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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화 〉독의 하천 (22/274)



〈 22화 〉독의 하천

폭군의 검은 평범한 검이 아니다.
이 게임의 최강 보스이자 최종보스라고 할  있을 겨울의 폭군이 사용하는 무기이자,  크기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무기의 몇 배는 되는 거병.
인간에게 휘두르는 것은 커녕 들어올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거인의 무기.
나는 그 무기를 들어올렸다.

"…하."


팔에 어떤 감각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내 팔이 아닌 것처럼, 드문드문 느껴지는 모호한 촉감으로만 내 팔이 아직 내게 붙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시각에 의존하려고 해도 눈 앞이 너무도 흐렸다.
약빨 죽이네.
비웃음을 머금으며 들어올린 폭군의 검을 따라 바닥에 낮게 깔린 먼지가 피어올랐다.

이건 명백히 이상현상이었다.
보통 어떤 약이라고 하더라도, 거인이나 쓸 수 있을 거병을 들어올릴 만큼의 근력과 활력을 불어넣지는 않는다.
이건 내 힘이 아니었다. 드문드문 드러난 팔에서 검은 혈관 같은 것이 내달렸다.
하지만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악마랑도 손을 잡고 싶은 게 지금이었다.

내겐 힘이 필요했고,  약은 내게 힘을 줬다. 그정도 사실이면 충분했다.
나는 묵직하게 어깨 위에 얹어진 폭군의 검을 어깨를 들썩여 바로잡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내딛을 때마다 다리를 내달리던 짜릿한 통증은 빠르게 멎어갔고, 나는 사라진 통증을 대신하는 몽롱함과 나른함이 약의 작용인지 아니면 뒈져가면서 느끼는 탈력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괴물이 지나간 자리는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어차피 방향은 하나로 귀결되는데, 그 귀결된 방향 역시 뚜렷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큼직한 발자국 위에  발자국을 겹치게 찍고는 한층 더 부숴져 훤히 드러난 하수구를 지나쳤다.

꺄아아아악!

비명이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메이의 목소리인  분명했다.
나는 금세 숨이 가빠지면서도다리를 움직였다. 점차 내 몸이  몸이아닌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약빨이  몸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제서야 나는 그 괴물을 마주쳤다. 괴물은 내 발소리를 듣고는 등을 돌려 나를 마주봤다. 녀석의 눈동자에 담긴 미묘한 경멸이 느껴졌다.
씨발놈. 내가 씹어뱉은 욕에 괴물이 그르렁 거렸다.
큼직한 도끼에는 피  방울 묻어있지 않았지만, 괴물의 등 뒤로 보이는 이들의 상태로 보건데 아예 멀쩡하진 않은 것 같았다.


"당신…!"

겨울의 처녀가 나를 부르기에, 나는 그녀에게 손을  번 흔들어주고는 검을 단단히 쥐었다. 이길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싸워보기 전까지는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었다.
대신 폭군의 검을 비스듬히 들어 쥐었다. 틀어쥔 손아귀가 덜덜 떨려왔다.


"2차전, 해보자고. 개새끼야."


내가 웃으니, 괴물은 도끼를 조용히 들어올렸다.

*

주현성은 검을 움켜쥐었고, 독의 하천을 지배하는 보스이자 돌연변이인 괴물은 제 도끼를 움켜쥐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도 이유 하나였지만, 가장  이유는 저 무기였다.
큼직한,  자신의 단단한 가죽이라고 할지라도 간단히 찢어발길 수 있는 거대한 대검.


맞서기엔 너무 위험 부담이 컸다. 괴물은 그래서 철저하게 깎아낼 속셈으로 도끼를 비스듬하게 들었고,  큼직한 체구의 근육에서는 근육이 마찰하는 소리가 울렸다.
 편 주현성은 그에 반응하지 못했다. 싸움을 해오긴 했지만 그는 근본적으로는 일반인이며, 목숨을 건 사투를 해본 경험이 그리 길지만은 않다는 것도 이유였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그의 눈 앞에서 비춰지고 있는 어떤 풍경 때문이었다.
검을 단단히 움켜쥐고, 싸울 생각을 하는 순간 그의아득한 의식 저편에서 뭔지   없을 장면이 떠올라 그의 눈 앞을 어른거렸다.
신기루처럼 일렁이고, 꿈처럼 그에게 뒤얽혀오는 기억은 분명히 그의 기억이 아님에도 언뜻 익숙한 느낌을 풍겼다.


생명은 커녕 시간마저 얼어붙을 것만 같은 넓은 설원 속,  전사가 묵직한 갑옷을 두른 채 주현성의 손에 쥐어져있는 검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었다.
거검을 휘둘러 괴물을 베어내고, 달려드는 짐승을 주먹으로 내리찍어 죽였다. 주먹과 칼이 여의치 않을 때는 몸으로 부딪히거나, 어깨로 부딪히거나, 발로 걷어차 시간을 벌었다.
마치 폭군의 검은 이렇게 쓰는 거라는 듯, 장면 속 전사는 그렇게 거칠게 싸웠다.


