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회색의 검
왜?
어떻게?
고대의 도시는 고대인들이 거주하던 도시다.
이 세계관 속에서 고대인은 초월적인 기술력을 가진 존재들이었고, 그들이 만든 건 지금껏 파손되거나 쇠퇴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랬다는 얘기다.
"성문이요? 아예 무너졌다는 얘기입니까?"
"저희도 잘… 성문 방향에서 괴물이 쏟아져나온 건 사실입니다. 시민들은 성주님의 성까지 대피했고, 저희 자경단과 시민병들이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지만…."
말을 흐리는 자경단원들의 안색이 어두웠다.
대충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있어, 나는 옆구리에 끼워뒀던 투구를 도로 머리에 뒤집어썼다.
고정된 면갑은 거의 내 시야를 방해하지 않았다.
"앞장서세요. 돕겠습니다."
메이는 내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겨울의 처녀도 그렇게 달가운 반응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대의 도시는 회색의 주인만 죽인다면 게임의 엔딩까지도 멀쩡한 도시 중 하나다.
그런만큼 대부분의 PVE 유저들은 거점을 고대의 도시에 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런 고대의 도시가 무너진다고?
심상치 않았다. 수용소에서 해방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뭔가 아주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만은 명확했다.
그럼 다소의 리스크를 지더라도, 이걸 직접 확인해야했다.
이 다크 판타지 세상은 멸망하고 있으니까.
"겨울님을 성까지 데려다주십시오."
투구를 뒤집어 쓴 남자가 자기 부하에게 손짓했고, 그는 겨울의 처녀를 이끌어 어딘가로 향했다.
"언니를 저렇게 보내도 괜찮은 거야?"
"보스전처럼 1:1이라면 데려갔겠지만, 성문이 돌파당했다면 난전이야. 난전 속에 눈이 먼 사람을 데려갈 순 없어."
그래도 다행인 게 있다면, 자경단원 중에 부상을 입은 이들이 많지 않았다는 거였다.
상황이 아직 그렇게까지 심각하진 않다는 이야기였다.
칼을 뽑고, 메이가 원래 사용하던 큼직한 원형 방패를 왼손에 들었다.
날을 타고 불길이 치솟았다.
"갑시다."
*
우리는 성문에 도착하자마자 괴물과 난전을 펼치고 있는 자경단, 시민병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콰아앙!
"으윽…."
내가 뽑아들고 있는 장검과 유사한 한손검을 든 여자, 세레나가 내 옆을 죽 미끄러졌다.
그녀가 대치하고 있던 큼직한 괴물은 근육과 지방으로 육중했지만, 지성은 옅어보였다.
세레나가 겨우 균형을 되찾고는 숨을 몰아쉬더니 나를 보았다.
"아, 오셨."
쿨럭 쿨럭, 하고 기침을 토해낸 그녀가 제 입가를 슥 닦아내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왼팔은 회색빛 결정으로 덮여있었는데, 잘 보니 그 어깻죽지에는 살점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세레나, 당신 설마."
"예, 도시의 위기니 써야죠."
"젠장, 어쩌려고 도대체…."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는데, 결정의 촉감은 이상하게도 미적지근했다.
그녀는 이제 왼팔 전체를 대가로 바치고 마법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대가가 상대적으로는 적은 편이라며 웃는 그녀에게 나는 한 번 인상을 찌푸리고는 성문을 바라봤다.
씨발, 진짜 뚫렸잖아.
성문이 있어야 할 자리는 녹아내린 금속덩어리가 있었다.
완전히 전체가 녹아내린 건 아니지만, 어지간한 괴물들이 통과할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은 되었다.
이러니 지지부진한 방어전이나 이어가고 있었던 거였다.
"계획이 뭡니까?"
"없습니다. 일단 괴물놈들을 잡다가 놈들이 주춤하면 그때 다시 성문을 닫거나… 성문에 뭔가를 가져다 덧댈 생각이었죠."
구멍의 세로폭만 하더라도 3m를 넘었다. 게다가 저 문을 녹인 괴물이 있다면, 막아봤자 의미는 없었다. 내 시선에 담긴 뜻을 알았는지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성문이 녹아내린 게 3시간 전입니다."
3시간 동안 괴물들은밀려들어왔지만, 그 성문을 녹인 장본인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그거 참 좆같은 얘기인데.
나는 대충 계산을 끝마쳤다.
지성이 있고, 문을 녹일 수 있는 강력한 불길을 가지고 있는 놈이 뒤에서 넋놓고 구경하고 있다.
그리고 괴물들은 계속 밀려들고 있다.
나는 괴물들이 조종당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그것도 철저하게, 무슨 전략게임처럼 통제하고 있을 가능성을.
