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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화 〉여름의 도살자 (33/274)



〈 33화 〉여름의 도살자

내가 타고 있는 도마뱀이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사막은 내 시야가 닿는 지평선까지 불모지였다.
이런 곳을그냥 걸어서 통과하려고 했으면 좆됐겠지.

"으어… 살겠다."

메이는  등 뒤에 딱 붙은 채로 물을 들이켰다. 그 조그만한 주둥이에서 흘러나온 물이 내 목덜미를 적셨으나,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 찜통 더위에서 물이 끼얹어지는 건 오히려 포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거센 속도감을 즐기며 메이가 도로 건네는 물을 받아들어 들이켰다.

"운이 좋군."


다행히 한 모금 정도는 남아있었다.


나는 가죽부대를 깔끔하게 비워내고는 도적에게 돌려주었다. 도적은 그 가죽부대를 받아들며 나를 경외감이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이런 눈빛… 나쁘지 않아.

벌써부터 이 도적단에게 애정이 싹트는 걸 느낄  있었다.
아주 깜찍하고 헌신적인 새끼들이었다.

난 분명 개싸움을 각오하며 칼에 불을 피워냈지만, 이게 그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었다.
알고보니 이들은 여름의 충실한 신자였다.

신이 세상과 인간을 버린 시대에도 신앙은 여전했고, 그 신앙을 가진 이들은 각기 그 신이 다스리는 영역으로 순례를 떠났다.
듣자하니 이 사막을 점거하고 있는 6개의 도적단 역시 그랬다. 그 6개의 도적단모두가 여름의 신자라니 웃긴 노릇이었다.

여름은 그들에게 별 다른 계시를 내려주지 않았다.
그들은 자세히 말해주진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내려왔던 계시 때문인지 분위기가 흉흉하다고 했다.


그 계시 때문에 사막 전체에 퍼져있는 도적단들은 서로를 적대하며 피를 흘렸다.


그들이 내가 사용한 권능, 화염 부여를 알아보고 나를 여름의 대전사라며 떠받드는  역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게임에서는 이렇지 않았는데."
"뭐가?"

메이는 물을 마시고 기분이 나아졌는지, 그렇게 내게 등을 기댄 채로 물었다.


"여기서 화염 부여를 써도 딱히 우호적으로 변하는 이벤트는 없었어."


도적놈들이 들을까봐 내가 메이의 귓가에 속삭이자, 메이는 간지러운 듯 몸을 꿈틀댔다.
그걸 연인의 꽁냥거림 정도로 받아들였는지 도마뱀을 운전하던 도적이 씨익 웃었다.


"헌데 대전사님도 대단하십니다요. 이런 미인을 두 분이나 데리고 있다니."


미인이라는 칭찬에 메이는 쑥쓰러워 했고, 겨울의 처녀는 내 무릎에 머리를 댄 채로 조용했다.
어째 얘는  말고는 반응이 이렇게 적냐?
일편단심이라 좋긴 한데….
애써 도적이 무안하지 않도록, 나는 저 멀리 지평선을 보며 말했다.

"뭐, 그렇죠. 도착은 아직입니까?"
"아, 거의 다 와갑니다. 저어기 저 돌더미 보이십니까?"


도적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확실히 쌓아올려진 석탑 같은 게 있었다.


"저게 기지 인근이라는 표식입니다. 물론 도마뱀들이 길을  찾아가긴 합니다만, 다루는 사람이 알 도리가 없어서 말입죠."


오호, 그건 또 처음 듣는데.
게임에서랑은 다른 설정에 나는 흥미로워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도적은 한참간이나 쓸데없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처음엔 분명 듣기 좋았는데…  수록 길어지는 거 같길래 나는 대답하면서 멀거니 지평선을 보았다.


씨발, 이 새끼 말 존나 많네.

"―그래서 말입니다. …아, 얘기는 다음으로 미뤄야겠군요. 크, 아쉬워라. 아직 들려드릴 이야기가 많았는디."

나를 향해 웃어보이는 얼굴에 주먹을 날리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 새끼 팔뚝이 내 머리만 했거든.



*

"나 멀미나고 어지러워… 내려줘…."
"다리가 안 닿는 거겠지."


메이는 내 말에 툴툴대긴 했으나 저항하지 않고 내게 안겨 바닥을 딛었다. 흉갑을 벗은 탓에 가슴이  눌려 뭉그러졌고, 메이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가 고개를 돌렸다.
겨울의 처녀까지 내려주고 나서, 나는 내게 다가오는 인상 나쁜 남자를 보았다.
이 새끼가 두목인가?


