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독의 하천
"돈까스 먹으러 간다며! 속였어!!"
짱깨는 드물게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졌다.
"다크 판타지에 돈까스가 어딨어."
짱깨는 속았음을 깨닫고는 난동을 부리고자 했지만.
"쉿, 괜찮아요."
"힝."
폭군의 검을 들어올릴 수 있는 근력을 상대로는 쨉도 안됐다. 겨울의 처녀는 메이를 껴안아 세웠다.
"왜 하필 수용소인데…."
울상으로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수용소는 뉴비들의 악몽과 같은 장소다.
분명 게임의 극초반일텐데도 악랄하게 짜여진 몹들과 구조.
그에 걸맞는 빡세고 무서운 보스.
뉴비들의 악몽이라는 말에 걸맞게, 나는 메이가 수용소로 간다고 하면 빠지려고 하거나 난동을 부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메이는 반드시 데려가야 한다. 그녀가 전력이 되는것도 아니고,그렇다고 크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지금 가서 할 장비 파밍이 아니면 이 새끼는 분명 엔딩을 보기 전에 죽을 거다.
짱깨에게 딱히 정이 든 건 아니다. 하지만 내 눈 앞에서 같은 플레이어 출신이 죽는 걸 보게 된다면….
최악의 가능성은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돈까스를 먹으러 가자는 헛소리로 녀석을 꼬드겨냈다.
중국에 살면서 돈까스를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는데, 설마 여기에 돈까스가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따라올 거라고는 솔직히 생각하지 않았다.
메이는 겨울의 처녀의 품에 안긴 채로 나를 돌아봤다. 그 눈동자에 담긴 건 여러가지 감정이었는데, 주로 공포와 귀찮음이었다.
어휴, 이 새끼도 참.
"나, 나는 두고 가도 되는 거 아냐? 언니랑 너만 가면…."
"응~ 너도 필요해~"
"히잉…."
결국 메이는 포기했다. 혼자 이 도시에 있다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준비물 체크해."
"알겠어…."
메이는 자기 몫의 가방을 뒤져 물건들을 꺼냈다.
이 새끼 정리라는 개념이 없나?
존나 뒤죽박죽이었다. 그런 꼴을 보자니 심란했던 감정도 가라앉고, 존나착잡해지기만 했다.
"겨울님."
"왜 그러시나요?"
"저 새끼 가방 정리 좀 도와주실래요?"
"네, 당신이 바라신다면."
결국 메이의 가방 정리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야 겨우 끝이 났다.
나는 하수구로 이어지는 철문 앞에서 걸터앉았다. 그런 내 모습을, 등에 존나 큼직한 검을 찬 겨울의 처녀가 부드럽게 보고 있었다.
아니, 본다는 말은 틀린가?
"상냥하시네요."
"엥, 제가요?"
"예, 굳이 돌보지 않아도 될텐데 충실하게 돌보고 있으시니까요."
그런가?
파티원을 굳이 뽑으라면, 세네케나 세레나가 단기적으로는 나아보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플레이어라서 이 세계에 대한 설명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내가 내리는 지시에 따를 가능성이 높은 메이가 장기적으로는 더 나은 동료일 거다.
이 세계의 주민에게 공격력이 어떻느니, 능력이 어떻니 얘기해봤자 이해도 못할테고.
나름 합리적인 이유로 선발한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겨울의 처녀에게는 그렇게 비춰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제게 조금 소홀해지셔서 슬픕니다."
그녀의 차가운 손이 내 뺨을 훑었다.
"가끔은 저도 돌봐주시길."
항상 나나 메이한테 식사를 대접하거나 장비를 수리하는 등, 시중을 들어주는 그녀가 한 말이라 뭔가 기분이 묘했다.
게임에서는 한 번도 들을 수 없는 말이었으니까.
애초에 여긴 게임이 맞나?
어중간한 생각으로, 단순하게 게임하듯 진행을 하기엔 석연찮은 부분이 한 둘이 아니었다.
보스몹은 자신의 사고 끝에 움직였고,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 쳤다.
그 발버둥의 결과 중 하나를 내려다보며 나는 착잡해졌다.
화염석이 검집의 입구를 이루고 있는 이 물건은, 세네카의 말을 빌리자면 시제작품이었다.
검을 뽑으면 자동으로 거기에 화염을 두르고, 그로 인해 화염을 직접 손수 화염석을 꺼내 두를 필요 없이 사용할 수 있는데다 처음 한 번의 공격에 한해서 화염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은 훌륭한 물건이었다.
다만, 게임에 이런 건 없었다.
게임 속 세계에서 만들어진, 게임의 규격에 맞지 않는 물건.
내가 만약 화염석을 쓰지 않았더라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물건.