나는 왼팔에 든 방패의 가죽끈을 조이고는, 오른손에 든 장검을 손 안에서 한 바퀴 돌렸다.
"검은 좀 다루십니까? 그거 한손으로 쓰기 힘들텐데요."
"어쩔 수 있겠습니까. 못 막고 뒈지는 거보단 낫죠."
내쉬는 숨이 투구 속에서 산산히 흩어졌다.
"메이, 따라와."
"응."
그래도 전투를 겪다보니 침착해졌는지, 메이는 군말 없이 나를 따랐다.
"명심해, 내가 싸우기 시작하면 내 뒤를 봐줘."
"엑, 그럼 난 어떻게 하구."
"내가 쓰러트리면 바로 널 부를테니까, 시키는대로 해."
투구 속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네가 고수니까."
단순히 달려든다면 금방 뒈질 것 같은 난전에서 선택한 전술은 간단했다.
내가 괴물과 정면으로, 제대로 맞서싸워서 연전을 유지할 수 있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괜히 그러다가 협공이라도 당하면 귀찮아진다.
그러니, 병사들이 맞붙고 있는 괴물들에게다가가 그 괴물을 기습한다.
병사와 함께 그 괴물을 처리하고 나면 다른 병사가 붙들고 있는 괴물에게간다.
이걸 무한 반복한다.
물론 단순하게 먹힐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녀석들의 이상한 점에 대해서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다.
나는 장검을 고쳐쥐면서 머릿 속으로 속삭였다.
이 세계는, 살고싶어 하는 놈부터 뒈진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가장 눈 앞에 있는 괴물에게 달려갔다.
"으아아!"
자경단원은 장병기를 든 남자였는데, 그가 창날을 휘두를 때마다 괴물은 능란하게 피하며 그에게 상처를 남겼다.
아주 빠른 놈인 것 같았다. 갑주를 믿고 버티기엔 공격력이 꽤 높은 듯 했고.
나는 방패의 가죽끈으로만 방패를지지한 채, 장검을 칼집 입구에 대고 긁었다.
푸화아악
불꽃이 치솟았다.
"마무리 하세요!"
나는 검을 양손으로 휘두름과 동시에 외쳤고, 괴물은 뒤를 돌아보려다가 목 바로 아래, 가슴팍에 길쭉한 상처가 남았다.
하지만 상처에서 피가 솟진 않았다. 베이자마자 바로 지져진 탓이었다.
놈은 고통스럽게울부짖으며 사마귀의 낫 같은 두 앞발을 들어올렸다.
이어질 공격의 궤적을 보려고 눈을 크게 뜬 순간, 그 위로 발톱이 날아들었다.
까가각
촤악!
다행히 병사는 넋 놓고 있지 않았다. 힘든 상황에서도 정신차리고 있을 정도의 냉정함은 갖추고 있었다.
그가 든 창에 괴물의 목이 떨어졌고, 나는 방패를 내렸다.
"메이, 다음!"
나와 메이는 꾸준하게 괴물들을 방해했고, 때로는 내가 직접 괴물을 죽이기도 했다.
피에 얼룩지기 시작하는 검날을 억지로 칼집에 밀어넣었다가 빼, 화염으로 청소했다.
"좋아, 다―"
시야 끄트머리에 들어오는 빠른 움직임.
나는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올렸고, 그 빠른 무언가는 내 방패를 두드려 나를 날려보냈다.
득, 드드드득
덜 골라진 돌바닥을 굴러 애써 균형을 되찾았다.
등 존나 아프네. 내 등은 매번 혹사하는 거 같았다.
"씹… 예상대로네."
바로 들어올린 고개를 향해, 괴물의 독침 같은 게 날아와 투구를 두드렸다.
그 탓에 머리가 울렸지만 얼굴에 맞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치미는 구토감을 참으며 자리에 일어섰다.
괴물들이 어느새 나와 메이를 포위하고 있었다.
괴물들의 눈동자에서 이성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미묘한 지성이 느껴졌다.
나와 메이에게 '포위섬멸진'을 시전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괴물들에게 한창 분탕을 놓던 나부터 제거하겠다는 생각으로 보였다.
아… 씨발 좆됐네.
놈들의 조종 여부를 알아보는 건 좋았는데, 뒷일을 그다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전에 몸을 뺄 수 있을 줄 알았지.
나는 내게 다가오는 육중한 탱커형 몬스터를 보았다.
단단한 근육에 피부를 덮은 비늘, 거북이처럼 생긴 대가리.
아, 이게뭐냐 싶은 괴물.