그래서 주현성은 무의식적으로 그 동작을 모방했다. 다리는 큼직하게 벌리고, 칼은 비스듬히 들었다. 내려간 팔을 따라 손아귀에서 높이 꺾여진 검날에는, 흉흉한 기세가 깃들었다.

그 괴물이 이상한 점을 눈치채기도 전에, 주현성은 칼을 휘둘렀다.

쾅!

 궤적에 겹쳐진 양날 도끼에는 심상치 않은 거력이 담겼고, 괴물에게는 이정도면 충분하다 싶은 힘이었다.
방금 겨뤘었던, 칼을 휘두를 때마다 팔에서 폭발적으로 피를 뿜어대는 어떤 인간을 잠재우기엔 충분한 힘.
하지만 괴물은 그 판단을 빠르게 수정해야했다. 검로에 겹쳐진 도끼는 반월을 그리며 튕겨났고, 괴물은인상을 확 찌푸리면서 이를 드러냈다. 그 불편한 감정은 즉각적으로 표출되었다.


후욱!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리더니, 파고든 주현성의 머리 옆으로 다리가 스쳐지나갔다. 단단하게 땅을 딛고 서고 있던 디딤발이라 그런지 그 위력은 심상치 않았고, 눈앞에 더 이상 환상이 보이지 않는 주현성은  공격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리했다.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것만 같은 감각과 함께, 그는 입에서 피를 주륵 떨어트리며 파고들었다.


다리가 지나간 자리에서 파공성이 울리고, 파고든 주현성은 대검을 휘둘렀다.

다시   겹치는 궤적. 도끼와 검날이 부딪히고, 쇠끼리 부딪히는 게 아닌 거대한 생명체가 똬리를 트는 것만 같은 기괴한 소음이 터져나왔다. 괴물은 손아귀가 찢어져 으르렁 거렸고, 주현성은 손아귀에서 더운 피를 떨어트리면서도 웃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움직였다. 부딪힌 대검을 거두는가 싶더니, 세차게 뻗어나온 주먹이 괴물의 콧잔등을 후려갈겼다.


"그르륵!"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괴물은 제 코가 찌그러지는 듯한 통증으로 비척거렸고, 주현성은  빈틈을 놓아주지 않았다. 희미한 이성으로 그는 움직였고, 그래서 파고드는 동안 그에게 날아오는 다리를 미처보지 못했다.

꽈릉, 하는 소리와 함께 주현성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인영은 너무도 쉽게 지면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주현성은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로 유효타조차 아닌지 그의 입가에 감돌던 미소가 짙어졌다.
다리에 얻어맞아 너덜거리는 팔에는 검은 혈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검은 혈관에서 힘이, 전능함이 내달렸다.
그래서 주현성은 제 폭군의 검을 떨어트린 자리로 뛰어들었다.

검조차 없는 인간의 돌진에 일순이지만 괴물은 공포를 띄었고, 그 공포에 치욕을 느꼈는지  격하게 반응했다. 주현성이 달려오는 자리를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콰앙!


하지만 주현성은 맞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숙이며 파고들어, 괴물의 다리를 붙들었다. 단단히 땅을 디딘 짐승의 다리를.
 털로 뒤덮인 다리가 떨쳐내려 힘을주는 순간, 주현성의 입에서 피가 울컥 솟았다.
그리고 괴물은 세상이 뒤집힌다고 착각했다. 자기보다 한참은 작은,  죽어가는 인간이 자신을 쓰러트렸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므로.
도끼가 바닥을 나뒹굴고, 무기를 잃어버린 괴물은 떨쳐내려 팔을 휘둘렀다.


쩌엉!

그보다는 주현성이 빨랐기에 문제였지.
괴물은 제 아가리를 내리찍은 주먹을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가, 다시 주먹 한 대를 맞고서는 팔을 모았다. 그렇게 모은 팔로 얼굴을 가리면서 그르렁 거렸다.


쩌엉! 쩌억! 콰앙! 쾅!


올라탄 채로 그대로 내지르는 주먹에 속수무책으로 괴물은 쥐어터졌고, 금세 그륵거리면서 숨을 골랐다.   한 방이 인간의 위력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은 힘은 착실하게 주현성의 육체에 무리를 주고 있었다.


"그르르르아아아아!!"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한 괴물이 허리를 크게 틀며 팔을 휘둘렀고, 그에 주현성이 날아갔다.
아무리 근력이 올랐다고 한들 체급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날아간 주현성은 바닥에 흉하게 떨어져 나뒹굴었으나, 그 기세만큼은 죽지 않고 그대로였다. 오히려 그는 흉할 정도로 입가를 틀어 웃었다.

눈 앞에 폭군의 검이 있었다.
그는 칼자루를 움켜쥐었고, 일어나면서 피를 뱉어냈다.
뱉어진 피에는 검은 기운이 맴돌았다.
맞서는 괴물조차 알 수 있을 정도로, 이상했다.

