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세상 끝의 수용소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예, 덕분에요."
"그렇다니 다행이예요. 당신께서 처음 쓰러지셨을 때 몸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어요. 내장은 몇 개 정도가 심하게 손상됐고, 양팔은 곧 잘려나갈 것처럼…."
"그런 거 보통 면전에서 말 안 하지 않습니까?"
"좀 더 경각심을 가져주셨으면 해서요. 혹시 주제 넘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냥… 에휴, 제가 병신이죠."
나와 겨울의 처녀는 메이에게 모포를 두 개 둘러주고서, 수용소 내부를 탐사하고 있었다.
적어도 수용소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2회차라 하더라도 초반이라 상대할만하게 나오는 걸 감안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돌로 조각된 계단을 겨울의 처녀가 먼저 오르다가, 갑자기 그녀의 몸이 기우뚱했다.
"앗."
"조심하셔야죠."
나는 몸이 기우는 겨울의 처녀를 붙잡아 품에 안았고, 겨울의 처녀는 붙잡힌 채로 웃었다.
"고맙습니다, 당신."
뭔가 태도가 너무 여유로운데.
"…일부러 그런 거죠?"
애초에 얘 근력이면 넘어지려고 하더라도 발 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 같고.
그리고 내 예상은 맞았는지, 겨울의 처녀는 베일 속에서 숨죽인 웃음소리를 냈다.
"티났나요?"
요망하긴.
내가 피식 웃으면서 놓자, 그녀는 내 손을 꼭 잡고 나를 이끌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밤바람에 흔들려 내 코 끝을 간질였다. 그 머리칼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수용소는 그녀가 사전에 얘기했던대로, 무척이나 조용하고 아무런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남아있는 생물은 커녕, 멀쩡한 시설조차 없어보였다.
우리는 그런 수용소를 데이트라도 하는 것처럼 여유롭게 걸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그녀가 내게 보내오는 호의가 애정인지 확실치도 않지만, 나는 지금 상황이 무척이나 데이트 같아서 미묘하게 들뜨는 것 같았다.
괜히 그녀와 눈이 마주친 게 머쓱해서,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깨끗했다.
"조용하네요."
"제가 혼자서 둘러봤을 때에도 살아있는 건 없었답니다."
"그건 다행이지만… 혼자서라니. 메이는요?"
"메이씨는 당신의 간호를 해야 하셨으니까요. 두 명 다 거기에 있다가 당신에게 문제라도 생긴다면 저는…."
그녀가 말을 이으려고 하지 않길래, 나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녀는 내가 손을 잡자 언제 침울했냐는 듯 내 손을 마주 잡고는 웃었다.
그 고아한 웃음에 나는 그녀가 일부러 침울한 기색을 내보였음을 알았지만,뭐라고 하진 않았다.
예쁘면 그럴 수도 있지.
"뭐,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의 우선순위는 무척이나 나에게 쏠려있는 듯 했다.
메이와도 사이가괜찮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가 1순위라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내가 더 위인듯 했고.
그런 건 나쁘지 않긴 한데… 어색했다.
누가 이렇게 순수하게 호의를 줄 수 있겠냐고.
근데, 나는반드시 그걸 물어봐야 했다.
나는 슬슬눈에 보이는 계단을 보면서 문득 입을 열었다.
"…겨울님은 여기서 오셨죠?"
세상 끝의 수용소. 게임의시작점이자, 겨울의 처녀가 감금되어 있던 장소.
간호해준 정성을 생각하면 좀 미안했지만, 여기에 온 이상 물어봐야 했다.
겨울의 처녀는 한동안 조용히 내 손을 잡은 채로 고개를 떨궜고, 나는 겨울의 처녀를 지그시 보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결국 내 재촉 아닌 재촉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당신을 속일 수는 없네요."
겨울의 처녀는 여상스러운 태도로 대답했고, 나는 다음에 나올 말을 가늠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물론 겨울의 처녀가 이대로 악력으로 내 손을 부숴버릴 수도 있지만.
다행히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저는 여기서 나고 자랐습니다.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저는 알지 못했고, 저는 눈이 보이지 않아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죠. 저는 간수분들을 보조하고, 도움을 드리며 살았고, 그분들이 사라진 후에는 제 감방에서 머물렀습니다."
