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여름의 도살자
애석하게도 본방까진 가지 못했다. 그건 철저하게 대접이었고, 나는 그 이상을 요구할수 없었다.
하려면 할 수는 있겠지만, 그 후에 일어날 일은 귀찮은 걸 넘어 곤란하겠지.
그래서 나는 다 끝나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들어가자 메이와 겨울의 처녀가곤히 자는 모습이 보였다.
휴, 다행히 안 깼네. 난 안으로 들어서 내 자리에 누웠다.
"어디 다녀오시는 건가요?"
아니네.
눈을 감고 있어서 자는 줄 알았는데, 겨울의 처녀는 안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 뭐냐. 여기 용병대장님이 내일 계획을 위해서 얘기 좀 하자고 하셨거든요."
"…그렇군요."
겨울의 처녀는 베일을 쓰고 있지 않아서 표정이 잘 보였는데, 살짝 열린 문틈에서 새어들어온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그녀의 얼굴은 수심과 여러가지 감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씨발 후각.
겨울의 처녀가 가진 인지 능력은 초인적이다. 근력도 그렇지만, 후각과 청각은 인파 속에 있는 나를 구분해낼 수 있는 정도다.
그렇다면….
내 좆에서 나는 침냄새나 은은한 밤꽃 냄새 같은 건 진즉 그녀에게 들켰을 것이다.
아마 경우에 따라서는… 나랑 마리암이 했던 말도 전부 들었을지도.
나는 침을 삼켰다.
"당신께서거짓말을 하셔도 저는 어쩔 수 없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다가왔다. 누운 나의 앞에 무릎을 꿇어 앉은 겨울의 처녀는 조금 슬픈 표정으로 내 뺨을 매만졌다.
"그러니까…. 괴로우시다면 다음부터는 제게 얘기해주세요."
무슨 말이야 그거.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입을 열려는 걸 겨울의 처녀가 손가락으로 막았다.
"전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께 봉사하는 게 제 기쁨이예요. 다음부터는 부디 제게."
…씨발.
좆되네.
나는 겨울의 처녀가 자진해서 비처녀가 되어주겠노라는 암묵적인 선언을 받아들였다.
그제서야 겨울의 처녀는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내 옆에 누웠다.
"재워드릴게요. 맥박이 빠르시니 잠이 쉽게 오지 않으시겠죠."
"아뇨 그럴 필요는…."
"쉿. 이 새벽만큼은 제 투정을 받아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었다.
사락거리는 그녀의 흰 머리칼과 달콤한 꽃내음, 여체 특유의 부드럽고 풍만한, 한 편으로는 단단한 존재감이 내 등 뒤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래서 아닥하고 얌전히 그녀를 따랐다.
"…넵."
그녀는 내 대답에 기뻐졌는지, 달큰한 숨을 흘리면서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언제든지 힘을 주면 나를 반갈죽할 수 있는 사람이라 긴장이 되면서도… 왠지 묘하게 설렜다.
그녀는 그런 내 심리를 알았는지 숨죽여 웃었고, 나는 괜히 지는 기분이라 그녀의 손을 문질렀다.
"…지금, 해드릴까요?"
겨울의 처녀는 그렇게 제안해왔다. 내 맥박이 빨라진 걸 어떤 신호로 받아들였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가 야릇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아뇨, 다음에."
겨울의 처녀는 아쉬운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무언가를 중얼거렸고, 나는 그 중얼거림이 간질간질해서 어깨를 흠칫거렸다.
그래서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잠에 들고 싶어도, 겨울의 처녀가 꾸준하게 드레스 속 큼직한 제 가슴을 내 등에다눌러대면서 유혹하다보니 잠에 들 수가 없었다.
*
이 칼라미티 사가의 세계에는 4명의 신이 있고, 그 신들은 각기 주관하는영역이 명확했다.
봄은 순환
여름은 생명
가을은 재앙
겨울은 죽음
그 중에서 여름은 생명, 투쟁, 색욕, 본능을 관장하는 전사신이었고, 그 탓에 여름을 섬기는 신도들은 무척이나… 노빠꾸였다.
나는 내 뒤에서 나를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는 마리암을 약간 꼬운 눈으로 꼬라봤지만, 미미하게 홍조가 도는 걸 보면 씨발 잘못 알아먹은 거 같다.
하, 좆같네.
나는 내 앞의 상대를 보며 상황을 정리했다.
나는 일어나서 대충 식사를 하고, 장비를 갖춰입고 마리암에게 찾아갔다.
