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여름의 도살자
화염 비늘 부족은, 이 빌어먹을 사막에서 가장 독특한 놈들 중 하나다.
이 사막에 있는 도적단 중에서 유일하게 아인亞人인 이들이고, 동시에 가장 까다로운 놈들이다.
인간에 준하는 지성을 갖고 있어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갑옷은 물론이고 무기 역시 사용한다.
전략이나 전술 역시 존재하고, 개체의 강함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지만….
까다롭다.
단순히 인간과 유사하다는 점이 놈들을 까다롭게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억누르지 않았다. 씨발.
"돌아가면 게임 지워야지."
"진짜?"
메이는 내 옆에서 투구를 고쳐썼다.
"…아니."
역시 생각해봤지만 돌아가도 내가 이 게임을 포기할 거 같진 않다.
아, 좆망겜이지만 갓겜이라고.
"…난 지울래."
"그래라."
아직 먼 이야기지만, 메이는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긴장을 푸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나와 메이는 준비를 마치자마자 나무 장벽에 올랐다.
제 수하들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리는 마리암과 그녀 휘하의 용병들이 분주하게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장은 가지각색이었으나 공통적으로 원거리 무기와 근거리 무기가 하나씩 있는, 밸런스 좋은 조합이었다.
정식 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만능으로 준비한 걸까.
"왔군. 놈들에 대해서는 좀 아나?"
"조금요."
마리암은 내 말에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돌리고는 허리춤에 메어둔 장검을 뽑았다.
저만치 지평선에서 멈춰선 한 무더기에서 몇명이 떨어져나와 다가왔다.
놈들은 붉은색의 비늘에 마찬가지로 붉은 눈동자를 가진 기이한 이족 보행 도마뱀이었다.
"뭐하러 왔나!"
비늘로 뒤덮인 전사들이 방패를 굳건히 든 채로 이쪽을 꼬라봤고, 바로 그 뒤의 로브를 두른 도마뱀이 입을 열었다.
존나 거슬리는 목소리였다.
"우리의 요구는 간단하다. 여름의 인장을 내놔라."
"…뭐라는 건지 모르겠군. 우리에게 그런 건 없다."
"그럴리가. 우린 계시를 받았다. 설마 여름의 도살자께서 틀렸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마리암의 구릿빛 얼굴이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모욕적이군. 여름의 도살자께 맹세코, 나는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 꺼져라."
그렇게 대화를 주고 받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설마 여름의 인장이라는 게내가 갖고 있는 그건가.
나는 드래곤의 심장에서 찾아냈던 그 쇠붙이를 떠올렸다. 마침 그건 내 가방 안에 있다.
거기에 새겨져있는 문장은 여름의 도살자의 문양이었다.
…나 때문에 온 거 맞나본데.
"그럼 어쩔 수 없지. 너와 그 오만한 도적놈들을 일소하고 잿더미 속에서 찾아낼 수 밖에."
놈은 그런흉흉한 경고를 끝으로 뒤로 돌아, 제 진지로 돌아가려고했으나.
"쏴."
마리암이 으르렁거리듯 뱉어내자, 용병들이 일제히 자신의 손에 들린 활, 석궁, 슬링어, 쇠뇌 따위를 쏘아냈다.
"끄엑!"
전사와 로브를 두른도마뱀 모두 설마하니 자기 등짝에 대고 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탓인지, 그들은 몸이 정신 없이 꿰뚫리고 두들겨 맞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굳이 확인사살이 필요할 거 같진 않았다.
"우리가 모욕당하고 그냥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멍청한 놈."
오, 이런 성격이구나.
나는 대충 마리암이 어떤 성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적대하기엔 좀 그런 사람이다.
"온다. 전투 준비해라. 그리고 귀공은…."
그녀의 눈이 잠시 나에게 머물렀다.
지금은 투구에 갑주까지 다차고 있어서 티가 안 나지만, 아까 그녀의 방에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나는 거의 평상복이었으니까.
대충 내가 그다지 대전사답지 않은 몸이라는 건 파악했을 거다.
물론 이 다크 판타지 세계관은 외양이 그대로 강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그래도.
"알아서 싸우겠습니다. 너무 안 나대는 방향으로요."
그녀는 그 말에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재량껏 하게끔 놔두려는 모양이었다.
그런 내게 메이가 다가왔다.
"어떻게 할 거야?"
투구를 옆구리에 끼우고 소심하게 방패를 든 메이는, 염려 섞인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 뭔 생각하는지 안다.
내가 좀 잘생겼지.
"수가 너무 많은데…."
아니네.
나는 메이에게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이 그레이톰의 심판을 뽑아들었다.