"어서오십시오, 대전사님. 저희 두목님께서 대전사님을 보고 싶어합니다."

아닌갑네.
딱 외모만 보면이 새끼가 두목일 거 같은데,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고는 그들에게 말했다.

"겨울님, 메이 좀 돌봐주세요. 금방 돌아올게요."
"예, 그럴게요."

그녀는 멀미가 난다며 찡찡대는 메이를 다독였고, 나는 그 모습을 뒤로 한 채 험상궂은 인상의 도적을 따라갔다.
2층으로 쌓아올린, 전형적인 사막의 민가같은 곳이었다.
다만 겉은 그냥 수수한 황갈색이었던 것에 반해 내부는 꽤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전리품인지 걸려있는 괴물의 수급 같은 것도 있었는데, 내가 거기에 관심을 보이니 그들은 꽤 자랑스러워 했다.
불법 점거를 하긴 했지만 가구는 이들의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생각보다 생활 거점이 존재하던 새끼들인  같은데, 그러면 대화가 통할 가능성이 높았다.


"여깁니다. 두목께서는 혼자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뭐, 혼자잖아.
내가 누굴 숨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싶어서 바라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를 여기까지 안내한 도적들도 제외하고, 나만 들어오라는 얘기였다.

암살당한다던가, 그런 걱정은 전혀  하는 건가.
도적단치고는  물렀다.

"그러죠."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이상한데 안 들어갈래요 할 수는 없었으니 나는 문짝을 열었다.
조금 허름한 나무문과는 달리, 내부는 바깥 만큼 화려했다.

하지만 나를 더 놀라게 하는  그게 아니었다.


"귀공이  여름의 대전사인가?  이름은 마리암, 귀공과 같은 여름의 신도이자 이 용병단의 머리지."


두목이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예쁜.


복장은 꽤 노출도가 높았고, 피부는 구릿빛이라 묘한 색기마저 풍겼다.
큼직한 가슴에는 점이 찍혀있는데 그걸 가감 없이 드러내니 괜히 눈길이 갔다.
그녀는  눈길을 못 알아챈 건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남미나 아랍권의 미녀가 이런 느낌이겠거니, 싶은 미녀였다.


자연스럽게 나는 가슴에서 눈을 떼어 시선을 끌어내렸고, 그런 그녀의 허리춤에 찬 장검을 보았다.
검집 없이 칼날이 드러난 외날검. 언뜻 밋밋해보이지만 화려한 양식의 물건.
내 눈이 그 칼을 향하는 걸 알았는지 그녀는 씩 웃고는 그 검을 보란 듯이 끌어내려 책상에 내려놓았다.
마치 적대할 의사가 없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근데 이런 NPC가 있었던가?
애초에 도적단은 게임에서는 전부 몬스터나 다름 없는 존재였으니 내가 단순히 모르고 있는 걸 수도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혀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애초에 이런 미인이 있다면 기억에 남았을텐데도.
내가 대답이 없으니 마리암은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차, 좀 수상하겠는데.
나는 그럴 듯한 변명을 생각해봤다.

"제가 대전사인 건 그냥 신뢰할  있는 겁니까?"
"아하, 그래서 그런 건가."

그녀는 내 침묵을 적당히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녀의 구릿빛 피부가 등불 아래에서 번들거렸다.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부하들은 내게 충직하고, 나도 그들에게 충실하니까.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귀공을 데려올 이유도 없을테고 말이지."

뭐, 그건 맞긴 하네.

나는 납득하고 그녀 바로 앞 의자에 앉았다.
오, 이거 좀 푹신한데.
거의 내 게이밍 의자 정도는 되는  같다.


"그래서, 저는 왜 부른 겁니까?"
"흐음? 알고서 온  아닌가? 듣기로는 보자마자 검을 뽑아서 권능을 보여줬다고 하던데, 우릴 찾고 있던  아냐?"

뭔가 심기가 불편해보였다. 옅은 적색이 도는 흑발을 높게 묶은 그녀는 고개를 기울여 나를 노려봤다.
어… 어, 씨발. 뭐라고하지?
나는 불현듯 나한테 화염을 쏴서 권능을 건네준 씹새끼가 떠올랐다.
이 새끼한테 뒤집어 씌워야지.

