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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화 〉회색의 검 (29/274)



〈 29화 〉회색의 검

지난 번 보스전과는 다르게, 나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근데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외과의 같은 건 없지만, 게임에서도 회복을 제공하던 겨울의 처녀는 충실하게 나를 치료했고 그 치료 과정은 꽤나 괴롭기까지 했다.


뚜두둑


"구아악!"


겨울의 처녀가 접골한 손가락은 존나게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다행히 겨울의 처녀는 앞을 볼 수 없었다. 내가 떨군 눈물 정도는 못 봤겠지.

"열심히 하셨군요, 당신. 괜찮아요."

아, 왜 아냐고.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이 내 눈가를 훔쳤다.
이 새끼 사실 보이는 걸지도 몰라.

내가 속으로 툴툴대며 숨을 고르자, 내 바로 옆 침상에 뻗어서 겨우 정신을 차린 세레나가 말했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뭐, 드래곤이랑 싸우면 그럴 수도 있죠."
"아뇨, 그거 말고요."

그녀의 기이하게 뒤틀렸던 다리 역시 겨울의 처녀가 치료했다.
그녀는 초인적인 근력으로 세레나의 저항을 무력화했고, 이내 존나 아프지만 그래도 건강에는 좋은 방식으로 뼈를 끼워맞췄다.
세레나는  과정을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다가 방금 깨어났다.


"메이랑 세네카씨는 괜찮습니까?"
"그 두분들은 증세가 경미해요. 당신에 비하면…."

어쩐지 우울감에 젖어드는 목소리에, 나는 붕대로 칭칭 감겨진 팔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가볍게 쥐었다.
와, 존나 탄력 있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겨울님 덕분에 아프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부디 무리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녀는  뺨에 얹어진 내 손을부드럽게 감쌌고, 차가운 손에 안겨진  손은 존나 황홀한 기분이었다. 붕대만 없었으면 좋았을 건데.
세레나는 엎드려 누운 채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도 열심히 했는데 칭찬 좀 해주시면 안됩니까?"
"어…."
"됐습니다. 먼저 좋아한 사람이 지는 거죠 뭐."

…네?
내 의문에 대답하지 않고 세레나는 몸을 돌려 누웠고,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보다가 겨울의 처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겨울의 처녀는 베일 속에서 작게 웃었다.



*

나의 상처는 깊었으나 치료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궁금증 역시 해결되었고.
내심 게임을 하면서도 궁금했었다. 과연 겨울의 처녀의 회복은 무슨 수단을 거쳐서 하는 건지.

마법을 쓸까? 혹시 권능? 아니면 맹인이면서도 사람한테 수술을 집도하는 걸까.

그녀는 예상 외로 멀쩡한 방법을 사용했다.
약간의 의학적 지식, 거기에 덧붙여지는 연금술.


나는 그녀가 내 입에 물려준 물약을 들이키고, 연고를 화상 상처에 덕지덕지 발랐다.

"상당한 수준의 연금술이군요."


세레나는 벌써 아물기 시작한  상처를 보고는 놀라워했다.


하기야, 나도 그렇긴 했다. 빡쳐서 저지르긴 했는데, 드래곤의 브레스는 상상 이상으로 내게 큰 피해를 입혔다.
팔은 무슨 숯덩이처럼 됐고, 나는 팔의 감각이 차라리 없었으면 할 정도로 괴로워 했으니.
심지어 브레스를 직격으로 맞았던 자경단원들은 전부 죽었다. 즉, 나는 운이 좋은 거였다.

"팔은 좀 어떠신가요?"
"괜찮네요. 잘 움직여요."


근데 겨울의 처녀가 만든 물약과 연고를 사용하니 사실상 절단했어야 할 상처였음에도 팔은 건재했다.

"그래도 무리는 하지 말아주세요. 다음에도 늦지 않게 치료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확실히 그랬다. 다음에도 지금과 같은 요행을 노리고 무리를 할  없었다.

"자중해야죠. 이번은… 상황이 상황이었으니… 다 죽을 순 없잖습니까?"

겨울의 처녀는 대답하지는 않았으니 부정하는 기색은 아니었고, 세레나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기시감이…."
"그거랑은 다르죠."

자기 희생을 하려는 거랑 목숨 걸고 싸우는 건 아무래도 다르지.
그녀는 몇 번 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침대에 몸을 뉘였다.