마리암은 자기들은 도적들을전부 죽이고 그 영역을 빼앗아 여름의 도살자에게 바치는 공물로 하고싶다고 했지만, 나는 그들을 모두 규합시켜 가는 길이 도살자가 바라는 길이며 마지막 성전을 위한 준비를 해야한다며 사이비처럼 아가리를 털었다.
먹힐지, 안 먹힐지 알 수 없었지만 새벽의 일 덕에 그녀는 내게 호감을 갖고 있었고, 그 탓에 그녀는 그 말에 적극 동의하며 병력을 꾸렸다.
그렇게 차출된 용병대와 나, 메이, 겨울의 처녀는 인근에 있는 도적단에게 향했다.
이들은 용병단이나 부족인 다른 신도들과는 다르게 진짜 도적단이었다.
그런만큼 신앙은 옅었고, 내가 계획대로 화염 부여를 사용해서 내가 대전사임을 증명했지만.
'네가 정말 여름의 대전사라면 불꽃이 아닌 투쟁으로 증명해라.'
라며 다짜고짜 나를 상대로 결투를 걸었다.
옅긴 하지만 제대로 된 신앙쟁이였다.
그 결과나는 여기에 있었다.
불이 피어오른, 존나게 화염이 넘실거리는 장검을 오른손에 든 채로, 한숨을 내쉬면서 녀석을 꼬라봤다.
진짜 딱 봐도 산적,숲을 접경지에 끼고 있는 산채에 딱 어울리게 생긴 그놈은 동물 가죽을 뒤집어 쓰고 양손 도끼를 들고 있었다.
근데 솔직히… 독의 하천 보스 같은 위압감조차 느껴지지 않으니 좀 김이 샜다.
물론 위험한 건 마찬가지긴 하다.
"킁, 여름의 대전사 맞수? 몸이 비리비리한 게."
저놈은 저렇게 말해도 되긴 한다. 그냥 일반인 수준에 그치는 나와는 달리, 저 산적놈은 키가 2m가 조금 넘고 빡빡 밀은 머리에 팔뚝은 내 머리만 했으니.
요즘 산적은 벌크업이 필수냐?
"그쪽은 두목 맞나? 아가리 터는 거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어?"
너희 엄마도… 까지 나오려는 걸 겨우 억눌렀다.
하지만 놈은 화내지 않았다. 여기 다크 판타지 새끼들은 모욕이 잘 안 먹히나?
언젠가는 패드립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장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늘어뜨린 장검을 따라 화염이 넘실거리며 내 피부를 핥아댔지만 내게는 일말의 피해조차 없었다.
"흐흐, 누가 살면서 대전사와 싸워볼 기회를 갖겠어."
오히려 신나보였다. 아까는 비리비리하다며 씹새끼야.
씨발, 좆같은 여름의 페티시단 새끼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투구를 뒤집어썼다.
그러자 산적은 그것을 시작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녀석의 걸음마다 땅이 울리는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로 울리지 않았지만, 내가 느끼는 부담감은 얼추 비슷했다.
이 다크 판타지에서 처음으로 하는 제대로 된 PvP.
그보다는 이 세계에떨어지고처음 겪어보는 대인전이었다.
고대의 도시에서 도적을 때려잡을 때에도, 나는 뒤에서 손이나 빨고 있었으니.
기대와 불안이 뒤섞여 머리가 아파왔다.
빠르게 머리를 털어 걱정을 덜어내고는 단단히 쥔 장검을 휘둘렀다.
원거리 공격 수단이 있으면 팍팍 견제하는 게 맞다.
크게 휘두른 장검을 따라 회색의 검기가 나아갔다.
카가가각!
산적은 그런 건 처음 봤는지, 눈을 크게 뜨며 틀어막았지만 도끼는 무라도 써는 것처럼 가볍게 썰려나갔다.
"큭!"
도끼 자루만 남자 그는 숨을 삼키면서 허리를 틀었다.
그러자 내 눈에 칼자루가 보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잘 만들어진 단검이 빠르게 나에게 쏘아지려고 했다.
정확히는 그러려고만 했다.
나는 몸을 틀며 검을 휘두른 그대로 다시 한 번 휘둘렀다.
억지로 허리를 꺾은 탓에 좀 아팠지만, 이정도 허리 통증은 단검에 칼찌 당하는 거에 비하면 한참 나았다.
콰가가가가가!
파괴적인 소음과 함께 쏘아지는 파동.
그리고 그에 덧씌워진 화염.
화염 부여는 이 검기에도 화염 데미지를 부여하는 모양이었다.