"저는 여름의 도살자께서 여기로 가라고 하는 계시를 내려서 왔을 뿐입니다."
"…그래?"

그러자 그녀는 나를 노려보던 눈을 거두고는, 굵은 눈썹에 수심을 담았다. 축 쳐진 눈매가어울리는 편이었다.

"역시 그랬나. 여름의 도살자께서는 직접 승자를 가려낼 생각이신 건가."

푹 내쉬는 한숨을 따라 어쩐지 달큰한 냄새가 풍겼다. 이제 보니 그녀는 손에 술잔을 들고 있었다.


"그럼 간단히 설명해줄게. 이 사막에는 우리 외에도 다수의 여름의 신도들이 있다."

그녀는 그렇게 묵묵하게 이야기를 시작해서, 나는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라고.

"여름의 도살자께서 세상을 떠나 이 척박한 불모지에 숨어들었을 때 그 행적을 따라온 신도단들이지. 그 중 하나인 우리는 그를 섬기는 용병단이야. 우리는 전투를 그에게 공물로 바쳐왔지."

오호, 도적단이 도적단이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듣기로는 용병단은 일이 없으면 도적단이랑 다를 바가 없다던가, 그런 얘기를 언젠가 들어본 기억이 난다.
게다가 여름의 도살자는 일단은 전사신. 이들이 용병단이라면 여름의 도살자를 섬기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 낯빛에서 납득을 읽어냈는지, 그녀는 술병을 집어들어 술잔에 따라냈다.


"그렇게 이 불모지에 도착한 우리는 나름의 세력권을 이뤄낼  있었고, 그건 다른 신도들 역시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어. 얼마 전에 여름의 도살자께서 우리에게 마지막 계시를 내려주기 전까진 말이야."

마지막?
죽기라도 했다는 건가?


"이 사막에 있는 신도들과 싸워 이겨서, 마지막에 살아남는  한 세력만을 투사로 거두겠다는 계시였지. 그 계시가 내린지 2년 정도가 지났고, 우리는 치열하게 싸워왔다."


오호.
여름의 도살자는 배틀로얄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막상 집단 사이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정도는 아니었고, 항상 우리는 병력 혹은 화력에 밀려물러서야만 했다. 그러던 중 귀공이 나타났지. 한손에 직접 여름의 도살자님께서 내리신 권능을 들고 말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는 귀공을 승자를 정하기 위한 조커라고 생각해."


 다크 판타지 세계에도 포커가 있나 보네.
아니면 번역의 일부거나.


"그럼 제게 바라시는 게 뭡니까?"
"…우리를 도와서 다른 세력들을 일소해줘. 그게 여름의 도살자가 바라시는 일일 거야."


…솔직히, 도와서 얻을 건 꽤 있는 편이다.
게임에서도 도적단들은 근거지에 아이템을 꽤 갖고 있는 편이었으니까.
 중 일부라도 받을 수 있다면 내 전력도 강화되고, 싸우기도 꽤 편해질테니까.

게다가….


나는 아직 이들을 NPC로대해야할지 인격체로 대해야할지도 정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도적들, 그것도 인간을 죽이는 건 내게 거부감이 상당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용병단의 도움 하에 싸울  있다면, 손을 더럽히지 않고 해결할 수도 있겠지.


"그러죠. 여름의 도살자께서도 좋은 전투를바라실 겁니다."


마리암의 표정이 밝아지는  보였다. 어째 다크 판타지 속 미인들은 슬픈 표정이나 찌푸린 표정이 더  어울리지?
이 여자도 웃는  별로 안 어울렸다.
그녀가 내 손을 덥썩 붙잡았다. 손이 무척 단단하고 거칠었다.

"정말 고―"


쾅!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방문을 걷어차며 누군가 쳐들어왔다. 나는 적인가 싶어 황급히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마리암은 적대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나보였다.

"무슨 일이지? 내 허가 없이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었을텐데."
"적입니다! 적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엥?
내가 마리암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똥씹은 표정으로 씨발, 하고 읊조렸다.


"괴물들이면 평소처럼 처리하면 되잖나. 꼭 이렇게 방해를 해야했나?"
"그냥 적이 아닙니다! 화염 비늘 부족입니다!"


그제서야 마리암의 표정에 긴장감이 돌았고, 나도 한숨을 뱉었다.


하필이면 좆같은 놈들이 왔네.
하지만  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했다.
놈들은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무기를 챙겨들고 자리를 떠나는 마리암을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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