"화염은 쓰지 말고. 안 먹히니까. 칼로 때리던가 방패 펼치는 걸로 공격해. 어차피 놈들은 여길 못 넘어. 그리고 우리만 싸우는 것도 아니니까."
그녀는 뭔가기이한 표정을 짓더니 투구를 뒤집어 썼다.
"알겠어."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동시에 공격이 시작됐다.
가장 선두에 있는 도마뱀들은 전신에 불을 휘감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달려들었다.
안 그래도 붉은 비늘은 화염으로 선명했고, 그에 못지 않게 붉은 눈깔은 한술 더 떠서 핏빛이었다.
화염 비늘이라는 부족명에 맞게, 저 새끼들은 화염 피해를 입지 않는다. 오히려 화염 피해를 입히는 쪽에 가깝다.
그 탓에 저들의 광전사는 그런 비늘에 불을 피워올리고 여름의 도살자에게 기도를 바치며 적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 약진에는두려움이나 망설임 같은 건 없었다.
한 마디로 미친 새끼들이었다.
"쏴라! 놈들이 장벽에 못 들러붙게 해!"
안 그래도 나무라 잘 단련된 광전사가 한 명이라도 벽을 기어오른다면 귀찮아진다.
그러면 내 목숨도 마찬가지로 휴짓조각이니까, 나는 적극적으로 방어에 가담했다.
이전의 나라면 공격 수단이 없다며 찡찡댔겠지만.
카아아앙!
쇳소리와 함께 빛나는 장검에서 회색 파동이 쏘아졌고, 장벽을 기어오르려 뛰어오른 도마뱀이 두쪽으로 갈라져 떨어졌다.
그러자 용병들과 도마뱀 인간들의 이목이 나에게 쏠렸다.
"역시 대전사 나으리! 굉장하시구만!"
"새끼들아 여기엔 여름의 대전사께서 계신다!"
용병들은 그렇게 고무적으로 외쳤고, 몇 도마뱀놈들은 나를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씹, 도마뱀 새끼들이 노려보는 게 이렇게 역겨울 줄이야.
나는 장검을 단단히 쥐었다.
다행히 그 관심은 오래 가지 않았다.
광전사들이 던진 도끼가, 아주 단단하고 거대한 방패에 틀어막혀 튕겨져 나오니 나한테만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그 방패의 주인, 메이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튕겨난 도끼가 자연스럽게 광전사 하나의 뚝배기를 깼다.
"이 아가씨 잘 싸우는데?"
일견 상투적인 대사였지만, 메이는 꽤 기쁜지 적극적으로 방패를 활용했다.
심지어 거의 다 오른 도마뱀 새끼를 방패를 펼치는 걸로 밀쳐내 적진 한 가운데 꽂을 정도였다.
이 새끼 방패 존나 잘 쓰는데?
그냥 자기 보호랑 보조나 하라고 쥐어줬는데, 본인도 재미 들렸는지 꽤 잘 쓰고 있었다.
방어전은 그렇게 우리 편의 사상자는 거의 전무한 채로 이어졌다.
도마뱀놈들은 원거리 무기가 거의 발달하지 않았는지 이쪽으로 날아오는 투사체 정도라고는 도끼랑 창 정도가 전부였다.
용병 중 하나가 팔이 꿰이긴 했지만, 내 팔 아니니까 된 거 아닌가?
나는 연신 칼을 휘둘러 원거리에서 안전하게 싸웠다.
그렇게 싸움이 이어지다 못해 딱 봐도 적진에 남은 게 쭉정이 뿐일 무렵, 갑자기 마리암이 정문 쪽으로 내려가더니 도마뱀에 올라탔다.
"기병! 날따라와라. 놈들을 타격한다."
와, 기병도 운용해?
하긴, 얘네가 가진 도마뱀은 화염 비늘족보다 한참 크고 빨랐다.
얼마 안 있어 용병들 다수가 기병이 되어 정문을 박차고 나갔고, 나는 부상을 입은 채 퇴각하는 일부 화염 비늘족 정도만을 볼 수 있었다.
그 외의 말하는 도마뱀들은 전부 죽었다.
*
이들은 확실히 훈련받은 전사들이었다.
루팅과 환호성으로 가득 찰 승리였음에도, 이들은 거의 기뻐하는 내색을 내지 않고 뒷처리를 했다.
"역시 대전사님은 탁월한 전사시더구만! 그거 봤나? 대전사님이 칼을 휘두르니 두 놈이 동시에 갈라져 쓰러지는 걸?"
"크, 역시 여름의 도살자님의 안목은 틀리지 않는구만!"