"크아아악!"
나는 다음 이어질 공격을 대비하며 자세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산적 두목의 팔이 잘려나가더니 공중에 떠올랐다.
나는 그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피륙을 보며 굳었고, 두목은 던지려던 단검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그래, 뭐, 드래곤의 뚝배기도 갈라버리는 위력을 감안하자면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하겠지.
물론 NPC를 죽이는 걸 딱히 안 해봤던 건 아니다.
NPC는 밥 먹듯이 죽여도 봤고, 템을 얻기 위해서 후반에 고대의 도시를 싹 쓸어버리는 일도 해봤다.
하지만 그건 내가 이 게임에 들어오기 전의 이야기였다.
모니터의, 내 눈으로 보는 세상보다 낮은 화소로.
사람과 싸워본 일이 적은 것도 아니다.
학창시절에는 싸움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씨발 팔을 날려본 건 처음이었다.
원거리 공격임에도 내 손에는 살점과 뼈의 감각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억지로 숨을 골랐다. 그런 내 거친 숨소리를 겨울의 처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환호하고 있었다.
"대전사! 대전사! 대전사! 대전사!"
대충 이런 외침이었다.
그들은 내가 우두머리의 머리를 치고 자기들의 대전사임을 증명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진짜로? 씨발?
그냥 너희가 따르던 우두머리를 죽이라고?
내 당혹감은 면갑 너머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죽여, 대전사공!"
심지어는 마리암도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인명이 개좆으로 보이는 건가.
하지만 내가 목을 치지 않으니 사람들은 빠르게 조용해졌다.
나는 억지로 목소리가떨리지 않게끔 최대한 가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내 상대는 안되는 것 같은데, 이래도 납득을 못하겠나?"
꼭 죽여야 하냐는 말이었다.
만약 전부 달려든다면 좆되는 거고.
아니라면….
들이킨 숨에 사람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보였다.
그래, 씨발 이런 세계였지.
여기는 망할 놈의 다크 판타지였다. 인명은휴짓조각보다 가벼운 세상.
안일한 건 나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는 인간이고, 이들은 그걸 잘 이해하고 있었다.
슬슬 군중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질 무렵, 나는 일부러 칼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아가리를 털어야 했다. 최대한 납득이 가게.
나는 문득, 언젠가 우연찮게 보았던 사이비의 포교 영상과 …어떤 개좆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왜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씨발 써먹어야지 어째.
그 좆같음을 억지로 눌러죽이고는 숨을 들이켰다.
즉시 떠오르는 말을 되는대로 뱉었다.
"성전이 다가온다! 그대들은 세계가 떨어져감을 모르는가! 여름의 도살자께서는 마지막의 마지막, 영원히 이어질 전쟁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그대들의 목숨을 사소한 투쟁에 낭비하지 말라! 영원히 타오를 불꽃을 위해 그 목숨을 아껴라!"
내 말빨로는 이게 한계였다.
일부러 투구를 벗지 않은 채로 다가가 장검을 뽑아들어 다른 손으로 검날을 문질렀다. 금방 꺼져가던 화염이 다시 매섭게 타올랐다.
웅성거리려던 인파도 그 불꽃을 보고 조용해졌다.
"내가 여름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자비를 주겠다. 일어나 나를 위해 성전에 함께하라!"
내가 칼을 겨누자, 산적 두목이 눈을 크게 떴다.
씨발, 목소리 안 떨렸겠지.
이런 개소리를 해보는 건 처음이라 잘됐는지 모르겠다.
내가 바쁘게 눈알을 움직이자 사람들의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이 보였다.
씨발 달려들면 좆되는데….
하지만 그런 내 귓속을 찌르는 절그럭 소리가 있었다.
내가 몸을 돌리자, 산적 두목은 일어나며 웃고 있었다. 약간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성전이라고 했수? 영원한 투쟁이라고?"
이 거리라면 대응이 늦는다.
하지만 내 걱정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산적 두목은 기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하나 남은 팔로 내 팔을 들어올렸다.
검을 들고 있지 않은 팔을.
"나는 대전사님을 따라가겠다! 내 휘하의 병신 잡놈새끼들은 무장 챙기고 대전사를 따라라!"
그러자 그의 부하이던, 나를 둘러싼 원형 인파의 일각을 차지하던 이들이 무장을 들어올려 방패에 부딪히거나 투구에 부딪히거나 하며 기뻐했다.
…씨발 나 사이비에 재능 있나?
난 솔직히 존나 착잡해졌고, 멀찍이서 메이가 나를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