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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화 〉세상 끝의 수용소 (25/274)



〈 25화 〉세상 끝의 수용소

화르륵



나는 칼을 타고 흐르는 불길이 떨어지지 않게끔, 칼날을 위로 향해 들어올렸다.
불길이 핥듯이 비추는 풍경 속에서는 죽어서 쓰러져있는 간수가 널려있었다.
물론 간수라고 확정지을  있는 건 아니다. 그냥 갑주를 입고 있어서 간수겠거니 했을 뿐이지.

"우웩."



불을 비추는 방향에 쓰러진 간수의 시체는  처참했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나누어진, 소위 반갈죽이라고 할 수 있는 상태였다.

"심상치 않은데?"
"너 그거 벌써 네번째 말하고 있어."
"그럴 수 있지."
"그건 세번째."

근데 진짜 심상치 않았다.
단단한 판금 갑옷을 반으로 갈라버릴 수 있는 신체 능력이라니.지금의 내가 걸리면 진짜 반갈죽이다.


"돌아가신지는 오래된 것 같아요. 괜찮을 거예요."

겨울의 처녀는 그런  걱정을 덜어주려는지, 시체 앞에 쪼그려 앉아 시체의 피부를 조용히 문질렀다.
나는 그녀가 뱉은 말에 겨우 안심하…진 못했다.


괴물새끼들이 인간을 죽이는데 이유가 많진 않지만, 보통은 인간을 먹으려고 죽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걸 감안하면,이 괴물은 거의 쾌락 살인마거나 모종의목적이 있었다는 건데.

"…시체에 알 같은 건 없습니까?"


후반 지역에서 나오긴 하지만  2회차 같지 않은 2회차의 특성상 그런 새끼가 수용소에 둥지를 틀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으음… 없는 거 같아요."

그녀의 감각은 신뢰할 수 있다. 두꺼운 금속문 너머의 소리도 듣는 사람이니 틀리진 않을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조심 또 조심하면서 갑시다."
"왜 그렇게 쫄아있는 거야?"
"여기 보스가 잘 찢겨있었거든. 무슨 생선바르듯이 해놨어."
"…그럼 어쩔 수 없지."


메이는 나의 말에 간단히 수긍했다.
게임이 빡세서 핵을 깔았던 짱깨 핵쟁이임을 감안하면, 여기 보스의 강력함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이템 파밍조차 과감하게 하지못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메이를 깨워가지고 데리고 오기도 했으나,  '해방자 살해범'은 평범한 괴물이 아니었다.
족히 후반 지역 보스에 맞먹는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문득 우리 전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는지, 메이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근데 주인공인 건 확실해? 아닐 수도 있잖아. 감방만 같다던가."
"글쎄… 아니라면  위험하지. 주인공이  죽이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꿀꺽, 하고 침을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라도 그럴 거다. 주인공이 적대적이라니, 상상만 해도 좆같다.
세상이 적대하는 거랑 다를 게 뭐냐.



다행히도 뭔가 나타나진 않았다.
좁은 통로를 지남에 따라 점점 시체는 적어졌고, 벽면에 걸려있는 횃불은 단순히 타서 꺼져있는 것으로 보였다.
인기척은 커녕 쥐새끼 하나 없었다.

"진짜 여기 맞아?"
"어, 맞아."




여긴 수용소의 지하였다.
보스를 쓰러트리고 바로 뒤, 길게 이어지는 통로에서 원형 계단을 타고 내려오다보면 보이는 이곳은, 수용소 방문의 이유라고도 할 수 있을 지역이었다.



"그치만 아무것도…."

불안한 표정으로 방패를 높이 들어올린  주변을 경계하던 메이는 눈 앞에 들어오는 쇠창살 문에 말을 멈췄다.




"진짜네."

문 너머로 보이는 장비들, 딱 봐도 나 무기고요 하는 장소였다.
문이 잠겨있지 않으면 좋을텐데.
원래는 보스를 잡으면 열쇠를 줘서, 보상방에서 기초적인 장비를 챙겨서 나갈  있는데 여기서는 어떨지 알 수 없었다.
정 뭐하다면 겨울의 처녀에게 문을 뽑아달라고 해야겠지.



"메이, 뒤  봐줘."
"응."



메이가 허리춤에서 적조를 뽑아들자 화염석 칼집에 마찰한 검날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메이의 전투 능력도  괜찮아지는 참이었으니, 나는 그녀에게 뒤를 맡기고 문으로 다가갔다.
겨울의 처녀가  뒤를 따랐다.
자, 어디 확인해볼까.


끼익



"열려있네."

잠겨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열려있었다.
누가 열어놓은 거 같진 않았다.

