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독의 하천
낭패였다.
나는 지금껏, PVE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보스는 내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보스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독의 하천을 꼼꼼하게 한 번이라도 돌아볼걸.
설상가상으로 내 몸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아, 씹창나게 등 아프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손에 들린 장검을 바라봤다.
분명 괴물들을 써느라 피로 떡칠되었을 칼은, 투창을 막았던 부분을 중심으로 깨끗해져 있었다.
풍압이나 충격 때문에 깨끗해진 모양이었다.
하기야, 무슨 제트기 날아오는 것 같은 느낌으로 날아온 투창이었다.
맞으면 편히는 못 뒈지겠네.
"씨이발…."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팔에 힘 줬다고 손목이 멋대로 비틀어지더니 내 몸을 바닥에 떨궈버렸다.
아, 좀.
그때 겨울의 처녀가 내게 뛰어왔다.
"주현성님! 괜찮으신가요?!"
"이제야 이름을 불러주는구나…."
맨날 당신당신 하길래 내 이름 아직도 못 외웠거나 까먹은 줄 알았다.
"상처가…."
상처가 뭐.
나는 내 몸뚱이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저쪽은 눈 앞이 보이지 않으니 내가 어떤 내상을 입었던 간에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뭐, 내장의 소리를 듣고 어디가 다쳤는지 알겠다던가 그딴 거면 좀 무서운데.
"근데 안 가고 뭐하셨어요. 저기 저… 어디더라…."
"정신 차리세요… 눈 감지 마세요…!"
와, 이 사람 이런 간절한 목소리도 낼 수 있었나.
미묘하게 자극적인 목소리였다. 내 몸이 씹창나 있지 않았다면 그런목소리 내지 말아달라고 했을 거다. 너무 자극적이라고.
아니면 더 내달라고 하거나.
"가방에 물약이…."
"예, 예! 지금 드릴게요. 부디 정신차리세요."
겨울의 처녀는 눈이 안 보이는 사람치고는 빠르게 내 가방을 더듬어 물약하나를 꺼냈다. 무슨 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찾았으면 된 거지. 뒈지는 거보단 몇 천배나 낫다.
"이제 제가 마시겠…."
"제가 먹여드릴게요. 부디 일어나세요."
보스는 아직 늑장을 부리고 있거나, 메이와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메이는…."
"아, 아아… 별로 좋지 못한 거 같아요. 안 좋은 소리가 들려요."
"씨발, 죽으면… 안되는데…."
생각은 어느정도 돌아가지만, 혀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더니, 내 입에 물약병을 물려주었다. 목청을 타고 흐르는 물약의 느낌이, 씨발 존나 아프네.
"크윽, 으윽…!"
무슨 알보칠로 가글하는 거 같았다. 씨발.
"으극… 후욱…."
이거 다시는 안 산다.
상처로 인한 고통 자체는 금방 사라졌지만, 약 때문에 생긴 고통이 너무 강해서 정신을 놓을 뻔 했다.
숨을 몇 번 고르고 있자니, 시각이나 청각이 점점 정상으로 돌아왔다.
쾅!
아 씨발, 진짜 좋지 못한 소리인데.
메이가 쭉 미끄러져 우리쪽으로 밀려왔다.
"쿨럭."
내가 낸 소리가 아니었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니, 겨울의 처녀가 베일 속에서 훌쩍이는 소리를 흘렸다.
"물러나 계세요. 겨울님 돌아가시면 저 좀 많이 빡칠 거 같으니까. 메이나 좀 돌봐주세요."
다행인 게 있다면, 저 보스몹이 나오고 나서 잡졸들은 엉덩이에 불이 난 씹창새끼들처럼 도망쳤다는 거다.
그래서 1:多는 아니게 되었지만… 하, 씨발 이런 걸 어떻게 이기냐?
크 르 르 륵
중후하게 울려퍼지는 울음소리는 몸속을 저릿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꼬리뼈에서부터 목 경추까지 쭉 타고오르는 소름이, '저거랑 싸울 거 아니져?' 하고 물어오는 육체의 소리 같았다.
아, 근데 싸워야지.
겨울의 처녀가 메이를 품에 안아 뒤로 빠져서, 걱정은 좀 덜었다.
그 메이의 상태가 팔이 덜렁거리고 투구 속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게, 안 좋아보였지만.
어디, 나름 분석을 해보자.
지금껏 잡은 보스는 두 체, 늪지의 요람과 회색의 주인이었다.
늪지의 요람은 전형적인 좆밥 보스, 기믹을 알고 있으면 쉽게 격파할 수 있는, 별 거 아닌 보스였다. 그조차도 나한테는 꽤 빡셌지만.
회색의 주인은 마법도 검술도 모두 잘 하는보스였다.
게임이랑은 다르게 검을 존나 잘 다루길래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본질적인 약점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었다.
피통이 작고, 방어력이 낮다. 속성 공격에 약하다.
대부분의 보스는 그런 식으로 약간이라도 약점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 대부분은.