하지만 주현성은 물러서지 않았다. 주춤하지도 않았다. 다만 다리를 강하게 딛고 달려들었다.

괴물이 바닥에서 재빠르게 도끼를 낚아채고 다시 맞섰다.
양날로 된 도끼가 근육에서 뿜어지는 강한 힘으로 가속했고,  거력에 바람마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무기끼리 부딪히자 허공이 거세게 떨려왔다.
괴물은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찍어누르려고 애썼다.
그에 맞서는 주현성은 칼을 단단히 쥔 채로 눈 앞에 떠오르는 허상을 보고는 왼다리를 뒤로 빼냈다.

그러자 검날이 돌아갔다. 돌아간 검날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고, 이성을 잃고 도끼자루를 찍어누르는 걸 반복하던 괴물은 눈치채지도 못했다. 마침내 검날이 완전히 아래를향하고, 맞서는 힘이 사라진도끼는 그대로 가속했다. 지면까지.
도끼가 바닥을 내리찍었고, 오랫동안 쌓인 독성의 흙이 마구 튀었다. 그리하야 괴물의 상체가 비었다.
그제서야 괴물은 아차하고 도끼를 들어올리려고 했으나, 주현성이 한 발 더 빨랐다.

"뒈져!!!"

주현성은 비스듬히 내렸던 그대로 칼자루를 머리 위로 치켜들어 세웠다. 용의 머리처럼 거칠게 상승한 대검은, 그대로 떨어져내렸다.

콰지지지지지직!!!


살점을 찢어내는  아닌, 나뭇결을 억지로 잡아 뜯는 것 같은 소음이 한 차례 울리고 괴물은  가슴팍을 헤집으며 쳐박힌 대검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에는 이제 선연한 공포가 감돌고 있었다.
쳐박힌 순간 도끼는 놓쳐버렸다.

그    오 오  오!!!

그래서 주현성과 괴물이 힘겨루기를 했다. 괴물은 대검을 억지로 빼내려 벌어진 대흉근을 꿈틀거리며 대검을 붙잡아 밀어냈고, 주현성은 입과 팔에서 피를 폭포처럼 흘리면서 검을 밀어넣었다.
 충돌에서 으직, 으직 하는 근육이 부숴지는 소음은 연쇄적으로 양측에서 울려댔다.
괴물은 헐떡이면서도, 제게 피를 후두둑 떨어트리면서도 광기 어린 눈동자로 검을 찍어누르는 인간이 두려웠다.
괴물은 고통 속에서도 손톱을 바짝 세웠다.
수치스러워 쓰지 않겠노라고 신에게 맹세했던 손톱이었다.
그는 그 손톱을 세워 인간을 긁고, 난동을 부렸다.

"크으윽…!"

주현성의 상황도 마냥 좋지 못했다. 서서히 팔에 탈력감과 고통이 돌아오고 있었다. 약의 양이 부족했던지, 아니면 원래 유지시간이 길지 않던지. 어느 쪽이든 간에 지금 승기를 잡지 못하면 죽는 건 그였다.
주현성은 억지로 검날을 세우고,  몸으로 찍어누르듯 했다. 바닥에 눕혀진 괴물은 바둥거리면서 손톱을 휘둘러댔고, 휘두른 손톱이 주현성의얼굴, 턱, 가슴팍, 팔을 할퀴어댔다. 할퀴어진 자리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검은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그르르라아아악!"

의사소통은 통하지 않는 괴물이었지만, 주현성과 하는 말은 같았다.
아무 뜻도 없는 포효.
고통에 잠긴 목소리로 괴물이 울부짖었고, 육중한 검날이 대흉근을 가르고 갈비뼈를 무너뜨렸다.
괴물은 점차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팔을 허우적거렸다.
주현성 역시 그러했다. 그는 이제는 숨 두 번 쉴만큼의 기력도 없음을 깨닫고는  체중으로 검날을 찍었다. 설령 죽더라도, 의식을 잃더라도 괴물을 죽일  있도록.

"죽어…!"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밀려오는 고통과 함께 이성이 머리로 자리하고 있었다. 주현성은 아득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심장이 검날 끝에 닿아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칼자루를 뒤틀었다. 그 짧은 움직임에 검날 끝에 걸려있던 심장에 박살났다.
괴물의 갈라진 가슴팍에서 피가 울컥 솟더니 화산처럼 뿜어져 나왔고, 주현성은 그걸 보면서 비척비척 물러섰다.

"그륵… 그르르… 그륽…."

괴물의 눈동자가 점점 옅어지더니 고개를 떨궜고, 주현성은 그걸 보면서 씩 웃었다.


"우웁… 우우욱…."

이윽고 주현성의 눈, 코, 입을 타고 피가 흘렀다. 바닥에 고이는 양이 심상치 않았다.
피를 너무 쏟아서 그런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주현성은 세상이 돌고 있는 것 같다고 착각했다.
그 밀려오는 어지럼증에 저항하기도 전에, 주현성은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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