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2화 〉여름의 도살자 (32/274)



〈 32화 〉여름의 도살자

우리는 한참간이나 도망친 끝에 겨우 숲을 벗어날  있었다.
그나마  손에 들려있는 장검이 뿜어내는 회색 검기가 불, 나무, 연기 같은 것도 쳐날려버리니 다행이었지, 이 장검이 아니었으면 진즉에 뒈졌을 거다.
하지만  방향에서는 이따금씩 짐승들의 울부짖는 소리나 날아가는 세떼를   있었고, 가끔씩은 우리와 진로가 겹친 몬스터 역시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몬스터는 내가 적극적으로 처리했다.


불쌍한 놈들.

그렇게 도망친 끝에 어떤 짐승이 사용하던 동굴을 찾았고, 우리는  동굴에 몸을 비집어넣었다.
 과정에서  가족이 명을 달리하고 메이가 좀 슬퍼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불타는 원거리 타격이 가능한 칼은 내가 휘두르는대로 충실하게  가족을 고기로 바꿨다.


우리는 그렇게 동굴에서 밤을 지새기로 했다.


동굴 밖에 완전히 불타 놓여진 곰의 시체는 몬스터의 접근을 막아줄 것이다.
아마도.

불은 피우지 못했다. 아까 몬스터들이 접근했던 걸 감안한다면 피울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겨울의 처녀는 그런  옆에 와 앉았고, 메이는 배를 깐 채로 코를 골았다.
내 무릎에 머리를댄 채로 이따금씩 머리를 돌리는데, 그럴 때마다 머리카락이 사락대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녀석의 드러난 배를 감춰주었다.

"그냥 뭐… 이것저것요."

이 넓직한 동굴에서 우리가 이렇게 뭉쳐있는 건 밤공기가 존나게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졌으니 그렇겠지.


"이제  사막에 도착하니까…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도 했고요."

드물게 베일을 벗은 겨울의 처녀는, 그 예쁜 얼굴로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표정이야.
한참간이나 내가묵묵히 있으니, 그녀는  가까이 붙었다.


"더 말씀해주시겠어요?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아요."
"음… 뭐부터 말해야 할까요."


나는 잠꼬대를 하며 내 다리에 제 머리를 부비는 메이를 흘깃 보았다.

"우리가 지금부터 가는 곳은  더울 거예요. 밤에는 춥고. 괴물이나 도적 같은 것도 많습니다. 심지어 도적이여러 파로 나뉘니까, 빠르게 이동하지 못하면 위험할 수도 있죠."

겨울의 처녀는 내 말을 잠자코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옅은 호선을 그리는 그녀의 입술에서는 미미한 생기만이 돌았다.

"여름의 영토는… 아, 가봤다는  아닌데. 듣기로는 화산지대와 사막으로 되어있다더군요."


현실이라면 말도 안되는 소리였지만, 여긴 빌어먹을 놈의 다크 판타지였다.
 덕에 존나 찜통더위는 확정이지만… 겨울의 영토보다는 한참 낫겠지.
옘병할 놈의 더위는 이미 헬조선의 여름 더위로 익숙해졌기도 하고.

"네."
"그래서 저희는도착하자마자 바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할 겁니다. 우선적인 목표는… 화산지대 인근에는 산맥이 있는데, 산맥을 끼고 있는 민가를 찾아볼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루 정도는 묵어야겠죠."

아, 좀.
말하고 있는데, 겨울의 처녀가 내 뺨을 어루어만졌다.
차가운 감촉이 뺨에 번지니까 기분이 나…쁘진 않고.
오히려 존나 좋긴 한데.


그간 베일을 왜 썼는지 알 거 같기도 하다.  사람, 심장 건강에 안 좋은 짓을 태연하게 한다.
존나 예쁘게 생겼으면 좀 자중하지. 내가 착실한 유교맨이라 겨울의 비처녀가 되는  면한 거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그녀는 그 뽀얀 입술을 움직여 숨결을 뱉어냈다. 아, 말도 뱉었다.

"그럼 목적지는 어딘가요?"
"목적지라…."


사실, 여름의 도살자는 좀  나중에 잡으려고 했었다.
여름의 영토가 그렇게 정복하기 어려운 지형은 아닌데, 여름의 도살자는….
까다롭다.
좆같이 까다롭다.
화염 피해를 자유롭게 입히는데, 게임에서는 그냥 피해를 좀 입고 마는 걸로 끝냈지만 여기서는 다른 4신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는 놈이 그놈이었다.