놈이 들어올린 양손도끼를 따라, 독의 하천의 물길이 부풀었다가 내려앉았고, 나는 장검을 횡으로 튕겨내 피를 최대한 덜어냈다.
"씨발,어떻게 이기냐."
다른 보스들은 나름의 꼼수나, 철저한 전술같은 게 있다면 이길 수 있겠지만.
이건 답이 없네.
척 보기에도 육체파, 독의 하천에서 살아왔으니 독은 안 먹힌다.
괴물의 몸은 분명 털가죽으로 덮여있을텐데 선명하게 근육질 몸이 드러나는 몸뚱이였다.
속성 공격 역시 그다지 유효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레이톰의 심판이 가진 효과는 마법의 무효화, 마법을 전혀 쓰지 않는 저런 보스몹에게는 단순히 잘 드는 강철검일 뿐이다.
내가 만약 여자고, 이게 빌어먹을 놈의 야겜이었으면 나는 그나마 신세가 나을테지만.
나는 남자고, 이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존나 잘 죽어나가는 다크 판타지 게임이다.
"좆됐―"
놈의 어깨가 움찔거렸고, 나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크게 뜨고 있었던 탓에 겨우 반응할 수 있었다.
몸을 비틀기 무섭게 내 오른다리가 딛고 있었던 지면이 부숴져 흩날렸다.
발목을 튀어버린 돌 파편들이 두들겼지만, 고개를 떨굴 틈도 없었다.
뭔 놈의 속도가 저렇게 빨라?
그보다 내가 어떻게 반응했지?
기묘한 상황 속에서도 확신했다.
눈을 한 번이라도 떼면, 눈 한 번을 잘못 깜빡이면, 그대로 뒈진다고.
보통 대부분의 게임에서는 이런 파워 타입의 보스는 존나 느리기라도 한데, 이 새끼는 저 근육이 장식이 아니라는 것처럼 존나 빠르고강력했다.
분명했다. 이 보스는 수용소를 정석적으로 깨고 나온 해방자 같은 초인이 잡으라고 만들어진 보스였다.
내 발 밑이 미끄러지는 느낌이 있어서, 나는 겨우 발을 앞으로 디디고는 몸을 숙였다.
무슨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태풍 같은 소리가들렸다.
게다가 여긴 독의 하천. 지저의 늪지만큼은 아니더라도 독으로 범벅이 된 장소였다.
독으로 침식된 땅은 부스러지기 쉬워 균형을 쉽게 잃게 만들었고, 잘못 몸을 던진다면 그대로 독에 빠져 뒈질 수도 있었다.
"하."
헛웃음을 지으려는 찰나, 내 목덜미를 향해 날아오르려는 다리를 보고는 뒤로 몸을 던졌다. 다행히 다리는 내 머리카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큭."
돌무더기에 등이 찔려 아팠지만, 사소한 고통보다 저 거구에 맞았을 때 찾아올 죽음이 훨씬 무거웠다.
나는 아직 가벼운 몸뚱이를 일으키기 무섭게 옆으로 피했다.
창을 내찌르는데 달아오른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놈이 내지른 창이 바닥에 강하게 틀어박혔다.
빈틈이었다.
나는 그레이톰의 심판을 단단히 잡고, 달려들어 내리베었다.
내리찍어진 검날은 쇳덩이에 부딪힌 것처럼 꺾이며 튕겨졌고, 내 몸도 그렇게 균형을 잃었다.
손아귀에전해지는 묵직한 감각, 근육에 부딪혀 튀어오르는 검날, 왠지 웃고있는 것만 같은 늑대의 대가리.
일반인이 벨 수 없다는 느낌만이 들었다.
"씹―"
좆됐다는 느낌도.
촉수에 부딪혔을 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어마어마한 속도감이 내 몸을 지배했다. 그건… 발차기였다. 빌어쳐먹을 발차기.
나는 멀어지는 늑대새끼를 보면서, 겨우 들어올려 공격을 막은 장검이 덜그럭 거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작 일격이었다.
일격에 내 몸이 부유하고 있었다.
"으극, 씨발…!"
드드드드드득!
바닥에 닿은 내 몸뚱이가 정신 없이 튀어오르면서 등거죽이 씹창나고 있었다.
갑옷으로 감싸져 있었을테지만, 겨우 그정도로 무마할 수 있는 충격이 아니었다.
"좆망겜…."
이제 보스 겨우 둘 잡았는데, 내려주는 게 저딴 보스라니?
저 새끼의 잡졸들 잡을 때만 하더라도 충분히 절망에 가까웠는데, 이제는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일어나야 했다. 개죽음은 내 취향이 아니다.
"씨발, 씨발…."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작 가드 한 방에 부러졌나?
무슨 말도 안되는 근력인지. 몸을 일으키려고 하지만 그때마다 균형을 잃고 만다.
못 일어나면 좆되는데, 저 씹새끼 도끼에 한 방이라도 쳐맞게 된다면 차라리 즉사하는 걸 바라게 될 것 같았다.
"콜록, 콜록! 으, 씨발."
입으로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내장을 잘못 다친 것 같은 느낌마저도 들었다.