그점이 가장 기묘했다. 내가 이 세상에 변화를 촉구하고 있었지만, 막상 가장 목가적인 변화가 다가오니 몹시 생경했다.
내가 들어오고 이 세계가 바뀌고 있는 거라면, 마지막까지 나아갈 수나 있을까?
내가알고 있는 정보들은 어디까지 도움이 되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과 심란함을 느꼈는지 겨울의 처녀는 내 뺨을 쓰다듬던 손을 움직여 내 눈가를 스치고는 내콧잔등을 거쳐 내 입술을 문질렀다.
한참 내 입술을 문지르던 그녀는 자애롭게 웃었다.
나는 그 미소를 마주보면서 그 차가운 손을 쥐고 내려놓았다. 내가 웃으니 그녀는 소리내어 기뻐했다.
호의에 아니라고 할 정도로 나는 개새끼가 아니었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당신과 함께 외출하니 좋네요."
베일 속에서 옅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내 대답에만족한 듯 싶었다.
"원정이니 만큼 그렇게 오붓하진 않을 겁니다."
그녀는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는 입으로 호선을 그렸다.
어째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다 고아하냐.
솔직히 베일을 쓰고 다니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괜찮습니다. 당신께서 곁에 계셔주시는데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또 부끄러운데.
부끄러워 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겨울의 처녀는 작게 웃었다.
그래서 나는 괜히 그녀의 머리를 헝클였고, 그녀는 그런 나의 장난도 즐거운지 행복해했다.
*
"구에에에엑."
짱깨의 역겨운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나는 찌푸린 표정으로전방을 살폈다.
오랜만에 오는 지저의 늪지는 뭐랄까, 좆같았다.
좆같은 냄새와 좆같은 전경, 조금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둑함과 탁한 공기에서 느껴지는 불쾌함. 황사가 맥시멈으로 불어오는 날에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하긴, 수백년 묵은 똥독 늪지이니 그럴만도 하지만.
오랜만에 와서 그런 건가?
"냄새가 전보다 더 심하군요. 당신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아닌가 보다.
하기야, 맹인은 다른 감각이 더 뛰어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아주 멀리에 있는 물체의 냄새조차 구분할 수 있는 걸 감안하면 그녀에게 여기는 생지옥에 가깝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를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혹여 장비 손상이라도 간다면 수리할 사람은 그녀 뿐이었으니까.
식사도 그렇고.
나나 짱깨가 요리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 없을 거다.
게다가 그녀의 탐지 능력이 불침번에 무척이나 최적화된 것도 있다.
나는 찌푸렸던 눈쌀을 돌리며 허리춤에 손을 얹었는데, 그때 뒤에서 메이가 말했다.
"힝… 코 아파…."
메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울렸다. 무슨 코맹맹이 소리나 다름 없었다.
"너 목소리가 왜… 아."
그녀는 건틀릿을 낀 손으로 제 코를 꾹 누른 채였다.
"그러니까 애새끼처럼 들리는구나. 존나 웃기네."
"왜 나쁜 말해."
"뭐라고? 뭐라는지 모르겠는데? 코맹맹이 애새끼 목소리라 잘 안 들리는데? 에베벱?"
"이이익…."
내가 코를 꾹 눌러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놀리자, 그녀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게 한참간 놀림을 받으니, 결국 메이는 입을 꾹 닫고 걷기 시작했고, 나는 겨울의 처녀를 이끌면서 그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몬스터가 하나도 없네."
메이의 말대로, 몬스터는 하나도 없었다.
그럴만도 한게, 지저의 늪지는 고름쟁이와 늪지의 요람을 제외하면 존재하는 몬스터가 전혀 없는 지역이었다.
독 때문에 좆같은데 몹을 더 때려넣어봐야 의미가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 세계의 논리대로라면 이렇게 독이 짙은 장소에서는 생명이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인지. 무엇이 먼저 오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독의 하천부터는 몬스터가 나오니까.
탁한 빛깔의 흙을 밟아 독의 하천 방향으로 향하니 슬슬 빛이 들어오는 구멍과 함께 무언가 보였다.
큼직한 하수구 창살 같은 것이, 아주 거대한 것에 부딪혀 작살난 흔적이 있었다.
"으, 싫어."
메이가 그렇게 찡찡댔고, 나는 이번에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솔직히 나도 독의 하천은 별로 안 좋아했거든.
지저의 늪지처럼 아예 독이 널려있는 건 아니다. 독을 거는 지형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몬스터의 양이었다.
독의 하천은 수용소를 탈출한 해방자가 지나가는 사실상 두번째 필드라고 할 수 있는 장소였는데, 적당한 독 덕에 독을 쓰는 존나게 많은 몬스터가 나온다.