"죽어있네요."
"그러게요."




무기고의 한 가운데에 배를 바닥에 깔은 채로 죽어있는 간수.
꽤 부패해있는 걸 보자면 침입자를 상대하기 위해 무기고로 향하다가 상처가 악화되어 죽은 걸로 보였다.


"흐음… 거의 멀쩡한 거 같은데."




시체에는 상처가 거의 없었다.
오직 일격. 단 일격으로 치명상을 입어 죽었다는 얘기였다.



"누가이랬는지는 몰라도 만나고 싶진 않구만."
"그런가요?"
"아,  보이시니 모르겠구나. 배가 한 방에 꿰뚫린 거 같아요."



판금 갑주를 그대로 뚫어버릴  있는 공격 능력에 영락한 거인목을 갈가리찢을 수 있는 악력까지.
대충 이족 보행 괴물 같은 거라고 생각하자니 진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거인의 힘을 마스터하고 사용법을 확실히 안다면 모를까.



"어쨌든, 물건이나 챙깁시다. 겨울님도 보시다가 좀 괜찮아보이면 가져와주세요."
"알겠습니다. 당신께 어울리는 훌륭한 물건을 가지고 올게요."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다지는 모습이 존나게 귀여웠다.


나와 겨울의 처녀는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면서 무기고를 돌아다녔다.
게임에서랑 구조는 똑같았지만 크기가 1:1로 대칭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서,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분명 여기에 있었을텐데, 할 쯔음에  물건을 찾았다.



금속으로 이뤄진, 일견 조금 화려할 뿐인 원형 방패.
전에 쓰던 사자 방패만큼 작진 않지만, 그렇다고지금 메이가 들고 있는 것만큼 크지도 않은 방패였다.
내가 메이 같은 좆도 모르는 뉴비였으면 걸렀겠지만, 나는 이 방패를 잘 알고 있다.
PVP에서는 대 마법사 전투의 최강으로 손 꼽히는 방패였고, 간지로 쳐도 만만찮은 놈이었으니까.




"뭔가 찾으셨나요?"




겨울의 처녀는 품에 처음 보는 물건 두 개를들고 있었다.

"예, 정확히 찾던 물건이었습니다. 메이한테 쥐어줄 물건이예요."
"방패군요?"




 사실 앞이 보이나?
나는 방패를 뻘쭘하게 들었다.

"예,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메이씨에게 주신다기에 짐작했습니다. 정답인가요?"
"예… 대단하시네요."
"상은 없나요?"


난데 없이 상을 요구하는 모습에, 나는 고민하다 말을 돌렸다.



"그보다 들고 계신 물건은 뭡니까?"
"아, 괜찮아보이는 장비가 있어 들고 왔습니다. 당신께서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날 챙기는 건 겨울의 처녀 밖에 없다니까.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건, 좀 멋있게 생긴 투구랑 뭔가 가슴에 두르는 끈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투구는 얼추 아이템인 거 같은데, 저건 뭐지?


"투구는 잘 알겠습니다만… 그건뭡니까?"
"이건… 뭔가 검을 메는데 사용하는 벨트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제가 직접 둘러보니 등에  검의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건… 처음 듣는 아이템인데?
얼추 보기에도 그녀에게 맞지 않을 거 같은 사이즈인데, 직접 둘러봤다면 사이즈가 자동 조정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 게임에서 사이즈 자동 조정을 갖춘 물건은 죄다 아이템이었다.
근데, 칼라미티 사가에는 방어구와무기, 방패 밖에 착용을 못할텐데.

"신기한 물건이군요…."



물론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겨울의 처녀에게 짐을 지우기 보다는, 내가 유사시에 등을 보호해줄  있는 물건을 메고 다니는 게 맞을테니까.
나는 그녀에게 두 물건을 받아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군의 검을 등에 짊어질 수 있었다.

"진짜 가볍네요."
"도움이 되었습니까?"
"예, 정말 도움이 되었습니다."

베일 너머로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겨울의 처녀는 그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상 달라는 건가.


나는 손을 뻗어겨울의 처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숨죽여 기뻐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마냥 그건 아닌 거 같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밖으로 이끌었고, 방패를 벽에 기대놓고 바닥에 앉아 검을 계단을 향해 겨누고 있던 메이를 보았다.

"요."
"뭐 나왔어?"



하품을 하는 소리가 투구 속에서 울려퍼졌다.
좀 불량한 태도긴 한데, 정공인 내가 누군가한테 경계 태도에 대해서 뭐라고 하긴 좀 그랬다.

"너 줄 방패랑 내 투구,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좋은 물건."

