자신의 허리춤에 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세상은 허물어져 가지만, 마지막까지 신의를 지키는 게 저희 일족입니다. 보수는 일이 끝나고 유적에서 나온 후에 드리겠습니다. 저도 무기는 필요하니까요."
"물론입니다. 받는 입장에서 왈가왈부할 순 없죠."
세레나가 손을 내밀길래, 나는 그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다.
*
"와… 부럽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메이는 입술을 비죽 내민 채로 툴툴댔다.
이 새끼 인중 존나 세게 때려주고 싶네.
"꼬우면 네가 하던가."
"…그치만, 저분들 무섭게 생겼잖아."
뭐라는 거야.
저정도면 얌전한 편이지. 늪지의 요람보다야.
"어차피 이번 일이 끝나면 적조랑 방패는 너 줄테니까, 네가 갖고 있던 장비는 잘 팔아다가 돈이나 묵혀두자고."
"돈 묵혀둬서어따 쓰게?"
"하, 이 뉴비 새끼 고인물한테 토다네 인중 맞을라고."
인중을 가린 채로 뒤로 물러나는 메이를 무시하고 말했다.
"물약도 사야하지, 이것저것 소비품도 사야하지, 게다가 최종 목표가 신을 죽이는 거잖아? 그걸 감안하면 이래저래 돈이 든다고."
게다가 나나 메이의 좆밥인 육체를 감안하자면 회복약도 어마어마하게 필요하다.
"음…."
짱깨는 잘 모르겠다는 말 대신 침음성을 남겼고, 나는 그 인중에 딱밤을 남겨주었다.
"악!"
"고인물님이 말하면 대답은 네, 아니면 예 뿐이다."
하지만 내 그런 말을 무시하고, 메이는 붉어진 눈시울로 씩씩대며 나를 꼬라본다.
뭐, 보면 어쩔 건데.
다시 인중에 딱밤을 꽂을까 싶어 손가락을 들어올리니까, 메이는 오도도 도망가 겨울의 처녀의 뒤에 숨었다. 그리고 그녀의 베일 사이로 속삭였다.
"저런, 그런 일이…."
그런 메이를 제 가슴에 안으며 겨울의 처녀가 그 등을 다독였다.
뭐여, 왜 친해졌어.
분명히 좀 냉랭했던 것 같은데.
내가 다가가니, 겨울의 처녀는 베일을 드리운 얼굴을 내게 향하고는 속삭였다.
"제가 메이씨한테 잘 타이르고 설명해놓을게요. 너무 엄하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
뭔가… 뭔가 달랐다는 것 외에는 내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네카와 세레나가 진을 치고 있는 포위진으로 향했다.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로 선명하게 밤공기가 녹아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