음, 이러면 얼추 맞긴 하다.
실제로도 세상 끝의 수용소는 갑자기 모든 죄수와 모든 간수가 미쳐서 망해버렸다는 설정이었고, 그렇게 게임은 시작하니까.
근데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빠져나왔느냐는 것.
"계속 말씀해주세요. 어떻게 빠져나오셨습니까?"
베일 속에서 얕은 호흡만 들려왔다.
나는 그 호흡을 들으면서 계단에 걸터앉았고, 그녀는 내가 이끄는 손길에 다리를 조용히 모으고는 앉았다.
내가 눈을 돌리니 그녀는 베일속으로 감은 눈을 움찔움찔 하면서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저도 잘…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서 소리가 난 쪽으로 가보니 제 감방문이 열려있었습니다. 다른 분들의 소리나 호흡도 들리지 않아서… 그저 계속 걸었습니다."
흠, 그 뒤에 그냥 걸어서 수용소를 빠져나오고, 독의 하천을 건너서 지저의 늪지에서 뻗어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건가.
마냥 그럴듯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 외에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렇군요…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됐습니다."
"아뇨… 당신께 들려드리기엔 별 볼 일 없는 얘기지만,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평소의 자상한 태도에 나는 의심이고 자시고 별로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의심을 하기엔, 이 게임에서 유일하게 영원히 아군이라고 할 수 있을사람은 그녀였으니까.
나는 그녀의 뺨을 몇 번 쓰다듬고는 일어났고, 그녀는 나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더 걸었다.
꽤 오래 걸은 끝에 마침내 우리의 앞에, 탐사의 끝을 알리는 것처럼 목적지가 나타났다.
보스룸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이었다.
게임에서는 한 번 보스룸에 들어가면 뒈지거나 보스를 죽이기 전까지는 나올 수 없었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내가 지저의늪지로 독의 하천 보스를 따라가는 진풍경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스르릉
"주현성님? 앞에 뭔가 있나요?"
내가 칼을 뽑자 그녀가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음, 앞에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집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새로 얻은 힘도 있으니, 보고 안되겠다 싶으면 바로 빠지겠습니다."
거인의 힘을 테스트 할 겸, 보스를 확인하고 바로 빼서 수용소의 상황을 확인할 겸, 나는 거대한 대문의 앞에 섰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권능을 어떻게 쓰는지 알 수 없었다.
게임에서는 특수 기능 버튼이었던 R을 누르니 됐었는데, 여기서는 어떻게 쓰지?
한참간이나 고민하고 있자니, 바로 뒤에 있던 겨울의 처녀가 내 손을 꼭 쥐었다가 놓았다.
아, 그래. 어차피 들어갔다 나올 거니까.
상관 없겠거니 싶어, 문짝을 밀었다.
끼이익
육중한 나무 문이열리는 소리가 빈 공동에 울려퍼졌다.
수용소의 보스는 독특한 놈이다. 원래는 간수장이자 거인인 남자로, 원래는 인간의 형상을 띄고 있었으나 세상이 멸망해가면서 뒤틀려 괴물이 되었다.
결국 끝에 와서 그는 기이하게 뒤틀린 나무와 같은 형태가 되어 플레이어를 가로막게 된다.
…원래는 그랬다는 얘기다.
나는 내 눈 앞에 처참하게 죽어있는 시체를 보고는 멈춰서고 말았다.
"이게 뭔…."
심지어 죽어있는 꼴은 심각했다.
나무처럼 기이하게 늘어난 사지는 찢어낸 김치처럼 널부러져 있었고, 마찬가지로 거대한 몸뚱이는 이리저리 갈라져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피와 내장, 그리고 이리저리 섞인 오물 따위가 그 끔찍한 참상을 적나라하게 장식했다.
"어떻게…?"
영락한 거인목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보스는 뉴비 거름망이자 수문장으로 유명하다.
간단하고 직관적이지만 강력한 보스의 패턴과 공격 방식은 뉴비들에게 고통인 동시에 스승이 되어주기도 했다.
직관적이기에 읽기 쉽고, 읽기 쉬운만큼 빠르게 실력을 올릴 수 있다.