검집이라기엔 검집이 아니었고, 끈이라고 하면 설명이 너무 불충분해서 걍 포기했다.



"방패? 진짜?"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던지, 메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품에 방패를 안겨주었다.


"이 고인물님께 감사해라. 그게 이래뵈도 킹갓템  하나다."

하지만 외향만으로는 별로 와닿는게 없었는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왼팔에 방패를 둘렀다.
손잡이로만 사용해야 하는 형태가 아닌, 끈으로 메고 손잡이를 보조적으로 사용하는 방패처럼 보였다.




"으응… 잘 모르겠어. 좋은 건가?"

물론 겉모습만으로 보자면 그냥 그저그런 방패였다.
하지만 메이가 지금 두르고 있는 방패, '리넬의 투지'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이 방패에는 특수한 기믹이 있는데 그건 바로―



쾅! 콰드득


…방패 키를 두 번 연타하면 숨겨져있던 방패를 펼쳐 어지간한 사람  명은 가릴수 있을 크기로 커지고.




우우웅




결계를 펼쳐 투사체를 튕겨내는 기능을… 갖고 있는데….

철컥, 철커덕


"…우와."


설명하기도 전에 좆될 뻔 했다.
나는 방패가 펼쳐지면서 절단상이 남아버린 통로를 눈으로 흘깃 보고는 메이에게 눈을 돌렸다.



"멋있어."
"…그치."

하마터면  팔이 날아갈 뻔 했지만, 메이는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메이는 내게 오도도 달려와서.







갑옷 차림인 채로 내게 안겼다. 투구를 내 복부에비벼대고, 흉부를 꾹 눌러댔다.

"고마워! 잘 쓸게!"

갑옷 입히지 말걸.
나는 애석함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는 직후 수용소를 빠져나왔다. 독의 하천에 적이 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괴물은 커녕 시체  구 없었다.
아마 내가 보스를 잡는 걸  놈들이 보고, '아, 이 새끼들 건드리면  많이 좆될듯?'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와 메이, 겨울의 처녀는  문제 없이 독의 하천을 지났다.


"돌아가면 푹 쉬자고."
"응!"
"씻고 푹 자고 재정비도 좀 해야지. 겨울님이 메이 좀 잘 씻겨주세요."
"나 잘 씻거든!"

성주의 저택에는 목욕할 수 있는 시설도 있다고 했었으니까, 지저의 늪지의 똥독 늪지를 건너는 것 정도는 감수할만 했다.
나는 버럭 화를 내는 메이를 보며 웃었고, 겨울의 처녀도 숨죽여 웃었다.
중간에 좆될 뻔 하긴 했지만, 이정도면 무난한 원정이었다.
엄마가 죽어서 길을 잃은 고름쟁이를 한 명 보긴 했지만, 그 고름쟁이는 내가 화염을 두른 그레이톰의 심판으로 때려 죽였다.

사다리를 오르고, 계단에서 찡찡대는 메이를 이끌어 오르고, 어느덧 우리가 출발할  사용했던 하수구의 철문 앞에 도착했다.
여전히 굳건한 게이트를 보며, 나는 다가서서 노크했다.



텅, 터덩, 텅, 텅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혹시 저기까지 안 들렸나 싶어서 겨울의 처녀에게 물어보았으나, 건너편에 인기척이 아예 없다고 했다.
흠, 뭔가 이상한데.



하지만 이런문을 근력 초인 하나와 일반인 두 명이서 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문 앞에서 퍼져앉았다.



"뭔 일이길래 안 열리는 거지. 점심시간인가?"
"그렇게 말하니까 배고픈 거 같기도 하구."
"넌 맨날 배고프지 않냐?"
"…사실 좀 그렇긴 해."

메이가 멋쩍게 웃으며 투구를 벗고 머리칼을 나풀거렸고,  역시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투구에는 뭔가 특수한 기능이 있는지, 본래라면 시야를 좀 가려야할 면갑이 거의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


아이템인 걸 감안하면 그럴 듯한데… 게임에서는 이런 거 존나 쓸모 없지 않나?




나와 메이가 각각 장비를 체크하면서, 좀 지루하다 싶을 때마다 문을 두드렸다.
그래도 열리지 않았다. 반응도 없었다.

"…설마 도시가… 아니지, 그럴리가."

회색의 주인은 죽였다. 문제가 생길 수가 없었다.
라고 생각했다.
한동안은.




문을 열어준 자경단원은, 몸에 붕대를 두르고 쩔쩔메고 있었다.

"…오셨군요! 다행입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문이…."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최악을 직감했고,



"성문이 돌파당했습니다!"



그 직감은 들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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