그 수는 수용소에서 약소한 파밍을 마친 정도로는 감당하기 어려웠고,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독의 하천의 길이가 짧은 걸 이용해서 빠르게 지저의 늪지까지 주파하고는 했다.
과연 그게 게임 속 세상에서까지 먹힐지는 알 수 없었지만.
"씨이발."
내가 먼저 지나가고, 메이가 그 뒤를 겨울의 처녀와 함께 넘어왔다. 부숴진 하수구의 창살은 녹슬어 있었는데도, 근처에는 인기척 하나 없었다.
"왜 이리 조용하지? 진짜 아무것도 없는데…."
습격을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조용히 독물이 시냇물마냥 가로지르고 있는 걸 제외하면 소리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 점을 메이와 겨울의 처녀에게 상담했다.
"냄새 때문이 아닐까?"
"당신께서 말하신대로 늪지의 독성이 강하다면… 여기에 자생하는 생물군들이저 장소의 독성을 버티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그런 거 같았다. 확인해보고 싶은생각은 없었지만.
"그러면 수용소까지 문제 없이 갈 수도 있겠군요."
"그럼 좋겠는데…."
메이는 뭔가 불안한 듯 싶었다.
사실, 플레이어라서 갖고 있는 인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면 여자의 감 뭐 그런 거던가.
내가 먼저 나아갔고, 일행이 뒤따랐다. 나는 쭉 펼쳐진계곡을 보면서 괜히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코를 킁킁 거렸다.
독의 하천은 지저의 늪지에서 흘러나온 독이 강을 이뤄서 흘러가고, 그 근처를 둘러싼 계곡이 특징적이었다.
음울한 외관에 잘 어울리는 색이 이상한 계곡, 이따금씩 하천이 삐져나온 곳에서 풍겨오는 딱 보기에도 불길한 종류의 냄새.
심지어 직선적으로 쭉 뻗어있어 엄폐물도 드물었다.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는 몬스터가 나오면 까다로워졌다.
하지만 설마 그렇게 빨리 뭐가 나올까?
나는 그 생각을 빠르게 바꿀 수 있었다.
*
컹! 컹컹!
피에 젖은 검날을 빼내자, 바로 옆에서 치고들어오는 창. 나는 옆으로 내딛으며 짖어대는 괴물의 팔을 붙잡았다.
"씨이발!"
붙들고 줘패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바로 내가 붙잡은 괴물의 뒤에서 다른 괴물이 창을 찔러왔다.
괴물에게는 동료가 많았고, 내 동료는 죄다 발이 묶여있었으니 당연했다.
나는 겨우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간 창을 붙잡았다. 하지만 나는 두 명의 괴물이나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내 눈이 핑 돌았고, 나는 어느새 바닥에 몸을 눕히고 있었다. 내 얼굴 위로 창이 들어올려졌다.
아, 좆같은 독.
비명을 지르려고 하니까, 나보다 먼저 누군가 비명을 대신 질러줬다.
"우와악!"
괴물의 목을 비집고, 검날이 튀어나왔다.
붉은색으로 빛나는 외날 직검. 내게 무척이나 익숙한 무기였다.
괴물이 쓰러지자, 투구를 뒤집어쓴 채로 헐떡이는 메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다른 괴물이 메이에게 눈을 돌리자마자 누운 자세에서 장검을 내리질렀다. 내리질러진 장검은 괴물의 고간을 쪼개고 더운 피를 바닥에 흩뿌렸다.
"괜찮아?! 다친데 없어?!"
"없겠냐… 씨발, 존나 많지. 겨울님은?"
"저기 바위 뒤에 계셔. 그보다 너는?"
"모르겠다. 좀 스치고, 돌맹이 쳐맞은 거 빼면 괜찮은데."
"그걸 괜찮다고 할 수 있어?!"
짱깨의 목소리는 드물게 격양되어 있었다.
하기야, 나라도 동료 한 명이 뒈질 뻔 하면 그러겠다. 심지어 고인물이 죽어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게 된다면 더욱.
나는 뺨에 난상처를 더듬었다.
"씨발, 흉지겠네."
하지만 이 망할 놈의 다크 판타지에 와서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몸으로 돌아가는 게 더이상한 일이긴 하다. 메이의손을 붙잡고 일어나서, 바닥을 나뒹구는 장검을 집어들었다.
"어떡할거야?"
"어떡하긴."
나는 내 눈 앞을 가득 메우는, 계곡 위의 인영을 보면서 혀를 찼다.
이건 예상이랑 달라도 너무 다른데.
늘어뜨린 장검이 너무도 무거웠다. 숨이 벅찼다. 입으로 해독제의 마개를 뜯어내고, 목 안으로 물약을 때려박았다.
"살아남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