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회색의 검
보통 판타지에서 드래곤이라고 한다면 둘 중에 하나다.
그냥 몸만 존나 크고 지성만 어줍잖게 있는 비만 도마뱀.
혹은 신에 맞먹는 아성을 가진 개미친 새끼들.
칼라미티 사가의 세계에서는, 다행히 후자는 아니었다.
전자에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죽어나가는 게 숨쉬듯 벌어지는 다크 판타지에서는 그것도 꽤 오버 밸런스였다.
"어째서 드래곤이…!"
세레나가 방패 뒤에서 겨우 숨을 고르더니, 그렇게 외쳤다.
하기야 이거 거의 그거 아닌가. 갑자기 문짝 부수고 사자가 쳐들어오는 거.
그렇게 생각하자니 좀 남일 같아서 마음이편해졌다.
콰아앙!
아니다.
별로 안 편했다.
나는 펼쳐진 방패의 위로 넘실대는 불꽃과 그 너머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드래곤을 보았다.
몬스터의 패턴 같은 건 잘 모른다. 그런 건 PVE 고인물들의 장기니까.
하지만 직감이란 게 있다. 특히나 이 세계에 오고 나서 빠릿빠릿하게 일하는 놈으로.
그 직감이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좆까는 생각 하지 말고, 뭐 안 하면 그대로 뒈진다고.
나는 문득 자경단원들이 있던 위치를 보았고, 그 자리에는 잿물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메이! 앞으로 전진해! 그러다 신호 주면 방패 접고 뛰어!"
"뭐?! 접으면 다 죽는다구!"
"닥치고 시키는대로 해, 짱깨!"
쌉소리를 하던 메이는 어깨를 움츠렸다가 방패를 들고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화염이 갈라지는 방향이 다채롭게 변했다.
"무슨 계획이 있는 겁니까?"
"계획은 없습니다. 최선 정도만 있죠."
좆박은표정으로 말하자 세레나는 괴로운 표정으로 납득했다. 그녀도 이대로 버텨봤자 의미가 없음을 알았던 탓이다.
세네카는 활을 등에 걸었고, 세레나는 제 왼손을 쥐었다 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뱉고는 장검을 짧게 쥐었다.
쿠와아아아아아!
결계 위를 세차게 내달리는 화염은 점차 줄었다. 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방향도 일정해졌다.
화염은 한결 같이 위로 치솟았고, 그 탓에 방패를 든 메이는 부담이 줄어 걸음이 빨라졌다.
얼추 100m를 아우르는 거리를 좁혀, 바로 앞이라고 할 수 있을 지점, 갑작스럽게 화염이 멈췄다.
"…지금!"
후오오오
거대한 무언가가 공기저항을 받아 내는 귀곡성이 울렸고, 내 신호에 메이가 방패를 접었다.
씹, 역시 예상대로야.
드래곤이 높게 치켜든 앞발이, 우리를 향해 떨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뛰어 씨발!"
내가 목소리를 내며 앞으로 뛰쳐나가자, 메이는 옆으로 뛰어갔고, 세레나와 세네카는 나와 같은 앞으로 향했다.
꽈앙!
메이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꼬리가 닿기 딱 좋은 거리에 있었던탓에 그녀는 드래곤의 꼬리를 두들겨 맞았다.
방패로 막아냈으니 목숨에 지장은 없겠지만, 당장 다시 합류할 수는 없었다.
어휴 멍청한 짱깨.
"씨이발!"
나는 나를 노리고 내리찍어지는 앞발을 겨우 드래곤의 가랑이 사이를 빠져나가 피했고, 코를 찌르는 악취에 눈쌀을 찌푸리면서도 칼날을 휘둘렀다.
퍼억!
무슨 촉감이 이래?
질퍽하고 끈적거리는 게, 드래곤의 살이아닌 슬라임이라고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정도였다.
슬라이딩을 한 탓에 뻗어있는 자세 그대로, 나를 잘 마른 쥐포처럼 만드려는 듯 뛰어오르는 드래곤을 올려다봤다.
좆됐네.