심지어 피부에는 뭔지 모를 검은 혈관이 울긋불긋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 괴물이 도끼를 치켜올렸고, 나는 침을 삼키며 양손검을 쥐었다.
좋아, 와라. 혹시 모른다. 거인의 힘이 발동될 수도 있지.
나는 일말의 기대를 걸며, 양손검을 휘…두르려다 멈췄다.
콰드득!
녀석의 대가리가 박살났거든.
그것도 꽤 익숙한 모양새의 팔에.
…로켓 펀치?
세레나가 날렸던 팔이 제 주인에게 되돌아 가더니, 곧장 치켜올려졌다.
"전군, 공격!"
으아아아아!
세레나의신호와 함께 내가 도와줬던 병사들이 무기를 고쳐들고 괴물들에게 뛰쳐나갔다.
그와 동시에 탱커형 몬스터 옆에 있던 놈이 나에게 뛰어왔다.
네 발로 뛰어다니는, 꼬리가 전갈처럼 생긴 놈이었다.
딱 봐도 꼬리가 위험하다는 놈이었다. 얼굴은 또 개같이 생겼다.
놈이 짖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메이, 방패 펼쳐!"
"어, 응!"
하지만 놈의 꼬리가 우리에게 닿기도 전에, 펼쳐진 방패날은 녀석의 꼬리를 종잇장처럼 잘라버렸다.
그리고 뒤이어 방패의 겉면을 타고 주홍색으로 빛나는 결계가 펼쳐졌고, 그 위로 괴물이 부딪혔다.
쿵!
찌그러진 얼굴로 튕겨나는 괴물과 우리에게 쏠리는 병사들의 이목.
나는 방패날이 접히자마자, 존나 멋있게 칼을 뽑…으려고 했지만 잘 안되길래 그냥 뽑아냈다.
검날을 타고 불꽃이 흘렀다.
"흐랴아!"
내 기합성과 함께 괴물의 모가지가 거칠게 찢어졌고, 그런 괴물의 목덜미를 발로 차 떨궈냈다.
다행히 나만이 성과를 올리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 이외에도 대부분의 병사들은 괴물을 성공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숨을 고르며 메이에게 따봉을 하고 있자니, 내게 세레나가 다가왔다.
그녀의 왼팔은 피 범벅이었다.
로켓 펀치의 세레나….
시덥잖은 생각이나 흘리고 있자니, 로켓 펀치가 내게 말을 걸었다.
"훌륭한 작전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시선을 집중시켜서측면 타격을 유도하다니. 야만인의 전술안은 선구적이군요."
괜히 이상한 오해를 사고 있는 것 같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씨익 웃으며 투구를 벗었다.
"지금 신경 쓰실 건 문 막는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안 그래도 지금 병사 몇 명을 보내 마차 몇 대를 조달하고 있습니다. 곧 올테니 그때까지만 방비를 도와주시죠."
그녀는 마차를 가져오는 사이에 괴물이 다시 파상공세를 펼칠까 걱정하는 모양이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부숴진 성문을 보면서 여러 감상을 품었고, 병사들은 가져온 마차를 성벽에세우고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가져와 쌓아올렸다.
"세네카는 어디에 계십니까? 원정의 결과를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좀… 중요한 내용이기도 하고요."
세레나는 중요한 내용이라는 말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저 성벽 위에서 병력을 가늠하고 활로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시체 중에는 머리에 화살이 꽂혀있는 게 꽤 있었다.
"그럼 저희가 올라가는 게 낫겠군요. 드릴 말씀이 많―"
터엉!
엉?
나나 세레나는 갑자기 들려온 금속음에 고개를 돌렸고, 그러자 성문 너머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성벽의 위에서 무언가 내려오고 있었다. 저건… 로프인가?
로프를 탄 여성이 내려오더니, 우리에게 뛰어왔다.
갑주에 그을음이 남아있는 세네카였다.
"세네카, 마침―"
"물러서!"
터어엉!!
그 금속음은 다시 들렸고, 세네카는 분주하게 달렸다.
나와 메이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세레나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그 순간, 나는 보았다.
내 눈동자에 강한 잔상을 남기며 뿜어져나오는 불꽃을.
태양이 성문 안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가려진 성벽의 너머로 폭력적인 수준의 불기둥이 치솟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귀가 아리고, 코피가 흘렀다.
단순히 열이 존나게 높을 뿐인데도 한참 멀리 떨어진 우리에게도 여파가 닿았다.
세레나는 재빠르게 왼팔을 뻗었고, 그제서야 메이가 방패를 펼쳐 화염을 막아냈다.
탐욕스러운 화염이 방패를 핥아댔다.
"씨발…."
나는 방패의 너머로 보았다.
성문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집채만한 드래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