데미지는 강력하지만 그만큼 느리고, 나무로 변해있어 거의 이동을 하지 않고 공격한다.
뉴비들은 정직한 패턴을 보면서 게임에 대한 감을 기를 수 있는 거다.
물론 이 세계로 들어와버린 나에게는 좆같이 크고 좆같이 아프면서 좆같게도 단단한 씹새끼일 예정이었지만….
이걸 이렇게 쉽게 죽여버린 새끼가 있다고?
심지어 튀어있는 혈액은 모두 이 괴물의 것이었다.
어떤 존재가 이 지랄을 쳐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절대 평범한 존재는 아니었다. 아주 강력하고, 아주 빠르면서… 아주 철저하기까지 하다.
난 목에서 뽑혀나오고 반으로 갈라진 거인의 머리를 보며 침을 삼켰다.
시체의 부패 상태를 보건데 시간은 꽤 지난 거 같지만 여전히 끔찍한 건 매한가지였다.
오히려 부패했기에 끔찍하다고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뒤로 돌아 보스룸 밖으로 나왔다.
보스가 이 꼬라지라면, 감방 역시 확인해봐야 했다.
이 게임의 주인공이자 초인, 겨울의 해방자를 가두고 있는 감옥을.
*
"여기인가요?"
"네, 당신께 맹세컨대 거짓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감방에서 살았습니다."
길게 이어진 복도, 그 복도 곳곳에는 램프가 매달려 있었다.
옛적에 연료가 다했는지 깜빡이지도 못하는 램프들은, 그 기이하고도 황량한 풍경에 가미되어 소름을 돋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씨발, 게임으로 볼 땐 그냥 그랬는데.
나는 침을 삼키고, 차가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감방 문이 뜯어져있네요."
"예, 저도 알아채고 의아했답니다."
감방문은 통짜 강철, 아무리 이 세계관 속 사람이 초인이고, 괴물은존나 개정신나간 새끼 밖에 없더라도, 강철의 단단함이 퇴색되는 건 아니었다.
강철은 여전히 존나 튼튼했다.
그런데 그 강철이, 마치 종잇장처럼 찢어져 있었다.
누구던 간에,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존재라면 정말 존나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겠지.
그리고 그런 거랑 지금 싸우는 건 무리수였다.
"그럼… 옆방에 뭐가 있는지는 아시나요?"
"옆방 말씀이신가요?"
그녀는 빈 왼손을 제 뺨에 얹더니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는 소리도 노래를 부르는 거 같았다.
"모르겠어요. 혹시 아는 사람이 여기로 오셨나요?"
나는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다른 손으로 장검을 뽑아들었다.
혹시 모른다. 이 방 안에 해방자가 여전히 있을지.
나는 기대와 걱정을 반반씩 품고, 해방자가 있을 감방을 들여다보았다.
"…씨발."
있기야 있었다.
기대하지 않은 형태로.
그…라고 해야할까. 겨울의 해방자는 처참히 죽어있었다.
몸뚱이는 벽에 기댄 채로 축 늘어져있고, 머리는 감방 천장에 쳐박혀 있었다.
아주 강한 힘을 가진 괴물이 어퍼컷이라도꽂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괜찮으신가요?"
그런 내게 가까이 붙은 겨울의 처녀는, 내 가슴을 더듬었다.
"심호흡을 해주세요. 무엇을 봤든, 제가 옆에 있어요."
나는 겨우 숨을 고르고서 해방자가 들어있는 감방의 문을 열었다.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건지."
해방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분명히 초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구력은 아무리 지쳤다고 하더라도 5초 정도 심호흡하면 회복할 수 있고, 몸뚱이는 더럽게 튼튼해서 내가 한 방이라도 맞았으면 위험했을 공격들은 해방자에겐 좆도 아니었다.
근력은 또 거인과 비슷했다. 거인이나 쓴다는 폭군의 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했으니.
그런 초인으로 플레이한다고 해도 빡센 하드코어 게임이라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항도 하지 못했다는 건이상했다.
시체에서는 저항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상황은 아니었다.
많은 게 확실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끝내버렸다는 것.
장님 한 명과 일반인한 명으로는 불안해서, 나는 메이를 데리러 해방자의 시체를 뒤로 한 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