게다가 단순하게 힘만 쓰는 미친놈은 아닐테고.
어떻든 간에 결국 만나지 않으면 세부 스펙 같은 건 파악할 수도 없는데, 만났을 때 도망칠 수 있을지도 알  없었다.
이래봬도 신이 아닌가?


"모르겠네요. 일단 여름의 도살자를 도살해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가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잠시 그 감은 눈을 나한테 향한 채로 입술을 몇  달싹였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에이, 진짜로요?"
"네. 당신이 지금껏 해오신 일들도 쉽지 않았죠. 모두 시련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당신은 열심히 해서 넘어섰어요."


그녀의 차가운 손이 내 머리를 문질렀다.
왠지 애정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저는 당신을 믿어요."


좀… 많이 상냥했다.
감정이 벅찰 뻔 했지만,  편으로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나도 안다. 잘해주는 사람한테 의심하고 하는 건 할 짓이 못된다는 거. 그래도 그랬다.


나한테 왜 잘 대해주고, 나한테 왜 그리 호감이 있고, 나를 왜 도와주는 건지.

처음엔 게임이라서 관성적으로 플레이어한테 이끌리는 건가 했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았다.
이 세상은 게임이라기엔 너무 예상치 못한 부분이 많았다.

언데드 드래곤 같은 좆같은 몬스터는 게임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세레나가 나에게 청혼하거나 왕으로 삼겠다고 하는 건 또 어떻고?
마도서를 칼로 꿰뚫으니 흡수해서 변화한 것도 빠질  없다.

이미 내가 알던 그 게임이라기에는….
너무 많은  달랐다.
내  앞에 있는 겨울의 처녀는 NPC가 맞나?
그녀의 행보나 언행은 이미 게임에서랑은 명확하게 차이가 났다.

무엇보다, 해방자는 이미 죽어있었다.
나는 그래서 태도를 정하지 못했다.
NPC로 대해야 하나? 아니면 인격체로?

내 고민이 길자, 그녀는 은은하게 웃으면서 내 뺨을 문질렀다.
솔직히, 그게 너무 자상해서 조금 목이 메였다.

*

"씨…발."

투구를 벗어던지고 싶었으나, 가방에 투구는 들어가지 않았다.
투구에 덧대놓은 드래곤의 뼈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럴 기력이 없는 것도 한 몫했다.
나는 등에 짊어진 메이를 떨어트리지 않도록 끈을 고쳐메고 숨을 헐떡였다.
씨발, 이 빌어먹을 놈의 아이템이 무게 삭제라서 정말 다행이다.
아니면 던져버렸을 거다.


"으… 더워…."
"씨발… 내 목에다 숨 불어넣지마 죽여버리고 싶어지니까…"

우리는 사막에 있었다.
저만치에서 모래로 쌓아올린 거대한 산이 보이는, 기이하고도 신기한 풍경이었으나 풍경을 즐기기엔 우린 존나 지쳐있었다.
메이는 가장 먼저 쓰러졌다. 저 거대한 젖통과 판금의 조화는 이 빌어쳐먹을 더위에는 독이었다.

나는 가슴에 지방을 달고 있지 않았고, 갑옷도 가죽이 메인에 화염에 저항이 강한 드래곤 뼈로 된 부분 갑옷을 갖고 있었으니 뻗지는 않았다.
분명 처음에는 저 커다란 젖가슴이 흉갑도 없이 등에 직접 닿는다는 게 끌려서 업고 가겠다고 했지만….

이 가슴은 분명히 말하건대, 이 엄마 없는 사막에서는 짐이었다.


물론 생각했던대로 처음에는 좋았다.
이 거대하고 부드러운 젖통이 등짝을 누를 때는 황홀경마저도 느꼈으니까.
큼직한 가슴에서 나오는 풍만함과 더불어 몽글한 유륜의 감촉, 여체 특유의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살결이 천 한  너머에서 느껴지니 상당히 좋았다.
게다가 등에 업힌 채 미안하다고 속삭이는데… 얘가 짱깨인 걸 감안해도 될 정도로 달큰하고 젖어있는 목소리였다.

근데 지금은  짐짝 짱깨를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거 같다.
 큼직한 젖통은 크기와 지방 함유 때문인지 어마어마한 열을 품고 있었고, 내 등짝은 어느새 땀범벅이 되었다.


"씨발…."

숨을 내쉬며 빈 손으로 물통을 꺼냈지만, 가죽부대는 비어있었다. 씨발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괜찮으신가요? 숨이 많이 거치셔요."