이렇게 나를 칭찬하거나, 메이에게 귀여운 얼굴과는 다르게 잘 싸운다던가, 자기 조카딸이 그정도인데 싹수가 다르다던가 가슴이 진짜 크다던가 하는 칭찬을 남겼다.
마지막 칭찬에도 메이가 은근히 좋아하던 걸 보면, 얘는 분명 자기 빨통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한참이나 용병들의 환대를 받다가 식사를 하고, 잘 숙소를 안내받았다.
처음엔 이들이 이렇게 방심시키고 내 멱이라도 따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뜬 눈으로 자는 척을 하는 동안 이 숙소를 얼씬하는 인기척 하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얕은 잠에 들었다.
사막을 건넌 피로랑, 솔직히 꽤 묵직한 양손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른 탓에 지쳐서 밥을 먹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이 숙소에는 우리 뿐이니까. 설령 무슨 일이 있으면 겨울의 처녀가 사전에 깨워주겠지.
그렇게 한참간이나 곤히 자고 있었는데, 뭔가 닿았다.
부드럽고,따뜻한 무언가가.
나는 무의식적으로 뒤척이다 눈을 떴다.
눈 앞에 보이는 건 갈색의 살덩이와 그 살덩이의 주인이었다. 그 살덩이에 찍혀있는 점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 주인이 씩 웃었다.
"귀공, 일어나 있나?"
그건 마리암이었다.
그녀는 평소보다 더 노출도가 높은 차림이었다.
거의 속옷만 입었다고 해야할 차림이었다. 바지는 입고 있긴 한데.
슬쩍 내려간 눈길을 따라 그녀의 건강한, 십일자 복근이 새겨진 복부가 보였고, 그 밑으로 자리한 불룩한 아랫배가 언뜻 보였다.
방 밖에서 비쳐오는 호롱불 때문에 어둑한 광택이 그 피부를 타고 흘렀다.
"예…?"
잘 자는데 왜 깨운 거야?
솔직히 좀 짜증도 나려고 했지만, 얼굴이 예쁘고 차림이 꼴리니까 참았다.
"이제 일어났네."
"예, 뭐죠?"
나는 눈꺼풀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멀찍이에 딱 붙어 자고 있는 메이와 겨울의 처녀가 보였다.
왠지 으슬으슬한 밤공기가 열린 방문으로 불어왔다.
"생각해보니 용건이 다 끝나지 않아서 말이야."
뭔 용건이래.
그런 거라면 아까 식사할 때에도 부를 수 있었고, 얘기할 건 다 했을 건데.
내 의문에 그녀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귀공도 알고 있겠지만… 여름의교도들에겐 대접법이 있거든. 여름의 도살자님 본인이나 그 분의 대리인인 대전사에게 해야하는 대접법이."
…?
뭔 처음 듣는 설정인데, 뇌가 안 굴러가서 사실인지 알 수없었다.
씨발 난방금 깼다고. 먹기 쉬운 설정을 줘.
그래도 얼추 짐작하자면 연회인가 싶어서 고개를 끄덕이니까, 마리암이 혈색 좋은 입술을 달싹였다.
"잘 알고 있다면 설명은 필요 없겠군, 바지를 내리게. 귀공."
…그런 설정이 있어?
먹기 쉬운 설정이긴 한데, 너무 갑작스러운 설정이 아닌가?
내가 얼타니까, 그녀의 손가락이 내 몸을 타고 올랐다.
"잘 보니까 저 여자들에게는 손도 대지 않는 것 같던데, 꽤 쌓여있지 않나?"
물론 얼마 전에 세레나랑 떡치긴 했는데, 한 발 가지고는 턱도 없다는 듯이 내 고환은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저 제안은 합리적이고 좋긴 했지만….
이런 곳에서?
내 당혹감과 일말의 기대를 읽었는지 그녀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시선이 걱정되는 거라면… 내 집무실은 어떤가?"
"좋죠."
거기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리가.
나는 그녀가 이끄는대로 그녀의 집무실로 향했고, 앞에 꿇어앉은 마리암을 보며 의자에 앉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속눈썹이 꽤 길었다. 가슴도 꽤 훌륭했고.
대뜸 반말을 하던 기 세보이는 여자라 눈요기로 삼지는 못했는데, 이렇게 보니 꽤 훌륭한 몸을 하고 있었다.
내가 뚫어져라 바라보는데도 마리암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미하게 웃었다.
색기 있는 미소였다.
"내 손은 거치니까, 입으로 대접해주지."
그녀의 말투는 딱딱했으나,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내 눈앞에서 출렁거리는 것을 보면, 기분이 나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기대가 차올라 두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장 보고 있어, 원한다면 내려다봐도 상관 없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바지를 내렸다.
나는 그 후 천국을 보았다.
천국은 좀 누리끼리한 천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