"헌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침상에 놓여진 양손검을 향해있었다. 검집에 싸여있었으나, 전에는 없던 장식이 추가된 물건이었다.
마도서의 페이지의 일부였던 것들이 칼자루를 촘촘하게 감았고,검날은 검집 속에서도 은은한 회색 빛을 뿌렸다.


하기야, 누가 알았을까.
게임에서는 절대 실현 불가능한 방법으로 이뤄낸 기적이었다.

"돌려달라고 하시는 건 아니죠?"
"아, 제가 그정도로 양심이 없을까봐요?"
"…조금?"
"너무하네요."

세레나는 어울리지 않게 툴툴대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목숨은 건졌지만, 마도서가 돌려준 건 당장 대가로 걸었던 내장들 뿐이었다.
그녀의 왼팔과 한쪽 눈은 여전히 없었다.


"제가 마도서를 멋대로 사용해버린 건 사실이니까요."
"그래도 저는 당신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담담히 그렇게 뱉었다.

"사실… 그동안 제 일족에서  책을 물려받아오며 사용했던 게 헛된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 대부분 대가를 치루며 마도서를 사용하다가 죽고는 했었죠."


나는 검을 흘깃 보았다.
대가를 받아내긴 하지만 강력한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마도서가 있다면 그걸 가보로 내려오는 칼로 꿰뚫어볼 생각 같은  아무도 안 할테니.
일부러 숨긴 거라면 잘 숨긴 히든피스였다.

"이제 그레이톰 일족은 끝입니다. 성주 세레나와 자경단장 세네카만 있을 뿐이죠."

그녀는 시원스레 웃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아직 다 끝난  아니지만요."

내 말에 세레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드래곤, 살아있잖습니까."
"그래도 아랫턱이 없으니 이제 위험할 건…."
"글쎄요, 상처입은 짐승이 가장 위험한 법이라서요."

이 새끼들은 2페이즈가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모르는구만?
싸워본 나는 확실히 알지만, 그건 한 번 쓰러트리면 다시 일어나서 두번째 패턴을 내보이는 종류의 보스몹이었다.
게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보스인데다, 내가 PVE 고인물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게임에 대한 지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다 회복된 후에는 그 새끼를 잡으러 가겠습니다. 구태여 도시를 습격해온 걸 보면 지성이 있던가, 아니면 배후에서 그 드래곤을 이용하려던 세력이 있을 겁니다."
"드래곤을요?"

다시 간다는 이야기에 겨울의 처녀가 내 손을  쥐었고, 세레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내게 눈초리를 보내왔다.


"물론 드래곤은 강력하고, 인간에 준하는 지성도 갖고 있지만… 언데드라면 얘기는 다릅니다. 마법이나 권능, 경우에 따라서는 간단히 유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용할  있죠."


그녀는 그런 발상은 생각도 못해봤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다지 신뢰하지못하는 느낌은 없었다.

"드래곤을 이용… 야만족에서는 그런 전술도 쓰는 모양이군요."

설명할 필요가 줄어드니 고마운 억측이었다.


"그리고 막상 보고하려던 것도 잊고 있었네요."

그녀가 나와 메이, 겨울의 처녀를 필요로 했던 일을 언급하니, 그녀의 표정은 눈에 띄게 칙칙해졌다.

"아무도 없었나 보군요."
"…예, 어떻게 아셨죠?"

애초에 누굴 찾으라고 보낸 건가.
내가 설명을 요구하려고 하자, 세레나는 잘 알겠다는 듯 말하기 시작했다.


"아주 예전에, 세상이 허물어지기 시작할 무렵에 저는 마도서를 사용했습니다."


그건 게임에서도못 들어본 얘기인데.


"대가는 제 한쪽 눈이었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가장 먼저 미래를본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그녀의 눈은 보다 더 먼 과거를 바라보는 듯 멀거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 미래에서는 어떤 아주 강인한 전사가 이 도시에 사람의 마지막 왕국을 세우고, 사람들을 보호하더군요. 그는 수용소에서 왔고, 아주 강력한 전사였습니다."

잠깐, 그거 설마.
 눈빛을 읽었는지, 세레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 저는  왕을 찾고자 당신을 거기에 보냈습니다."


그녀는 해방자를 찾고 있었다.
겨울의 해방자, 이 게임의 엔딩까지 세상을 이끌어나갈 '주인공'을.
그리고  주인공은 처참하게 죽어있었다.


어, 근데 뭔가.


"그럼 저를 왕으로 모시겠다는 건…?"


보상으로 내걸었던 왕으로 모시겠다는 얘기는, 내가 해방자를 찾아 데려와서 그를 이 도시의 왕으로 삼는다면 서로 상충되는 제안이 되어버린다.