내가 이를 악물고 방패를 들어올리는 순간, 무언가 내 시야 귀퉁이에서 날아왔다.
그건 새도 슈퍼맨도 아니고, 세레나가 쏘아낸 로켓 펀치였다.
로켓도 펀치도 없었지만, 그건 딱 좋게도 내가 염병할 쥐포가 되기 전에 나를 구해서 나를 질질 끌고 한복판으로 내던졌다.
"으으윽 씨발 내 등."
어째 내 등은 한시도 멀쩡하질 못했다.
그래도 이대로 누워있으면 좆되니까, 나는 빠르게 일어나 도로 날아가는 로켓 펀치의 궤적을 눈으로 쫓았다.
"감사합니다!"
세레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대신 조작하는 게 꽤 어려운 일인지 눈가를 찌푸린 채로 한손검으로 일사불란하게 드래곤의 다리를 베어댔다.
어떻게 데미지가 하나도 없지? 내가 의아할 참에 그녀의 펀치가 날아올라 고공에서 그대로 내려꽂혔다.
퍼억
몸을 움츠린 것과는 다르게, 그 주먹은 자연스럽게 그 머리를 꿰뚫어 턱 밑으로 빠져나왔다.
뭐지? 이렇게 약하다고?
내 의아함은 나만의 몫이 아니었는지 세레나도 눈쌀을 찌푸렸고, 세네카도 멈춰섰다.
후두둑
그리고 살점이 그 턱 밑으로 쏟아졌다.
그 살점은 하나 같이 부패의 상태가 심했는데, 얼핏 보자니 뇌조각 같은 것도 섞여있었다.
…씨발?
"언데드 드래곤입니다!"
진짜 좆같은 것만 섞어놨네.
내가 침음성을 흘리자 고함을 지른 세네카가 화살 두 발을 쏘아냈다. 그 화살은 드래곤의 눈알을 꿰뚫었다.
그대로 살 안으로 빨려들어가지만 않았어도 좋았을텐데.
물리 피해가 거의 먹히지 않았다.
물러서야 한다. 이대로 여기서 저거랑 죽치고 싸워봤자 다 뒈지는 거 밖에는 안 나온다.
"세레나씨! 물러나야 합니다!"
그때 나는 내 시야 앞으로 달려드는 거대한 무언가를 보았다.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올렸지만, 그게 내 몸을 두드린 순간.
"씨―"
콰아아앙!
내 의식은 방패와 함께 찌그러져 날아갔다.
내가 바로 의식을되찾은 건 등에 부딪힌 민가가 부숴지면서 나한테 존나게 고통을 줬고, 등 뒤에 메고 있는 폭군의 검이 대부분의 충격을 막아주었기 때문이었다.
쿠르르르르
내 몸으로 박살난 나무들이 신음을 흘렸다. 그 속에서 나는 망할놈의 환자처럼 기침을 쏟아내며 입 밖으로 침을 흘렸다.
"씨발 내 등…."
파스가 존나 간절했다.
야구 할 때도 파스는 잘 안 붙였는데.
다크 판타지 좆같네 진짜.
전황은 너무나 좆같았다. 이길 방법은 있었으나, 실현하기 힘들었다.
떠오르는대로 생각해보자면, 언데드는 불에 약했지만, 드래곤은 불에 강했다.
하지만 언데드인 걸 감안했을 때, 전신을 동시에 불사를 수만 있다면 드래곤 특유의 화염 저항은 개무시하고 불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그걸 어떻게 해 씨발.
투덜대며 밖으로 나오자, 상황은 더 가관이었다.
메이는 언제 다시 달려들었는지 방패를 접었다 폈다 하며 드래곤에게 유효한 피해를 주고 있었지만 이내 드래곤이 꼬리를 휘둘러 튕겨내자 민가에 쳐박혔다.
세레나는 보이지 않았으나, 세네카가 구석에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걸 봤을 때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가담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머리를 북북 긁으며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머리를 짚는 순간, 무언가 드래곤의 머리 위로 떨어져내렸다.
슈우우우
콰아아아앙!
그건 존나게 큰 주먹이었다.