겨울의 처녀는 멀쩡해보였다.
아,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체온이 뒈지게 낮은  감안하면.
나는 어질어질 하는 머리를 간신히 붙잡고 숨을 골랐다.
아니면 걍 초인이라서 그렇던가.
나는 고개를 내저었고, 투구 사이로 땀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아뇨, 전혀, 안 괜찮아요."

숨이 턱밑까지 차고, 머리는 어지럽다 못해 빙빙 돌았다. 구토감은 무슨 호흡할 때마다 따라붙었다.

"그럼 어디 쉴 곳이라도 찾아야…."


염려 섞인 목소리에도 나는 부정할  밖에 없었다.
왜냐면, 여긴 씨발놈의 사막 한 가운데니까.

"근처에 바위 하나 없을 겁니다. 지평선 밖에 안 보여요."


차라리 씨발 저 지평선이 망할놈의 신기루고 다가가니까 오아시스라도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빌어먹을 놈의 다크 판타지는 몬스터로는 안 죽으니까 이제 좆같은 환경을 보내는 것 같았다.


결국  다리는 멈추고 말았다.  이상 움직이지않았다.
나는 무릎을 꿇고는 숨을 헐떡이며 데일듯 뜨거운 모래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럼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어떤가요?"


겨울의 처녀는 사막에 대해서 좆도 모르는  했다.
그럴만도 하지. 이름만 봐도 사막이랑 연관은 전혀 없어보이는데.

내가 현대인이라 씨발 사막은 밤에 더 춥다는 걸 알고 있기에 망정이지, 고대의 도시 출신인 흔하디 흔한 용병이었으면 저기에 오케이 하고 그대로 얼어뒈졌을 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근처에 어디서 쉰단 말인가.
사막 한 가운데에서 쉬는 건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러자… 나 죽을 거 같아…."


내 등 뒤의 멍청이도 씨발 지식 수준이 현대인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걍 더워서 대가리가 안 돌아가던가.
나는 설명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올린 순간, 저만치에서 다가오는 모래 폭풍을 보았다.
하, 잘됐네. 씨발. 저거 타고 빨간 옷 입은 배관공처럼 날아서 여름의 도살자 뚝배기라도 까러가면….

"사람이다…."

뭐요 씨발?
나는 내 목덜미에 꾸준히 더운 입김을 불어넣는 메이를 흘깃 보았고, 그 탓에 그녀의 입김은 내 입술을 간질였다.
메이는 입술을 달싹이더니 가녀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람이야… 도와달라고 하자…."


확실히, 다가오는 모래 폭풍은 아주 빠른 무언가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 같아보였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아니야, 이 병신아… 저거 도적이야…."


이 빌어먹을 놈의 사막에는 고대의 도시 같은 문명 사회는 없다.
6개의 도적소굴이 있을 뿐이지.
내 말에 메이는 탄식했고, 그녀의 탄식은  목덜미를 축축하게 덥혔다.
작작하라니까 씨발 진짜.

짜증을 낼 기운도 없어서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고, 메이는 내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어 내 등에 딱 붙었다.
큼직한 가슴이 내 등에 딱 붙어서 축축했다. 땀 범벅이네 아주.


그들은 빠르게 다가왔다. 딱 보기에도 기이한 도마뱀에 탄 채로, 우리를 둘러싸고 기이한 포효를 내지르거나 우리를 가늠하거나 했다.
빌어먹을 놈의 '포위섬멸진'이었다.
이번이 세번째… 아니, 네번째인가?
나도 대가리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보자니,  좋지 않았다.


겨울의 처녀는 내게 가까이 붙었고, 메이는 헐떡이기만 할 뿐 싸울 수 없는 상태로 보였다.

"씨발, 좆같네."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그렇게 말하자, 도적들이 내려서 내게 다가왔다. 이 개새끼들이  칼날이 번뜩였다.
그 새끼들은 머리에 뭔 천조각을 두르고서 나에게 칼을 겨눴다.


"짐과 여자를 두고가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뭐래 씨발. 내가 아껴놓고 먹을 건데.
게다가 대사도 존나 뻔한 게, 이 개새끼들 어디 뭐 클리셰 학원이라도 다니는 모양이었다.
난 황당한 와중에 장검을 뽑고서 손가락으로 검날을 훑었다.


푸화아아악

화염 부여의 권능이 검날에 화염을 둘렀고, 나는 그 불꽃을 놈들에게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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