"사실, 저는 수용소에 아무도 없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또 뭔 개소리야.
내가 그런 눈으로 보니,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전사가… 당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실현적 예언을 위해서 나를 거기에 보냈다는 얘기인가.
좀 정신 나간 소리긴 했는데, 여기의 배경을 생각하면 저러는 게 차라리 양반이었다.
다크 판타지 아닌가? 심지어 신이 인간을 버린 다크 판타지.
그럼 좀 저럴 수도 있지.

"그리고 이번에 드래곤을 상대로 싸우시는 것, 제가 지금껏 알아보지 못했던 검의 가능성을 찾아내어 제 주박을 풀어준 것을 보자면… 당신이 그 전사라고 확신합니다."

그녀의 눈에 농담을 하는 기색은 없었다.


"…사람들이 동의할까요?"
"드래곤의 아랫턱을 뜯어내고, 도시를 수호했으며, 지저의 늪지를 정복한 위대한 영웅이 왕을 하겠다는데 감히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 빌어먹을 다크 판타지.
여기에 민주주의가 없는 게 존나 다행이면서 좆같았다.


"…그런데 말했다시피, 저는 이후에 가야할 곳이 있습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주현성님의 명성을 빌리고 싶은 것이지,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는 게 아닙니다."

엥?
강제 왕국 운영 게임이 되어서 마지막에 칼에 찔려 뒈지는 건가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뭐, 그런 거라면 좋죠."

어차피 고대의 도시는 거점으로 써야한다. 왕이라는 특전을 갖고 있다면 필요한  더욱 쉽게 구할 수 있을테니까. 그렇게 나쁜 제안도 아니었다.
내 표정을 읽은 세레나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하실 일이 있다는  정도는 압니다. 사모하는 사람을 방해하고 싶진 않기도 하고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고, 우리를 간호하던 겨울의 처녀는 자리를 떴다.
어둑한 어스럼만이 방을 가득 메웠다. 나와 세레나는 나란히 앉아 저물어가는 태양을 바라봤다.
한동안 아가리를 닥치고 있었는데, 세레나가 제 침대에서 내려와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삐걱이는 목재 침대의 소리가 들리고, 나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세레나에게 의문 섞인 표정을 보냈다.


"…왜 그러십니까?"

세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이랄 것도 없이, 그녀는 나를 밀어눕혔다.
나는 굳이 저항하지 않았고, 세레나는 약간 망설이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눈동자를 지그시 보다가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할 겁니까?"
"…하면 안된다고  거잖습니까."

뭐, 그렇긴 하겠네.
내가 대답하지 않으니, 그녀는 부루퉁하게 표정을 지었다가 내게 몸을 겹쳤다.
몸에 간단하게 걸친 셔츠 위로 젖가슴의 촉감이 느껴졌고,  앞섬 위로 슥슥 문지르는 고간 너머로는 은은한 습기가 느껴졌다. 젖어드는 듯, 끈적이는 듯.
그녀는 그 상태로 내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코가 툭 부딪히자 그녀는 맑게 웃었고, 나는잠시 고민했다.


이걸 받아주는 게 맞을지, 아니면 거절하는 게 맞을지.
그런 내 고민을 읽었는지, 그녀는 남아있는 한 팔을 뻗어 내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 손길을 따라 눈을 올린 그 잠깐 사이에 그녀는 내 입술 위에  입술을 겹쳤고, 결국 난 고민해봐야 별 거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혀가 내 입을 비집어오는 것에 저항하지 않았다. 혀를 얽었다. 뒤엉키는 혀를 따라 세레나는 콧소리를 흘리거나  자지 위에 비벼대는 보지를 움찔거리면서 흥분했다.
달궈진 숨결이 내 입안에 퍼지고, 나는 그녀와 입을 맞춘 채로 혀를 얽으면서 손을 끌어내렸다. 그녀의 면바지 위를 더듬던  손이 바지 속을 파고들었다.

질꺽

흠뻑 젖었네.
끈적거리는 균열을 슥슥 문지르자니, 그녀는 몸을 떨면서 내 가슴팍에 이마를 댔다.

"…이건, 거래입니다."

무슨 말인가 싶은사이에 그녀의 단단한 손이 내 손을 끄집어냈다. 내 중지는 애액으로 끈적거렸다.

"만약… 멀쩡하게 돌아온다면. 그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잘  수 있었다.
나는 웃었고, 그녀는 달아오른 얼굴로 내 가슴팍에 머리를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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