그리고 그 주먹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게임에서 봤던 회색의 주인이 사용하는 기술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그럼 그걸 사용한 사람은…?
내가 고개를 돌리자, 허공에서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너풀거리는 망토를 등에 두른, 세레나였다.
그녀의 왼팔은 다시 사라져 없었다.
푸우욱!
고통스러운지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드래곤과 그 드래곤의 머리에 매달려 칼을 휘젓는 세레나.
뭔 액션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에 내가 아가리를 딱 벌리고 있자니, 그녀는 몇 번 그렇게 더 휘젓다가 드래곤이 쓰러짐과 동시에 뛰어내렸다.
콰득!
착지는 좋지 못했으나, 드래곤은 쓰러졌다.
"씨이발… 존나 멋있네."
저런 걸 해보고 싶은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다리가 분질러지면 겪는 고통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던 바.
나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세레나에게 뛰어갔다.
"세레나!"
"아, 오셨군요."
그녀는 한 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다리는 기이한 방향으로 꺾여있었고, 내장을다친 건지 그녀가 뱉어내는 기침에는 피가 섞여있었다.
처참한 모습임에도 그녀는 의연했다. 그녀는 나를 보고 해맑게 씨익 웃었다.
"아, 웃지 좀 말고 도망치기나 합시다."
"도망입니까…? 제가 다 잡았는데요."
"저게 어딜 봐서 뒈진 겁니까. 제가 보기엔 얼마 안 있어서 일어날 걸요."
언데드는 공통적으로 뒈지면 오래 가지 않는다. 크기가 클 수록 빠르게 분해되고, 태양의 아래에서는 금방 먼지더미가 된다.
"아… 그거 참."
"좆같다고요? 잘 알죠. 빨리 일어나기나 합시다."
내가 그녀를 안아올리기 무섭게,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골끼리 마찰하고, 비늘이 해골에 스쳐지는 것만 같은 소리.
횃집에서 들었으면 군침이 돌았을 소리였는데, 씨발 이렇게 들으니까 개좆같았다.
머리칼이 들고 일어서는 기분에, 이번이 세번째 클리셰적인 뒤돌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 언데드 드래곤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내가 뭐라고표현하기에도 애매하고, 몸에 뚫린 구멍에서 각기 소리가 증폭되어 돌아가는 것처럼 시끄럽게 울렸다.
내가 이를 악물고 버티자, 세레나가 제 창백한 입술을 내 귓가에 가져갔다.
"저거 쓰러트릴 기책은 있으십니까?"
저걸 어떻게 쓰러트려 씨발아. 방법은 있지만 실현할 도리가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그녀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뭔데 그 표정.
"그럼 어쩔 수 없죠."
그녀는 남은 손으로 제 품을 뒤적이더니, 한 권의 책을 꺼냈다.
회색의 양장본,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 책에는 제목도 뭣도 없었다. 단지 좆같이 섬뜩하고 음울한 빛만을 뿌리고 있었다.
"당신 설마…?"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책을 펼쳤다. 펼쳐진 책에서 페이지들이 어지럽게 일렁거리고, 너풀거렸다.
그 한 장 한 장이 뜯어져 나오더니 무슨 역겨운 곤충처럼 그녀를 감싼 채 떠돌다 그녀의 뱃속으로 꾸물대며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짓을…."
경악하는 내 목소리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말했다.
"내장 몇 개가 대가인 모양입니다."
지나치게 담담해서, 나는 순간적으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대답을 바란 게 아니라는 듯 손을 움켜쥐었다.
"제정신이예요?! 그딴 짓을 했다간 당신은 뒈집니다!"
내장 몇 개?
무슨 내장이 누구 개 이름도 아니고, 내장 한 둘만 없어도 뒈지는데, 내장 몇 개?
이 미친년이 헛된 짓거리를 하기 전에 막아야 했으나, 그녀는 내 뺨에 손을 걸쳤다.
"다 뒈지는 거보단 낫겠죠. 안 그렇습니까?"
반박하지 못하는 게 애석할 뿐이었다. 내 표정을 보고 뭘 생각했는지, 그녀가 씨익 웃더니 내 목에 두른 팔을 내렸다.