하, 씨발 좆됐네 싶어 고개를 들어올리자, 그 몬스터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은 멈춰선 채, 나를 꼬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뭐지, 왜 날 공격하지 않지?
보스몹 중에서 중립적인 놈은 없다. 모든 보스는 적극적으로 플레이어를 죽이려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은… 이상한데.
놈은 한동안 으르렁거리더니.
나를 무시한 채로 걸어갔다.
내가 날아갔던 방향 그 너머, 창살이 드리워진 곳으로.
메이와, 겨울의 처녀가 무방비하게 있는 곳으로.
"씨발."
막아야 한다.
메이는 저항하기는 커녕 의식이나 있으면 다행일 상황이고, 겨울의 처녀는 기본적으로 근력이나 인지 능력은 높지만 전투는 논외로 쳐야한다.
눈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 싸울 수나있을까?
운 좋게 한 방은 맞출 수야 있겠지, 근데 그 뒤에는?
전력 외는 두 명, 싸울 수 있는 건 나 한 명.
그 사실이 병신처럼 뻗어있는 내 몸에 원기…를 돋우긴 개뿔, 일어나지도 못했다.
부러진 것 같은 오른팔은겨우 덜렁거렸고, 왼팔은 힘을 줄 때마다 뭔가잘못됐는지 힘이 쭉 빨려나가는 기분이었다.
영화, 게임, 만화 같은데에선 이럴 때 의지만으로 일어나던데, 개좆까는 소리였다.
"씨이발…!"
한참간이나 더 용을 쓰고 나서, 내가 내 힘으로 일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세를 감안하면 하반신은 멀쩡할 줄 알았는데, 허리가 뒈지게 아팠다.
일어설 수가 없었다. 발 끝에서부터 전기가 통하는 듯한 기분이 들더니 힘이 빠졌다.
"무슨… 덤프트럭 같은 새끼가…!"
고작 발차기로 이런 위력을 내려면 얼마나 근육돼지여야 하는 건지.
내가 끙끙대며 애쓰는 동안에도, 보스는 내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아마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완벽히 무력화했다. 저건 나중에 먹어도 된다.'
나라도 그러겠다. 왠지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화가 났다.
PVP 고인물이니, 이 세계에서 가장 잘 죽이는 새끼니, 다 개좆빠는 소리였다.
대가리 터진 병신새끼처럼 내뱉을 줄만 알지, 지키지도 못하는 내가 병신 머저리 같았다.
내가 동료랍시고 데려온 새끼들을지킬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적당히 싸울 수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편으로는 마음 속에서 개소리도들려왔다.
'이정도면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았나?'
'굳이 목숨을 걸 필요는 없지 않나?'
'혹시 모르지, 겨울의 처녀가 초인적인 근력으로 저 새끼를 쳐죽여줄지도.'
다 지랄이다.
살고 싶어서 나오는 나약한 소리였다.
그런데.
이 망할놈의 다크 판타지에서는 살고 싶어하는 놈부터 뒈진다.
살려면 존나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곧 죽을 것처럼 싸우지 않고 사리는 새끼부터 뒈진다.
나는 그 사실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항상 PVP를 할 때 새기는 마음이었다. 먼저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고작 게임에 그렇게 생각하는 건 과몰입이었지만, 나는 이유도 모른 채 항상 그렇게 생각하며 게임을 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생존 의지를 꺾었다.
배낭을 뒤졌다.
물약을 꺼냈다.
언제 샀는지, 뭐 때문에 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심지어는 내가 샀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너무 흐린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 흐린 기억 속에서 거기 주인장이 이렇게 얘기했었다.
이거 너무 많이 마시면 머리가 확 간다고. 적당히 너무 아프다 싶을 때만 조금 쓰라고.
대충 아편 같은물건이었을 거다.
"좆까."
나는 그 아편 같은 물건을 아가리에 때려박았다.
효과는 빠르게 찾아왔다. 내 팔은 부러진 게 아닌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덜덜 떨리던 허리는 잠잠해졌다.
하, 씨발. 마약중독자가 이런 기분이구만.
몽롱하게 찾아오는 졸음을 겨우 쫓아내면서 땅을 딛었다.
그 졸음 사이로, 뭔가 내가 알 수 없는 이미지나 기억 같은 게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게 또 뭐야, 씨발.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아편 같은 건 커녕 뭔가 이상한 약이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기다려라, 씹새끼야…."
결과만 좋으면 됐지.
비척비척 철창을 향해 다가가던 나는, 오른손에 들린 그레이톰의 심판을 보았다.
이 무기는 지금은 쓸모가 없었다.
더크고,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다. 저 씹창새끼를 한번에 죽일 수 있을만큼 강력한 걸로.
그리고 그 강력한 무기는 그렇게 멀리 있지 않았다.
그놈은 내 파트너였으니까, 위력은 잘 알고 있다.
나는 바위에 걸쳐진 채 완고하게 빛을 튕겨내는 폭군의 검을 보았다.
겨울의 처녀가 도망갈 때 두고 간 모양이었다.
그 폭군의 검이, 나를 쥐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