"부축좀 해주십시오. 혼자서는 못 일어납니다."
기이하게 꺾인 다리는 확실히 제 기능을 못할 거 같아서, 나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팔을 둘러 받쳤다.
"제가 죽으면 세네카한테 전권을 위임한다고 전해주시고… 살아있으면 제가 직접 말하겠습니다."
그녀의 입가에서피가 주르륵 새어나왔다.
"미친년…."
"하하, 주현성씨가 욕해주니 좀 포상 같군요."
그녀는 진심으로 희생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이해를 못할 판단인 건 아니다.
적은 강대하고, 쓰러트릴 방법이 있긴 하지만 실현하기엔 너무나 불확실했다.
그래서 내 이성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라고 있었다.
근데 난 그런 게 존나 싫었다.
내 이성이 시키는대로 했으면, 씨발 이 좆같은 다크 판타지 게임은 시작도 안 했을거다.
나는 내 꼴리는대로 해야만 하고, 장기적인 이득보다는 단기적인 재미가 더 좋았다.
그래서 난 지금 이 상황이 좆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말같지도 않은 언데드 드래곤도 좆같았고.
그걸 잡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며 세레나가 희생하려는 것도 좆같았고.
잠시나마 그래야 하는 건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한 내 자신도 개좆같았다.
그리고 난 좆같은 걸 참지 않는다.
"닥쳐."
"…예?"
"닥치라고."
그녀는 이미 내장을 거의 다 걸은 것처럼 보였다. 마도서는 존나게 빛나고 있었고, 그녀의 입에서는 피가 울컥 솟아나고 있었다.
될지 안될지 모른다.
최악의 형태로 흘러서 대가는 대가대로 쳐먹고 마법만 취소될 수도 있었다.
심하면 씨발 터질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게임 속에 들어온 이상 나 좋다는 새끼 뒈지게 둘 생각은 없었다.
겨눈 검 끝이 가늘게 떨렸다. 양손검이라 한손으로 겨누기 힘들었다.
내 칼 끝이 향한 곳은 마도서. 회색의 빛으로 타오르는 빌어쳐먹을 사기꾼이었다.
"…주현성님?"
그녀의 당혹한 표정. 그럼에도 가늘게 떨리는 눈. 희생한다고 자처하긴 했지만, 누가 씨발 뒈지고 싶을까.
살기 퍽퍽하고 좆같은 하드코어일 수록, 삶에 대한 열망은 타오르는 법이다.
"아가리 닥치고 있어."
이 아이템은 마법을 무효화하는 효과를 지닌 장검이다.
그래서 이걸 얻었을 때부터궁금했다. 이 무효화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어째서 회색의 주인이 이것과 똑같이 생긴 검을 만들어 쓴 건지.
과연 이 칼은, 회색의 주인이 남겼다는 마도서 그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지.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내가 씹어뱉은 말에 그녀가 눈을 감았고, 나는 검날을 눈이 부실 정도로 타오르는 마도서에 찔러넣었다.
감촉은 거의 없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칼날이 덜걱거리는 느낌이 들고, 손아귀가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검을 놓진 않았다. 놓으면 후회할 거 같았다. 나는 그 칼자루가 내 삶 그 자체인 것처럼 강하게 움켜쥐었다.
마도서는 마치 죽어가는 별처럼 빛을 뿜어댔다.
콰아아아아아아…
마도서의 빛은 서서히 잦아들었고, 흩날리던 페이지들은 다시 세레나의 뱃속으로 스며들었다.
마도서는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단순히 구멍이 뚫린 책처럼 보였다.
"주현성…님."
그리고내가 쥔 검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선명하게 회색의 빛을 뿌리는 검날, 칼자루에 휘감긴 책의 페이지들.
나는 말 없이 그 장검을 꼬나쥐고는 그녀를 바닥에 내려놨다. 그녀는 저항 없이 누워 나를 바라봤다.
"보고 있어, 고인물이 어떤 건지 보여줄테니까."
나는 회색으로 타오르는 검날을 화염석 검집에 긁어 불을 피워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